성주군 월항면 세종대왕자 태실. 경향각지의 명당형국에 자리한 태실 중에서도 가장 많은 태가 한 곳에 모셔진 태실이다. 이곳에는 세종의 18아들과 세손 단종의 태가 묻혀 있었다. 맨 앞쪽 가봉비는 세조의 태실이며 훼손된 태실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기를 든 왕자들의 태실이다.
여기까지는 많은 답사객들이 익히 주지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성주에 태종과 단종 태봉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알고 있는 사람들도 그 현장을 방문한 사람은 극히 몇몇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용암면 대봉2리 봉산마을 향우측 봉우리가 태종 태실이 있었던 곳으로 이사진은 세종대왕자 태실에 게시되어 있는 항공 사진이다.
대봉리 태종태실지. 사진 우측 제일 앞 봉우리가 태실지이다.
대봉리大鳳里. 행정구역상 한자음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태봉胎峰에서 유래되었을 개연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마을명은 봉산이다. 봉산封山은 태봉 조성과 관련 있는 말로 태봉을 조성후 왕으로 등극하면 어엿하게 귀부를 꾸미고 비신위에 이수를 갖춘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 태봉의 면모를 갖추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마을이름인 것이다.
봉산은 한적한 시골 마을로 마을 뒤편에는 이사룡을 배향하는 옥천서원이 자리하고 있다.(옥천서원 답사기는 이미 올렸었다)
답사매니아들도 이곳을 쉽게 찾지 못하는 이유가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선 1996년 발행된 성주군지에도 태종의 태를 봉안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만 현재는 흔적은 없고 일반인 민묘만 있다고 단정하였다. 또한 2000년에 발간된 성주군문화유적 분포지도에는 단 한 줄의 언급도 없다.
과연 흔적도 없을까?
방문하기전에 우선 조선왕조실록를 검색하였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본래 태는 함경북도 함주 태종1년(1401년) 이곳으로 이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태실원당 사찰은 지정하지 않았으며 수호인으로 10 집을 지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종 2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10월 8일(계해) 3번째기사
경산부(京山府) 조곡산(祖谷山)에 태(胎)를 봉안하였다. 민제(閔霽)가 함주(咸州)에 가서 태함(胎函)을 받들고 경산부에 이르러,태실(胎室) 시위 품관(侍衛品官) 4인과 수호인(守護人) 10호(戶)를 정하였다."
태실지로 추정되는 곳의 민묘이다. 맨위 봉분을 제외하고 아래 와 좌측 능선의 민묘는 가묘라고 한다.
유심히 보면 봉분 앞에 상석, 망주석 등의 석물이 보이지 않는다. 풍수적 이유 외에도 여러가지 사유로 석물을 장식하지 않는 묘가 많다. 주민들에게 들은 내용도 있지만 표현하지 않겠다.
좌측 능선 가묘
지금부터 민묘 주위를 살펴보자. 묘지 축대로 사용된 석조물이 보인다. 눈에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태실, 묘 등의 난간석의 석주가 틀림없어 보인다.
다른 부재들도 보인다.
여기저기 산포하고 있다.
석주아래 홈도 보인다.
작은 부재는 무엇일까? 난간석 상부 돌란대를 작게 잘라 저렇게 사용하였다.
태봉 입구 석함(?) 부재 가 보인다. 뒤집혀진 상태로 태함을 남았던 홈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확한 용도는 확신할 수 없다.
내려오는 길. 봉산 마을 민가에도 난간석 석주가 보인다.
흔적이 없진 않다. 원형 복구는 아니더라도 안내문이라도 세우고 남은 부재를 수습하였으면 좋겠다.
생활사 생명문화 축제 일환으로 군민의 관심을 환기 시키고, 진정한 축제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지자체의 노력을 기대해 본다.
사진출처...다음
고양 서삼릉 태실비 일제강점기인 1929년 일본 놈들은 민족혼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의 태실을 서삼릉과 동구릉으로 집결 시켜 버렸다. 태종의 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사진출처...다음 2015.0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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