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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서산시

서산...보원사지 당간지주.오층석탑. 법인국사 탑.탑비

by 임병기(선과) 2024.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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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발굴 중일 때 마지막으로 찾았습니다.

14년

강산이 한 번 지나 다시 찾았으니...

 

서산 보원사지(瑞山 普願寺址)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이다. 1987년 7월 1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16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된 석조, 당간지주, 오층석탑, 법인국사탑, 법인국사탑비 등이 남아 있다. 사역 내에서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된 바 있어 창건 시기를 백제 시대까지 올려볼 가능성이 유적이다. 2006년부터 2017년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보림사(寶林寺)에 있는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徵)의 탑비에 “체징이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827년)”는 기록에서 처음으로 보원사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최치원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화엄종을 주종파로 하는 큰 사찰 중에 보원사를 언급하고 있다.

975년에 법인국사 탄문이 보원사에서 입적하였고, 《고려사》에는 1530년에 보원사 계단(戒壇)에서 경율시험을 봤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원사가 상왕산에 있다”고 하여 16세기까지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619년에 발간된 서산과 태안의 지방지 성격을 갖는 《호산록》(湖山錄)에서 보원사가 강당사(講堂寺)로 바뀐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871년에 발간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철조여래좌상의 양손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시기부터 사세가 기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위키 백과 발췌)

 

2010년 포스팅

https://12977705.tistory.com/8723133

 

2004년 사진과 친하지 않은 시절의 겁 없이 갈긴 글이 재미있습니다.

보원사지 입구에 달구지 고삐를 죄고 당간지주를 향해 가는 주위에는 이름모를 야생화가
널부러져 봄의 아니 초여름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국립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철불이 아니더라도 국사 법인국사가 상주하였던 가람으로 한
시절 영화를 누렸던 가람임을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보원사지는 석탑, 부도비,석조 
등 음미 할 만한 문화재가 현존하고 있어 답사객의 발걸음이 잦은 폐사지다.


마치 이정표인 듯한 신라의 양식인 당당한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제 103호)는 화강암 
석주지만 부드럽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원형의 지대석 위에 당간이 휘날렸던 시절을 
맘속에 그리며 개울을 건너다 흠찟 놀라 뒤를 돌아 보니 고개가 갸웃 거려진다.

당간지주와 절터가 개울을 경계로 떨어져 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개울건너의 폐사지가
너무 협소하기에 틀림없이 예전에는 길 건너 산자락 밑으로 개울이 있었을 것 같으며
어느 시절 홍수로 인해 새로운 물길이 생겨 현재의 형세가 이뤄진 것은 아닐까?


보원사지가 백제 시대에 창건 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하려는 듯 오층 석탑은 많은 부재
의 가구가 목조탑에서 석탑으로 이어진 백제의 흔적이 가득하고,고려초의 전성기었던 광
종 때는 1000여 명의 승려가 기거했다는 사실이 법인국사 탑비에 기록되어 있듯이, 최대
의 영화를 누린 자취인 듯 고려의 특징인 방형의 괴임이 1층 몸돌 받침에 보인다.


폐사지의 느낌은 초목이 회색의 빛 가득한 겨울 해질 무렵이 절정이겠지만, 아마 수많은
승려가 주석할 때 쌀을 씻는 용도인지, 목간통인지, 알 수 없는 대형 석조로 가면서 코끝
을 간지러는 푸르름의 내음이 또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오니 황량감과 대비되는 색조가 주는 
시각 때문이겠지?


법인국사 보승탑(보물 제105호)은 신라 전형의 팔각 원당형의 부도로 8각의 지대석 위에 
올려 놓은 하대석은 안상과 사자 1구씩을 조각해 두었고, 운룡문과 귀꽃이 조각 장식되어 
있으며 중대석은 8각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다. 
팔각의 탑신에는 우주, 문비형과  화염의 두광이 있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 편인데  3단의 옥개 받침도 묘사되어 있다.


안내문에 의하면 부도비 이수 위에는 9마리의 용이 있다고 하나 볼 수 없지만,또아리를 
튼 거북의 꼬리가 정겨웁고, 더욱 놀라운 것은 내가 지금까지 알 고 있었던 귀부의 변천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가미가 보인다. 
부도비의 조성 시기가 고려초인데, 고려중기 이후 나타난다는 아가미가 보이니 공부를 다시
시작하라는 암시로 수용해야겠다.


역시 폐사지는 잿빛이 펼쳐진 겨울 저녁 노을이 고운 무렵에 느끼는 황량함이 주는 청량(?)함
이겠지만 푸르름의 내음이 질펀한 지금도 싫지 않은 까닭은 잿빛과 대비되는 시각의 청량함
때문이리라.


폐사지의 농익은 즐거움은 시간을 잊고, 흐름을 정지 시킨 마음으로 어슬렁어슬렁 중늙은이
마냥 뒷짐을 지고 배회한 것이기에 기웃기웃 황소걸음으로 어지럽게 흩어진 석탑, 석등
금당의 부재를 돌아보는 시야에 폐가옥이 보인다.


천년을 지켜온 폐사지는 맘의 넉넉함과, 안정을 가져오건만, 폐가옥은 을씨년 스러우며
금방이라도 전설의 고향에 등장한 구미호가 뛰쳐나올 듯한 기분인데, 더욱 나의 눈살을
찌부리게 하는 것은 부서진 채 방치된 호마이카 밥상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실을 언급할 처지도 아니지만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인한 성장
일변도의 지도이념과,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정신의 개조라는 미명하에 전개된 우리문화, 
민속을 미신으로 치부하며 말살한 것은 두고두고 잘못된 정책으로 역사에 기록되리라
확신한다.


당시의 정책, 특히 문화정책의 입안자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
그들의 뇌리에는 일본식 교육의 잔재로 세뇌되어, 우리문화는 모두 미신이라는 관념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단 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지역의 전통문화를 박살내었던 것이다.
무지몽매한 우리들은 충실한 주구가 되어 노년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산목,미륵,놀이
문화를 앞장서 타파해버렸으니, 오늘 날 복원한다고 염병을 떨어본 들 하루 아침에 원상
복원될 성질이냐 말이다!


일제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 문화 말살을 통한 전통의 단절과,정신의 말살에 있는 것을
눈치 챌 만한 객관적 시각도 여의치 않았겠지만 당시 그놈들은 신사를 신성시하고 전국에
신사를 설치, 참배하도록 했었는데 그건 왜? 미신으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갑자기 왠? 뚱딴지냐고?
호마이카 밥상에 대한 유년의 기억이 나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새마을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토에 펴져 나갈 즈음 울고향 배꼽마당에는 소달구지
가득 삐까번쩍 광택나는 호마이카 밥상을 실고 와서는 자개상, 손때 묻은 결이 고운 밥상과
교환해주어, 물론 일종의 판촉물도 덤으로 주었기에 한 집도 빠짐 없이, 아니 교환하지
않으면 유행에 뒤 떨어진 것으로 여겨 호마이카 밥상과 교환했었다.


니미럴!
우리의 자취 가득하며,천년을 이어오던 밥상들은 수출지향적 정책의 목록으로 모조리 물 
건너 가서 경제성장에 일조를 하였으니, 요즘에 박물관,고관대작의 안방에 자리잡고 있는 
상은 복 많은 상이지 않는가?


근데
그 많든, 한 집에 두어 개 가지고 있던 호마이카 밥상은 다 어디로 갔는가?
난 아직 호마이카 밥상을 수거하여 수출에 기여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십년도 채 못 가서 비틀어지고, 갈라지고,광택이 퇴색하여 아궁이에 불소시개로 밖에
더 했겠는가?


그렇다!
우리의 것은 그런 것이다. 천년을 변함없이 지켜온 폐사지의 문화재처럼 간사한 인간이
변해도 묵묵히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보이지 않는 농익은, 비록 무덤덤할 지라도
그런 무색,무취의 맛인 것이다.

 

아래는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당간지주. 보물

통일신라

 

기단부

 

상하 방형 간공, 외연의 돋을대

 

다리가 가설되었고

 

복원한 계단

 

괘불지주가 아니라, 계단 난간 기둥을 끼웠던 부재입니다.

 

오층석탑

 

기단부

하층기단 중석의 사자상

상층기단 중석의 팔부중상

 

하층기단 중석

 

아래는 상층기단 중석의 팔부중상

 

용. 간다라

 

건달바. 야차

 

가루라. 아수라

 

마루라가. 천

 

기단부 리뷰

 

탑신부

별석의 탑신 괴임

전층 탑신석 우주, 두텁지 않은 옥개석, 상부 1단 각형 굄, 4단 층급받침과 절수구, 옥개석 전각 상하 반전

 

옥개석

1,2층 2매 부재

4단 층급받침과 절수구

 

초층 탑신석 문비

각 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상륜부. 노반

찰주가 힘이 넘쳐보입니다.

]

금당터

예전에는 없었던?

 

금당터

불상 대좌, 안상 5 개를 새긴 큰 불상자리입니다

철불좌상 대좌이었을까요?

 

법인국사 탑. 탑비

 

법인국사탑

팔각지대석, 하대석하단석, 하대석 상단석, 중대석, 상대석, 탑신석, 옥개석, 상륜부

 

법인국사 탄문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광종 19년(968)에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그 이듬해 이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문화재청)

 

기단부

 

하대석

저석, 중석, 갑석이 일석인 하대석 하단석 안상에 사자상을 새겼습니다.

운용문

하대석 상단석에 새겼습니다. 상부에는 팔각굄을 조출하고, 모서리는 귀꽃으로 장식하였습니다.

 

팔각중대석에는 특별한 문양이 없습니다.

 

상대석

삼단 받침, 앙련, 난간이 이채롭습니다.

난간 궁판에 덩굴문을 새겼습니다.

 

탑신석

문비 2개, 사천왕, 신상 2기를 각 면에 새겼습니다.

 

동방 지국천. 신장(?), 북방다문천

 

서방광목천.신장(?).남방 증장천

 

옥개석

3단 받침, 겹처마, 낙수면 물매는 급하며, 귀꽃은 훼손되었습니다.

상부에는 복련을 새겼습니다.

 

상륜부

노반 받침(?). 노반. 복발. 앙화(?)

 

탑은 입적한 해인 975년과 탑비를 세운 978년 사이에 세웠을 것입니다.

 

법인국사 탄문 탑비

입적 후 3년 뒤 978년에 건립

비문은 한림학사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사천대박사 한윤(韓允)이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로 비문을 쓴 뒤 김승렴(金承廉)이 글씨를 새겼습니다.

 

귀부 정면

 

이수 전면

 

귀부 측면

 

이수 후면

 

귀부 후면

 

수조

 

고려전기에 조성한 오층석탑

978년에 세운 탄문의 탑비와, 그즈음에 조성한 법인국사 탑, 당간지주...

이른 아침 칼바람을 맞으며 눈길 주고받았습니다.

 

답사가 끝날 무렵

개심사 쪽에서 언덕을 넘어온 스님 한 분이 사지를 포행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걸망이 무거워 보였는데

잠시 후

마애삼존불을 뵙고 내려왔더니 스님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 서산 읍내까지 동행하였습니다.

짧은 시간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202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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