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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함안군

함안...무기리 주씨 고가. 무기연당

by 임병기(선과) 202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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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2006.09월

사진. 2022.11.05

 

 

충효쌍정려문(忠孝雙旌閭門)

 

경남 함안 칠원면에서 마산방향으로 5번 국도를 따라가면 무기리 마을에 솟을삼문을 갖춘 고택이 있다. 상주 주씨 종가댁으로, 영양 서석지와 더불어 조선시대 정원의 백미로 알려진 무기연당이 있는 국담 주재성의 생가이다.

숙종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경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숙빈 최씨 소생 영조가 등극한다. 이에 권력 중심에서 밀린 소론과 남인 세력이 경종의 독살 의혹과, 영조가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이를 명분으로 영조를 폐하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이인좌 난을 일으킨다. 국담 주재성은 의병을 일으켜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국담 선생은 전투에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재산을 털어 군량과 무기를 지원한 공로로 난이 평정된 후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이곳에 은거하며 후진 양성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솟을삼문에는 충신 정려(旌閭)와 효자 정려가 나란히 걸려있다. 충신 정려는 국담이 세상을 떠난 후 정조대왕이 내렸으며, 효자 정려는 이인좌 난 때 아버지와 함께 출정하여 공을 세운 큰아들 주도복에게 철종 11년(1860년)에 내린 것이다. 주도복은 어머니 병이 위중 목숨이 위태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목숨을 연장한 효자였다. 양반집에는 솟을 문이 대부분이지만 솟을삼문은 흔치 않은데 쌍충효정려에 어울리는 선택으로 보인다.

 

충신 정려.  1783년(정조 7). 계묘년

묘(廟) 명문은 흔치 않다.

 

효자 정려. 철종 11년(1860년). 경신년

철묘(哲廟)로 표기하였습니다.

 

감은재

넓은 바깥마당에서 별원인 무기연당을 바라보는 사랑채인 감은재(感恩齋)는 낮은 기단,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팔작지붕이다. 중앙에 대청을 깔고 양측에 방을 두었으며 정면에는 툇마루, 측면에는 쪽마루를 내고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장이다.감은재는 영조대왕의 은혜에 감읍한다는 뜻으로 주도복의 호이며, 사랑채 당호이다. 선생은 영조가 승하한 후 3년 동안 조석으로 궁궐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감은재 옆에는 영빈사(迎賓舍)가 복원되어 양반 가문의 접빈객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사랑채를 향한 안채는 정면 다섯 칸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으로 안채가 맞배인 경우는 드물다. 뒤에는 불천위(不遷位 :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함) 사당인 부조묘가 자리했다.

 

감은재

주도복의 호이며, 사랑채 당호

 

안채

 

무기연당(舞沂蓮堂)

무기연당은 이인좌 난에 참여했던 의병들이 난이 평정된 후 주재성의 공로에 보답하기 위하여 조성했다. 무기연당은 연못을 주재성의 호인 국담(菊潭)으로, 방형 연당 중앙에는 원형의 섬을 만들어 양심대(養心臺)로 이름 붙여 선생에게 바친 정원이다. 주건물로는 하환정, 풍욕루, 영정각이 있고 훼철된 기양서원 자리에는 충효각이 복원되었다.

무기(舞沂)는 논어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는(욕호기 : 浴乎沂 풍호무우: 風乎舞雩)에서 유래했지만, 유유자적한 생활과 풍류를 즐기며 학문에 정진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표현했을 것이다.

 

국담(菊潭), 양심대(養心臺)

맞은편 건물이 충효사와 영정각.

 

기양서원 중건기념비

 

기양서원은 1701년(숙종 27)에 주세곤(周世鵾), 주선원(周善元), 주각(周珏), 주재성(周宰成), 주도복(周道復) 등 다섯 사람을 추향하기 위하여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에 창건되었다. 고종 5년(1868) 훼철되었다가 연못 남쪽에 있는 충효사(忠孝祠)는 광복 후 1971년에 중건되었다. 본래의 자리는 서원 터만 남아있다. 
 

배향인물

 

1)주벽-주세곤(周世鵾)
참판공 주문보(周文甫)의 장남이고 주세붕(周世鵬)의 백형이다. 학구에 전념하여 경사에 박통하고 정주의 학을 연수하여 덕기가 성취하여 문명을 크게 떨쳤다. 또한 무예를 닦아 종종 조에 무관으로 수의위교위(修義衛校尉)가 되었다.
그의 좌우명은 아버지의 훈계에 따라 신구(慎口), 신신(慎身), 신심(慎心)이었으며 이것을 스스로 돌이켜보면서 잘 지키기 위하여 성재(省齋)를 호로 삼았다. 중직대부 예빈시 부정(中直大夫 禮貧寺 副正)에 추증되었다.
 
2)주선원(周善元, 1580~1638)
주선원은 주세곤의 증손이며 주명창의 아들이다. 자는 지언(止彦)이고, 호는 우재(于齋)이다. 총명영민하여 장현광의 문하에서 위기지학을 전심하여 학식이 깊고 덕행이 독실하였다. 장현광이 ‘청음군자(淸陰君子)’라 칭송하였고 사우 간에도 도의지교가 깊었다. 가훈을 잘 준승(遵承)하였다. 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 判決事)에 증직되었다.
 
3)주각(周珏)
주세곤의 5세손이며 주선원의 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아(孝兒)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박문엽(朴文燁)의 문하에서 수업하며 성경현전(聖經賢傳)에 전심하여 신독공경(愼獨 恭敬)을 일상생활의 표본으로 하였다.
정묘(1687), 병자(1696)의 양대 흉년에는 가재를 기울여 구휼하였고 향교를 수리하고 향교재산을 늘려 학전을 마련하고 덕연서원을 중창하여 문풍을 쇄신하였다. 단기관혈(斷旨灌血)과 3년 여묘를 통해 부모에의 효를 솔선수범하였다. 현종의 승하시를 비롯하여 국상시에도 부모상과 같이 행함으로써 임금에 대한 충을 시범하기도 하였다.
호는 경재(敬齋)이다. 지극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서 통선랑 사헌부 지평(通善郞 司憲府 持平)의 벼슬이 증직되었다.
 
4)주재성(周宰成, 1681~1743)
조선 후기의 학자·의병장.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성재(聖哉). 호는 국담(菊潭). 세붕(世鵬)의 후손으로, 각(珏)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근사록≫과 ≪주자대전≫을 탐독하고 <위학입교도 爲學立敎圖>와 <오륜론 五倫論>을 지어 실천에 힘썼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에 진출, 관찰사 황선(黃璿)으로부터 김해진군(金海鎭軍) 3,000명을 지원받아 영호(嶺湖)의 요새인 분치령(分峙嶺)을 방어하였다. 또한, 그 때 군량을 보급하기 위하여 가산을 팔아 쌀 300섬을 내어놓았다. 난이 평정된 뒤 고향에 돌아와 학문연구와 훈고(訓詁)에 전심하였으며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관찰사 황선과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조정에 그를 천거하였으나 등용되지 않았다.
죽은 지 3년 뒤인 1745년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으며, 1783년(정조 7) 영남유생의 상소로 정려(旌閭)되고 이어 1788년 기양서원(沂陽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중용≫과 ≪대학≫을 주석한 ≪용학강의 庸學講義≫, ≪논어≫·≪맹자≫·≪주역≫ 등을 추연한 ≪경의집록 經義輯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예설을 집약한 ≪거가요범 居家要範≫ 등이 있다.
 
5)주도복(周道復, 1709~178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여강(汝剛), 호는 감은재(感恩齋). 칠원(漆原)의 무기리(舞沂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좌승지에 추증된 의사(義士) 재성(宰成)이며,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함안조씨(咸安趙氏) 석구(碩逑)의 딸이다.
1728년(영조 4) 아버지가 의병을 일으켜 이인좌(李麟佐)의 난적을 토벌할 때에 아버지를 따라 출진(出陣)하였고, 어머니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여 연명(延命)시켰다. 조상의 업적을 기리니 영조로부터 그의 조부와 아버지에게 증직을 받게하였다.
1859년(철종 10) 이휘준(李彙濬)·권재형(權載衡) 등의 유소(儒疏)로 조봉대부(朝奉大夫)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기양서원(沂陽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감은재일고 感恩齋逸稿≫ 1책이 있다.
 
*출처. 서원연합회
 
 

기양서원 영정각

 

하환정(何換亭). 풍욕루(風浴樓)

 

풍욕루(風浴樓)

루(樓)로 미루어 예전에는 2층으로 추측되는 풍욕루(風浴樓)는 바람에 목욕을 한다는 뜻이지만, 풍진에 오염되지 않고 초연한 삶을 영위하겠다는 선생의 마음자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경(敬)
풍욕루 대청 위에는 경(敬)자가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다. 소수서원 입구의 경자 바위, 영양 서석지의 경정 등 '경'의 뜻은 주자가 유교의 처음과 끝을 경이라고 한데서 가져온 글로 국담 선생이 학문에 매진하는 궁극 목표라 하겠다.

 

하환정(何換亭).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국담선생 스스로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고 자연에 묻혀 살아가는 삶에 만족한다는, 다시 말해 벼슬과 현재의 생활과 바꾸지 않겠다는 선생의 성정을 보여준다.

 

정료대 지주

 

사대부가(家) 정원의 연(蓮)은 불교적 해석과 달리 중국 송나라의 학자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유래한 연을 군자로 묘사하여 사사로움에 물들지 않겠다는 상징성이다. 방형 연못 안에 원형 섬은 우리 전통사상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형이라는 사상을 표현한 조형물이다. 
무기연당은 어떤 연유인지 두 개 축으로 구축되었고, 양심대 아래 바위에는 지주중류, 백이숙제의 동의어 백세청풍((百世淸風)을 새겨 일편단심 조선왕조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대부가의 지조를 암시하고 있다.

 

2022.11.05

 

*저의 옛글(2006년) 중

국담 선생의  충신 정려는 영조가 아니라 정조로,  감은재 선생의  효자 정려는 철종 10년(1859)을  철종 11년(1860년), 경신년으로 바로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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