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고성군

고성...건봉사 금강 계단. 등공대

임병기(선과) 2021. 7. 21.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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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계단

 

강산이 한 바퀴 돌고 다시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오매불방 그리던 등공대 참배와 더불어 금강 계단과 부도전 순례길입니다.

 

건봉사(2010년)

https://blog.daum.net/12977705/8723225

금강 계단

부처님 치아사리탑 3과 봉안(5과는 적멸보궁에 안치)

 

진신 치아사리

건봉사 치상사리탑비에 의하녕 신라시대 자장법사가 636년(선덕왕 5년) 중국 오대산에 건너가 문수보살전에 기도 끝에 얻은 진신사리 100과중 일부입니다. 자장법사는 643년 귀국하여 이 사리들을 통도사,월정사,법흥사,정암사,봉정암에 나누어 봉안하였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통도사에 난입하여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해 가버렸습니다. 
그 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일본에 잡혀간 포로 송환등의 문제로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때 통도사 사리를 되찾아오게 됩니다. 사명대사는 왜적이 파괴한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수하여 사리를 다시 모셨는데, 그 가운데 12 과를 나누어 맨 처음 의승군을 규합하였던 인연이 있는 건봉사에 봉안하였습니다.(건봉사 홈)

 

 

치아진신사리탑

1724년 통도사에서 분 사리 한 12 과를 봉안했던 사리탑

(사진 촬영 테크닉도 문제지만, 계단에 올라가는 결례를 범하기 싫어 세부 디테일을 찍지 못했습니다)

 

건봉사에 치아사리탑이 봉안된 것은 우연하게 알려졌습니다.

"사명대사에 의해 봉안된 진신 치아사리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1986년6월 사리탑이 도굴되면서부터입니다.
1986년 6월10일, 민통선 이북지역에 있어 출입하기 어려운 건봉사에 도굴꾼 일당이 잠입했습니다.

 ‘모대학 건봉사 복원조사단’임을 사칭한 위장출입증으로 검문소를 지났으나 그 다음부터는 무사통과. 그들은 이틀간 ‘사적 조사단’ 운운하면서 제초작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일당은 금속탐지기로 문화재의 유무를 확인한 다음 13일 아침 2시간에 걸친 도굴 끝에 치아사리를 훔쳐갔습니다.

 

하지만 6월 하순부터 도굴꾼들의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 “사리를 돌려주라”고 꾸짖는 꿈을 꾸게 되었고 일당은 하루도 아니고 며칠간이나 계속된 꿈의 계시에 불안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7월14일, 일당 중 주범 ㄱ씨는 결국 공범을 시켜 서울 봉천동 ㄱ호텔로 찾아가 훔쳐간 사리 12과 가운데 8과를 맡겨놓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4과는 공범 중 한 명이 가지고 달아나는 바람에 증발되고 말았습니다."(건봉사 홈)

 

주인공을 새기지 않은 부도

금강계단 향우측에 위치.

 

금강계단과 나란히 모신 고승의 승탑(부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혹 향좌측 부도와 더불어 역시 진신사리탑은 아닐까요?

 

(사진 우) 건봉사 석가치상입탑비(乾鳳寺釋迦齒相立塔碑)

1726년(영조 2년) 건립.

월봉선사(月峯禪師) 쌍식(雙式)이 비문을 짓고, 글씨도 썼으며, 전액도 하였습니다.

위 금강 계단에서 언급했던 1724년 통도사에서 분사리한 내역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진 좌)  석가여래영아탑봉안비(釋迦如來靈牙塔奉安碑)

1906년 건립

분사리한 내역이 새겨진 비석으로  1878년 화재로 파손. 1906년 복원

 

금강 계단 향우측

 

금강계단 향좌측 부도

우측 부도와 마찬가지로 당호를 새기지 않았습니다

 

등공대

민간인 통제구역에 자리하여 두 차례 신청했으나 뵙지 못했던 님.

노마드 님의 정성과 열정으로 인연 지었습니다

 

등공대(騰空臺)

758년 발징화상이 정신, 양순 등 수행승 31인과 신도 1,820명의 참여로 아미타 만일염불회를 결성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만일동안 신행을 닦았습니다. 해마다 신도 1,700인은 쌀 한말과 향유 한 되의 시주를 하였고, 신도 102인은 오종포 한 단의 의복시주로 만일을 공양하였습니다.

 

29년이 지난 787년 7월17일 아미타부처님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과 함께 나타나시어 크게 칭찬하시고는 수행승 31인을 극락세계로 이끌자 신도 1,820인이 크게 기뻐하고 경사스러워 1,300여 번의 절을 하였습니다. 이에 아미타부처님은 신도 913인 또한 극락세계로 이끌었습니다. 나머지 신도 907인은 그 자리에 남아 수행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후 두 번 더 아미타부처님께서 나타나시어 18인과 30인을 극락으로 이끄셨고 발징화상은 “나머지 859인은 부처님수기를 입고 다시태어나 세상을 제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도들은 이를 기념하여 건봉사에서 5리 떨어진 북쪽능선에 등공대를 세웠습니다.

능선끝이 봉긋하여 연꽃의 분술이요, 어우러진 산봉우리는 연꽃잎의 형태의 성지입니다.

상서롭기 이를 데 없는 이곳 등공대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지극정성으로 염송하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아미타부처님의 가피를 입는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출처:건봉사 홈

 

정방형 향로석. 장방형 배례석. 종형 부도

 

승탑

부등면 팔각 지대석과 팔각 기단을 일석으로 치석, 음각의 귀꽃과 복련을 새긴 기단 상부에는 팔각이 정연합니다

종형 탑신과 큼직한 연화보주는 일석입니다.

 

탑신부

삼십일인 등공 유적 기념지탑(三十一人謄空 遺蹟紀念之塔)을 새겼습니다.

유적(遺蹟)은 다른 글자를 지우고 새긴 것 같습니다.

준공(竣工)이었을까요?

 

기단부

 

측면

 

배면

 

ㅁㅁㅁ 사년 을묘 칠월 일 립(ㅁㅁㅁ 四年 乙卯 七月 日 立)

희미하지만 맨 위에 3글자(?)가 훼손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훼손된 명문은 소화 십(昭和 十)으로 추정되며,  소화 14년昭和 十四年), 을묘(乙卯)는 1939년입니다

 

석공 이원호(石工 李元浩)

장인의 이름을 새긴 예는 흔치 않으며, 1939년 당시의 사회상이 짐작되는 대목입니다.

 

등공대

통일이 되고 민간인 통제구역이 해제되어 금강산 답사 길에 자유롭게 뵐 수 있는  그날을 학수고대하며...

 

2021.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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