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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밀양시

밀양...조선 성종 왕녀 태실

by 임병기(선과) 2020.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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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면 삼태리

태봉노인회관에서 바라본 태봉입니다.

이곳에 주차 후 향좌측 길을 따라 태봉사(원당사찰?) 삼거리에서 우측길로 올라가면 문화재 안내 입간판이 보입니다

그 뒤가 태봉으로 향하는 들머리지만 길이 없는 까닭에 겨울 답사를 추천합니다.

 

마을 앞 느티나무

 

태함

느티나무 아래에 태함 덮개돌.

태실에서 흘러나온 태함입니다.

 

 

안내문

안내문을 비롯 마을 입구의 입간판도 갖추어져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안내문에 큰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표석'은 아기태비 또는 아지태비로 수정되어야 합니다.

 

-세운 날짜

'성화십칠년십월십일(成化十七年十月十日)'이 아니라 성화 십칠년 십월 초구일 입석(成化十七年十月初九日 立石)입니다

 

-'성종과 정현왕후사이에는 신숙공주 밖에 없다'는 설명은 오류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중종의 누이 신숙공주와 언니 순숙공주가 있으며 또한 중종의 누이 동생인 두 공주는 일찍 요절하였습니다. 

 

아기태비

태봉 정상에 나란히 서 있습니다.

 

두 비석의 명문은 전, 후 내용이 동일합니다.

 

 

태함이 도굴된 곳에는 웅덩이가 되었습니다.

 

덮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아기태비(1)

기단위에 비신과 비수 보주는 하나의 부재이며, 성종 조의 전형적인 아기비의 유형입니다.

 

왕녀 태실 (王女胎室)

주인공을 새기지 않았습니다.

 

비머리 전면

 

아기태비(후)

 

세운 날짜를 새겼습니다.

 

성화 십칠년 십월 초구일 입석(成化十七年十月初九日 立石)

1,481년(성종 12년)

 

비수(후)

 

아기 태비(1)

 

아기태비(2)

전면

 

왕녀 태실 (王女胎室)

주인공을 새기지 않았습니다.

 

비수(전)

 

 

성화 십칠년 십월 초구일 입석(成化十七年十月初九日 立石)

1,481년(성종 12년)

 

초구일 입석(初九日 立石)이 뚜렷합니다.

안내문의 명문은 오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수(후)

 

 

두 아기태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성종은 자녀도 많았지만, 특히 왕녀들의 아기태비를 조성하기 시작한(?) 임금이어서 태주는 불분명합니다.

 

다만, 현장 설명문처럼 '밀주구지'에 그 단서가 있을 뿐입니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는「조야산리 재부서이십리 당성공주태 출김선생필재집(助也山里 在府西二十里 唐成公主胎 出金先生畢齋集)」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조야산리(助也山里)는 태봉(胎封)이란 뜻에서 지금의 태봉(台封)이란 지명이 나온 것이라 한다. 성종과 정현왕후(貞顯王后)사이에는 신숙공주(愼淑公主) 밖에 없기 때문에 밀주구지의 당성공주는 신숙공주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이 설명문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류입니다.

신숙공주(1,481~1,486)의 누이인 순숙공주(1,478~1,488)가 있으며, 요절한 2 명의 공주가 더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종실록 218권, 성종 19년 7월 14일 을해 1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순숙 공주(順淑公主)가 졸(卒)하니, 조시(朝市)를 3일 동안 정지하였다. 공주는 주상의 딸인데, 나이가 열한 살이다. 전교하기를,"공주는 나이 어린 미성인(未成人)이므로 상장(喪葬)의 모든 일을 일체 반드시 횡간(橫看)에만 따른 것이 아니고 참작해 할 것이며, 빈소(殯所)를 없애고 바로 장사하도록 하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삼태리 태봉의 주인공은 순숙공주와 신숙공주로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태비를 세운 년도와 신숙공주가 태어난 해(1,481년)가 일치하고, 다른 곳에 있던 순숙공주의 태도 이태하였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의 논거도 밀주구지에 등장하는 당성공주가 신숙공주라는 근거가 불명확하여 픽션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안내문 오류 수정

태봉 들머리 주변 정리를 기대하며...

 

2020.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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