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밀양시

밀양...무봉사 석조여래좌상 배면불(약사여래좌상)

임병기(선과) 2018. 12. 18.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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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봉사

손꼽을 수 없을 만큼 자주 들린 절집

석조여래좌상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광배 배면에 석불이 표현되었다는 것은 10여년전에 인지하였었다.

이후

주지스님을 비롯 여러분에게 여쭈었지만 금시초문이라며 잘못된 정보라고 일언지하에 배관을 거절하였었다.

그렇다고

불단 위에 올라가서 볼 수도 없고..

 

 

인연.

무애님 자당어르신의 꿈같은 인연으로 우리 곁에 잠시 나투시고는 다시 기약없는 면벽수도에 들어가신 약사여래부처님

 

주형거신광배 배면에 양각으로 새겼다.

소발, 육계가 높다.

상호는 복스러우나, 훼손이 심하여 윤곽이 분명치 않다.

긴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지 않았다.

 

어깨는 부드럽게 새겼고

법의는 우견편단. 왼손에 약환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봉사 석조여래좌상은 아미타불일 것이다.

불신에 비하여 하반신이 약하고, 연화대좌를 간략하게 새겼다.

 

통일신라 후기 불상으로 전한다.

 

 

 

 

약환

 

 

연화대좌

 

 

 

 

 

 

광배

 

 

 

 

 

석조여래좌상

 

 

 

 

 

(사진 달넘새님)

 

금년에는

무애님 덕분에 진주박물관으로 이건한 산청범학리 석탑과, 무봉사 배면불 정보를 9월에 인지하고 뵈었으며

페친 덕분에 창원대 상천리석불좌상 소식을 접하고 뵌 의미있는 한해이었다.

다만

인지하고도 아직 답사하지 못한 2기 석탑과의 인연은 해를 넘길 듯하다.

 

2018.10.17

 

아래는

옛 글이다.

 

 

옥외에 약사여래좌상을 모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발걸음 하였다.

오류도 보이지만 글은 2006년 답사기로 대신한다.

 

 

 

 

 

약사여래좌상

이 부처님을 뵙기 위해 오랫만에 다시 찾았다.

 

 

바위를 주형거신광배 모습으로 치석하고 약사여래를 새겼다.

훼손이 심하여 형태 구분이 쉽지 않은 상호는 고부조, 불신은 저부조이다.

불두에 비해 불신이 작으며 결가부좌한 하반신도 높지 않다.

귀는 길어 어깨에 닿았고 희미하지만 삼도를 표현한 것 같다.

법의는 우견편단, 두팔은 가늘고 오른손은 항마 촉지인이며 왼손에 약함을 들었다.

조선시대 불상 느낌이 든다.

 

 

 

 

 

  

 

 

 

 

 

 

 

 

 

2017.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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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혜공왕 9년(773) 창건된 것으로 전해오는 무봉사는 염남루에 있었던 영남사의 부속암자 였다고 한다. 

저녁무렵 은은하게 울리는 종소리가 밀양 팔경의 하나일만큼 남천강변과 잘 어울리는 풍광이다.

 

 

 

무량문.

그렇다면 아미타불을 모셨단 말인가? 석조여래 광배 뒷면에 약사여래불이 새겨져 있으니 여래는 아미타불이 아닌가?. 무봉사에는 기이한 나비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태극나비의 전설

고려의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 어느 날 이었다. 나비가 나올 춘삼월도 아닌데 갑자기 나비가 떼를 지어 날아와 온 산을 뒤덮었다. 며칠동안 영남루가 서 있는 뒷산을 덮으며 날아다니던 나비는 죽은 흔적도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나비의 날개에 태극 표시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나라가 혼란에 휩싸여 있었던 때라, 어떤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과연 사람들의 말처럼 얼마 아니 되어서 고려가 건국되고 사회혼란이 가라 앉아 태평성대를 맞게 되었다. 그 후에도 가끔 이 태극나비가 나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라에 경사가 있었다. 그래서 고려 초에는 이 나비를 보호하라는 명을 내렸고 국성접(國成蝶)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 나비는 조선 오백년과 일제강점기에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1945年 8月 15日 오후 3시쯤 한쪽 날개는 감청색깔 또 한쪽 날개는 기명색깔의 태극무늬를 한 손바닥 만큼 큰 태극 나비가 무봉사 법당에 날아 들어와서 사흘만에 죽었다. 이를 곱게 표본으로 만들어 서울 박물관에 보냈다. 또 그해 8月 19日과 10月 25日에도 태극나비가 나타났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이승만 대통령께 보내고 또 다른 한 마리는 무봉사에 보관하고 있다.

 

 

무봉사 창건 편년을 짐작케하는 불상으로 신라통일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석불은 나발,육계가 큰 편이고 삼도, 백호가 보인다. 법의는 두터워 보이고 길상좌 가부좌에 항마촉지 수인이다. 주형광배에는 덩굴문, 연꽃문, 불꽃문과 다섯분 화불이 배치되어 있다.

 

광배 뒷면에는  약사여래좌상이 양각되었다고 하나 직접 볼 수가 없었다.

이런 구도는 경주 동남산 보리사 석불과 전북 남원 만복사지 석불 등에 보이는 작례가 드물다.

 

아랑각

 

"아랑의 성은 윤(尹), 이름은 정옥(貞玉)이었으며, 그는 부친이 영남(嶺南) 밀양태수(密陽太守)로 부임하였을 때에 수행하여 밀양에 갔다. 그 고을 통인(通引- 관리명)과 그의 유모 음모에 빠져서 아랑은 어떤 날 밤 영남루의 밤 경치를 보러 갔다가 통인 백가(白哥)에게 욕을 당하였다. 그것은 아랑이 달 구경을 하고 영남루 위에 있을 때, 별안간 유모는 없어지고 기둥 뒤에 숨어있던 백가가 뛰어 나와서 아랑에게 연모의 정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랑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백가는 아랑을 죽여 강가 대숲 속에 던져 버렸다. 다음 날 태수는 여러 조사를 하여 보았으나 아랑을 찾지 못하고 마침내는 자기 딸이 야간 도주한 것이라 믿고 양반 가문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 이상 근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벼슬을 하직하고 한양 본가로 갔다.

 

그 뒤로 신관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그 날 밤에 처녀귀신이 나타나서 신관은 비명횡사하고 만다. 이 때문에 밀양태수를 원하는 사람이 없어 지원자를 구하게 되었는데 이 싱사(上舍- 지난날, 생원이나 진사를 가리키던 말)라는 사람이 지원하여 그 날 밤에 촛불을 켜고 독서를 하고 있을 때 별안간 머리를 풀어 헤치고 목에 칼을 꽂은 여귀가 나타났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여귀는 그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애원하였다. 날이 밝자 그는 통인 백가를 잡아 족쳐 자백을 받아내고 아랑의 원혼을 달래 주었다. 그 때부터 사또의 객사에는 원혼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다음

 

 

죽음으로써 정조를 지킨 아랑을 찬양하고자 밀양의 처녀들이 모여 밀양 남천강 강변위에 있는 영남루 밑 대밭 속에 비석을 세우고 아랑각이라는 사당을 지어 해마다 음력 4월 보름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200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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