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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부여군

부여...명혜공주 태비. 임천 대교비. 벅수

by 임병기(선과) 2020.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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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여러 번 방문한 분도 태실비를 주목하지 못했을 겁니다.

 

명혜 공주 明惠公主

현종의 둘째 딸로 태어나 혼약을 하였으나 가례를 올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공주입니다.

숙종의 누이동생이며, 경종, 영조의 고모입니다.

언니 명선 공주 明善公主도 가례를 올리지 못하고 요절하였으며, 현재까지  봉국사에서 두 공주의 추모제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세째 명안공주明安公主도 가례는 올렸으나 후사없이 요절한 비운을 맞습니다. 즉, 숙종에게는 3명의 누이가 있었으나 생질, 생질녀가 없습니다.

 

태실

명혜.명안공주의 태실은 부여 충화면 가화리 용골 구태봉에 있었다고 합니다.

 

여지도서

林川 陵寢. 胎峰 明惠公主 明安公主 胎室 在 大王 胎室 東二里許 東峰一岡

 

현종실록에도 두 공주의 태실이 같은 곳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顯宗改修實錄 11년 3월 19

안태사 閔點이 아뢰기를, " 두 공주의 태를 봉안할 때에 백성의 전답 약간이 금표안에 들어가 올해부터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官屯田으로 보상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명문

(전)명혜공주 아지씨 태실(明惠公主阿只氏胎室)

(후)강희 9년 3월 133일 립(康熙九年三月十三日立)

 

대좌

 

전면

명혜공주아지씨태실(明惠公主阿只氏胎室)

 

비갓

 

후면

강희 9년 3월 133일 립(康熙九年三月十三日立)

1,670년

비갓

 

명혜공주의 혼약 후 가례전 사망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많은 일화가 실려있으나 논외로 합니다.

 

임천 대교비

1,510~1,512년

부여 임천 대교비는 임천면 만사리 논에 묻혀 있던 것을 만사리 마을로 이전한 것으로 마을에서는 오랫동안 어떤 이유에서인지 개(犬)의 충절(忠節)을 기린 비로 인식해왔다. 비는 마을 진입로 확포장 공사 과정에서 제보되어 조사 결과 조선시대 임천에서 서천군 한산으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상의 한천을 넘는 다리와 관련된 비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화강암재의 석재를 이용하여 비무을 새긴 면만 고르게 치석하였는데 현재는 윗부분의 좌우가 떨어져나간 형태이다. 하단에는 원위치에서 옮겨와 다시 세우면서 “주인을 구한 충절의 표상 개(견(犬)비(비(碑))”라는 문구를 새겨 놓은 받침돌이 남아있다.비문은 상하로 내용이 구분되는데 윗부분은 다리의 건립 경위와 과정, 그리고 건립 연대등을 8행으로 기록하였고 아래 부분은 다리 건립에 참여한 인물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체계화된 관리와 보존을 위해 2010년 현 위치인 정림사지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 왔다.(정림사지 박물관)

 

2,010년 임천대교비 발견 기사

http://v.media.daum.net/v/20100809154226513?f=o

 

벅수

동장군, 서장군입니다.

즉, 오늘처럼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으로 새기지 않았습니다.

남녀 구분이 없어도 동東은 양陽이며 서는 음陰이기 때문입니다.

 

동장군 東將軍

동쪽 방위를 수호하는 벅수입니다.

수염을 표현하였습니다.

 

 

 

서장군 西將軍

동장군보다 온화한 모습입니다.

 

 

 

사찰 , 마을, 성, 교량 앞을 수호하는 파수꾼이었으나 원위치가 전하지 않습니다.

 

명안공주 태실비는 어디에 있을까요?

벅수가 수호하였던 곳은 어디 있는지.

 

정림사지 답사

놓치지 말고 벅수와 태실비, 임천대교비를 둘러보길 권합니다.

 

202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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