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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주시

영주...소헌왕후 태실

by 임병기(선과) 2020.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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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왕후 태실지

풍기 소백산에 자리합니다.

 

초암사

태실 들머리입니다.

국망봉 등산로를 따라 약 2km 등산하면 됩니다.

 

넉넉잡아 왕복 3시간이면 주변 석물 탐사 등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식자우환이라고 그랬던가요?

태실 근처에서 폐사지를 발견하고 태실 원당 사찰로 지레짐작하여 엉뚱한 봉우리를 2~3 너 개 오르내려 무려 6시간 소요되었습니다.

준비한 도시락도 먹지 못 할 만큼 기진맥진, 거의 탈진 직전이었습니다.

또한, 넘어지면서  바위, 나무에 긁혀 안경알을 교체하였고 팔다리에 숱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초암사

http://blog.daum.net/12977705/8724815?category=5266

 

소헌왕후

세종대왕의 비로 10명의 대군과 공주를 출산한 조선의 다산 왕후입니다.

 

소헌왕후(1,395~1,446)

"본관 청송(). 아버지는 청천부원군() 심온(), 어머니는 순흥 안씨 소의공() 안천보()의 딸이다. 1408년(태종 8)에 가례를 올리고 경숙옹주()에 봉해졌다. 충녕(세종)과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다. 첫 아들이 문종, 둘째 아들 수양,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 그리고 정소, 정의 공주를 두었다. 1417년에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4월 충녕이 왕세자에 오르자 경빈()에 진봉()되었으며, 8월에 세종이 즉위한 후 바로 공비로 호칭되고, 11월 정식으로 공비()로 승봉되었다가 1432년(세종 14)에 왕비로 개봉되었다.

박은의 무고로 강상인의 옥사가 발생하였을 때 아버지 심온이 주모자로 몰렸다. 이때 명나라 사은사로 갔던 심온은 귀국하자 마자 의주()에서 체포, 압송되어 수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어머니 안씨는 관노비가 되었다가 후에 복작되었다.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한 때 왕후의 지위가 위태로웠으나 비()로서의 내조의 공이 크고, 많은 자녀를 낳아 왕실의 안정에 공이 있다고 하여 무사하였다. 문종·세조 등 8남 2녀의 소생이 있었으나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요절하였다.

1446년 52세로 죽자 헌릉에 장사지냈고, 뒤에 세종의 능인 영릉으로 이장하였다. 1452년(문종 2)에 존호를 추가해서 올렸는데, 훌륭한 자손을 낳아 큰  제왕의 자리에 오르도록 했다 하여 '선인제성소헌왕후()에 추상()되었다. 세종의 비로서 인자하고 어질어 성스럽고 착한 것이 만인의 표상이 되었다고 한다. "(두산 백과사전)

 

소헌왕후 태실지

여타 태실처럼 일제강점기에 서삼릉으로 옮겼으며 지금은 민묘가 들어서 있습니다.

 

소헌왕후 태실에 관한 조선왕조 실록 기록

 

세종실록 80권, 세종 20년 1월 20일 을사 3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正統) 3년  

중궁 태(胎)를 처음에는 양주 동면 여염 사이에다 갈무리하였는데, 다시 길한 곳을 가려서 옮겨 갈무리하도록 명하였다.            

 

세종실록 81권, 세종 20년 5월 15일 무술 2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正統) 3년   

중궁(中宮)의 태(胎)를 경상도 순흥부(順興府) 중륜사(中輪寺) 골짜기에 묻었다.             

 

세조실록 30권, 세조 9년 3월 4일 계사 1번째기사 1463년 명 천순(天順) 7년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옛 순흥(順興)의 소헌 왕후 태실(昭憲王后胎室)과 옛 은풍(殷豐)의 문종대왕 태실(文宗大王胎室)은 석난간(石欄干)과 전석(磚石)이 조금 물러났으니, 청컨대 풍수 학관(風水學官)을 보내어 봉심(奉審)하고 수즙(修葺)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어찌 반드시 따로 보내야 하겠느냐? 마땅히 도순찰사(都巡察使) 이극배(李克培)로 하여금 봉심(奉審)하여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요약하면 경기도 양주에서 소백산으로 이태하여 가봉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컨디션이 엉망이어서

민묘  옆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주변 장태 석물은 가까운 부근만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민묘 상석

태실 상석 느낌이었습니다.

 

기묘년 구월 (己卯年 九月)

일제강점기 태실을 서삼릉으로 이태 후 1,939년 묘를 조성하였음을 보여줍니다.

 

망주석

받침이 태실 가봉 난간의 동자주로 추정됩니다.

 

동자주

 

동자주

 

우전석

 

 

 

 

횡죽석

 

 

 

 

 

우리나라에 왕후 태실은 소백산  소헌왕후, 예천 용문사 제헌왕후(폐비 윤씨). 홍천 수타사 정희왕후 태실이 전합니다.

하지만, 제헌왕후 태실만 가봉비가 남아있습니다.

 

용문사 제헌왕후 태실비

http://cafe.daum.net/moonhawje/DjZP/4174?q=%EC%A0%9C%ED%97%8C%EC%99%95%ED%9B%84%20%ED%83%9C%EC%8B%A4%EB%B9%84

 

상처뿐인 영광

위치를 몰라 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소현왕후 태실, 정보를 공유해준 김희태 님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답사하실 분에게는 정확한 장소 알려드리겠습니다)

 

20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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