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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주시

영주...금계리 장생이 마을 벅수

by 임병기(선과) 2020.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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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읍 금계리

금계리 명칭은 금계촌 마을에서 유래했으며, 금계촌은 금계 바위가 위치한 마을로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지세에서 따온 지명입니다.

 

장생이 마을

이른바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지’十勝之地 으뜸인 금계동의 초입으로  장생이, 장선이, 장선동이라 알려진 마을입니다.

 

디지털영주문화대전에는 "장승(長生)이 있던 마을이라고 해서 장생이, 지형이 긴 배 모양 같다하여 장선(長船)이, 착한 사람이 많이 나서 번성하라는 뜻에서 장선동(長善洞) 등으로 불렀다 한다. 마을 가운데 있는 금선교를 기준으로 위는 웃장시이 아래는 아랫장시이로 구분하기도 한다. 장생이는 십승지의 관문으로 이 마을을 통과해야 욱금동, 삼가리로 갈 수 있었다"라고 유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십승지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50310025001

 

 

금계2리 장승과 물레방아(현장 안내문에서 발췌)

"영주 지역에 장승이 있었던 곳은 대동여지도나 여지도서에서 보면 16곳이 전해온다. 금계2리 장승은 여지도서에 기록이 나와있다. 이 장승은 금계동과 순흥면 태장리를 잇는 관로에서 노표(路標)의 역할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지도서에 등재된 장승은 어디로 갔을까요?

 

네이버 블로그(장승, 벅수, 솟대) 황준구 님의 글에서 발췌했습니다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장생이마을,- ‘정감록’鄭鑑錄에는 ‘십승지지’十勝之地 마을 중에서도 제일 '으뜸' 마을로 기록이 되어 있다. '조선시대' 때의 '여지도서'와 '영주지형도'에는,- '豊基郡 西部面 長善洞'이 '큰길'을 안내하는 기능의 '장승'長栍을 세웠든 '장승배기'로 '기록'이 되어 있다. 1895년, '역참驛站제도'가 폐지되어 '장승'은 소멸하였고,- '장선동’의 ‘장생이마을'은, 과거 '장승배기'였기에 '음'音이 변화되어 '장생이마을'이라고 불려지는 곳이다.

 

옛 '장승배기'로 추정이 되는 곳에 '장승'이 아닌,- '수호신'역할의 '벅수'法首를 세워놓고, '장승'이라고 부른다. '옹고집'이다

 

 

장승배기에서 조금 떨어진 당집에는 1980년대에 모신 석조 서낭신이 계십니다.

 

"언제부터 동제를 지냈는지는 불분명하나 동성황신은 400년 전 마을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품고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져 그 시기를 추정해볼 수 있다. 한편 신당은 금계2리가 금양촌이라 불릴 무렵부터 있었으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미신타파 정책에 의해 허물어졌다. 그 이후 마을에 흉사가 자꾸 일어나 1980년 일부 주민들의 주장에 의해 새로운 땅을 사 다시 당집을 세우고 동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신당이 들어선 이후에는 마을이 평안해졌고, 신당이 세워진 것을 반대하거나 신당을 부수려고 한 사람들은 화를 당했다고 한다. 과거에는 동제를 지낸 이후 동네에서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하고 놀았으나 현재는 행하지 않는다."(디지털영주문화대전)

 

 

장승이 떠나고 벅수가 들어선 장승배기에 속절없이 물레방아는 잘도 돌아 갑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년(영조 33) ~ 1765년 전국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엮은 전국 지리지입니다.

 

금계리 마을 수호인이 벅수로 그대로 두고 여지도서에 등재된 노표(路標)를 근거로 장승 없는 장생이 마을에 장승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동제(洞祭)도 재현된다면 금상첨화겠지요.

 

20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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