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예천군

예천...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

임병기(선과) 2020. 5. 26. 06:36
728x90

 

명봉사

2013년 이후 첫걸음입니다.

 

오늘은

복원된 문종 태실과 사도세자 태실, 자적선사 탑비를 찾아왔습니다

 

자적선사 능운탑비 境淸禪院慈寂禪師陵雲塔碑

태실 초입 보호각에 위치

 

비문은 훼손되어 육안으로 확인이 어려우며, 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불문가지겠지요.

 

[ , 882( 8)~939( 22)] 탑비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 () , () 2 941( 24) . 30 1 59 . () . () . () .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문

고려국(高麗國) 상주(尙州) 명봉산(鳴鳳山) 경청선원(境淸禪院) 자적선사(慈寂禪師) 능운탑명(凌雲塔碑銘)과 아울러 서문.
대상(大相) 검교상서(檢校尙書) ▨▨▨▨▨▨▨▨ 상주국(上柱國) ▨ ▨▨▨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하승(門下僧) 승(僧) ▨유(▨裕)는 교지(敎旨)에 의하여 고서중(古書中)에 집자[(集字 구양순체(歐陽詢體)]하고, 문하승(門下僧) 연훈(然訓), 법오(法悟), 심장(心藏) 등이 글자를 새기다.


허공은 형상(形相)이 없고, 불성(佛性)은 생멸(生滅)이 없다. (결락) 心 (결락) 이러한 진여(眞如)를 생각하여 모든 실성(實性)을 터득할 수 있으니, 마치 색(色)이 곧 색(色)이 아니고, 공(空) 또한 공(空)이 아닌 것과 같다고 하겠다. 중생(衆生)의 망녕된 생각이 마치 아지랑이를 보고 물인 줄 오인하는 것이고 명(名)이란 오직 거짓된 이름일 뿐이니, 흡사 신기루(蜃氣樓)와 같다. 심식(心識)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현상은 모두 말장난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결락) 聖 (결락) 先覺 (결락) 之者. 구하는 자는 구할 것이 없음을 구하며, 배우는 사람은 배울 것이 없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유(有)인 물질과 무(無)인 공(空) 속에 진실이 함재(含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령스러운 지혜로 마음을 간직하고 그윽이 마니(摩尼)의 보배를 잘 지켜서 영성반야(靈性般若)에서 (결락) 묘용(妙用)의 심기(心機)는 (결락) 法 (결락) 한 이는 우리 선사 뿐이라 하겠다.

 

선사의 법휘(法諱)는 홍준(洪俊)이요, 속성은 김씨니, 그의 선조(先祖)는 진한(辰韓)의 무족(茂族)이며 토군(兎郡)의 명가(名家)였다. 혹은 자궐(紫闕) 에서 널리 선행을 하며, 혹은 황문(黃門)에서 보국(補國)하였다고 한다. 본래는 (결락) 요원(瑤源)으로부터 내려오는 별파(別派)이며, 옥수(玉樹)의 분기(分枝)였다. (결락) 名配在 (결락) 그 후 오래 동안 번복(藩服)의 귀호(貴豪)이었는데, 지금은 경주 사람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육정(陸正)이고, 아버지는 지유(志儒)이니, 혹은 오천중(五千中)에서 도를 배우고 혹은 삼백(三百)의 시편(詩篇)을 연구하되, 항상 뜻을 물으면서 토론하였으니 문학을 좋아하며 소중히 여겼다. (결락) 抄 (결락) 戒. 어느 날 어머니는 비몽사몽간에 그윽한 영감을 받는 태몽을 꾸었고, 그로부터 지혜롭고 복덕 있는 아들을 낳기 위하여 오신채(五辛菜)와 고기 등은 모두 끊고, 날이 갈수록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였다. 중화(中和) 2년 3월 16일에 탄생하였다.

 

선사는 날 때부터 특이한 자태를 지녔으며, 어려서도 어린아이답지 않았으니 유학(幼學)의 나이에 이르러 책 상자를 짊어지고 학당(學堂)으로 찾아가기도 하였다. 선사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온순하고 공손하여 가풍을 잘 이었고, 항상 자신의 내면을 잘 극기하여 조덕(祖德)을 닦았다. 뿐만 아니라 재주가 뛰어나 글을 읽음에 다섯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갔으니, 천재라는 소문이 이려(里閭)에 떨쳤다. 일찍부터 불경을 열람하였고, 유교 또한 정통하였다. (결락) 하늘을 날고, 바다의 넓음을 뛰어 넘을 큰 포부를 가졌으니, 숲 속으로 기어 다니는 개미가 어찌 이 웅지(雄志)를 짐작할 수 있겠는가. 爭 (결락) 於 (결락) 章之 (결락) 其大小 (결락) 이러한 뜻을 가졌기에 (결락) 출가하여 입산하려는 생각뿐이었다. 부모는 아들의 출가하려는 뜻을 듣고는 애정을 억누르며 허락하였다. 출가의 길을 떠나 동쪽으로 가는 도중 태령(太嶺)을 지나 흑암선원(黑岩禪院)에 도달하여 진경대사(眞鏡大師)를 친견하니 스님은 마치 빙자(氷姿)처럼 아름답고, 옥체(玉體)처럼 맑았다.

 

 예배를 드리고, 마음에 뜻한 바를 아뢰었다. “스님은 사계(沙界)제항(梯航)이며 법문(法門)의 영수(領袖)이시니 저를 받아 들여 득도하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도수(道樹)의 밑에 서게 되었고, 마침내 선림(禪林)의 보배를 얻게 되었다. 어느 날 진경대사(眞鏡大師)가 스님에게 이르기를 “천축(天竺)에서 심법(心法)을 전수한 조사(祖師)가 많았으니 제27대 반야다라(般若多羅)의 법을 전해 받은 달마대사는 중국으로 와서 (결락) 선종의 초조(初祖)가 되었으며, 그 후 곧 동토 선종의 제6조인 조계(曹溪) 혜능에 이르렀다. 이어 조조(祖祖)가 서로 전수하여 백암(百巖)에 이르게 되었다.

 

그 때 진경대사(眞鏡大師)가 당나라로 유학 가서 백암(百巖)의 법을 받아 귀국하여 경남 창원군 상남면 봉림리에 봉림사를 창건하고 선풍을 크게 진작하였는데, 지금은 비록 그 법통이 단절되었지만, 그 도(道)는 더욱 훌륭하였다. 이제 내가 지금 너희들과 함께 혜목(慧目)의 종지(宗旨)를 천양하여 봉림가풍(鳳林家風)을 영원히 무성(茂盛)하게 하며 장래의 후생(後生)들에게 보여 주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건부(乾符) 6년 명주(溟州) 입양율사(入良律師)에게서 비구계(比丘戒)를 받고, 그 후 각 사찰을 참배하면서 두루 명산(名山)과 승지(勝地)를 탐사하고 마가연(摩訶衍)을 탐구하려고 많은 선지식을 친견하였다.


그 후 (결락) 경명대왕(景明大王)봉림대사(鳳林大師)는 법덕(法德)과 교덕(敎德)이 높을 뿐만 아니라 현기(玄機)가 넓고 깊다하여 특별히 단조(丹詔)를 보내서 경화(京華)로 초빙하였다. 선사는 서울로 가는 길에 여러 사찰을 거쳐 동천사(東泉寺)에서 잠깐 주석하다가 북궐(北闕)로 나아갔다. 此 (결락) 山築 (결락) 왕(王)은 국사(國師)를 맞이하는 예로써 정성껏 낭렬(曩列)을 행하였으니, 어찌 신하를 대하는 태도를 가졌겠는가.

 

그 후 예천(醴泉)에 이르러 한 단월(檀越)을 만나니 그는 정광(正匡) ▨▨이란 사람이다. (결락) 東瞻 (결락) 반드시 신인(神人)이 있어 나의 도성(都城)에 들어 올 것이므로 먼저 아름다운 상서를 나타냈다하고 교외(郊外)에서 영접할 때 선사(禪師)에게 경례하며 현관(玄關)에 머물게 하고, 자신의 공을 치하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선사가 수년간 영헌(靈軒)에 주석(住錫)할 때에는 마치 용이 앉아 비늘을 감추는 듯 하며. 산중으로 돌아와 연오(蓮塢)에서 연좌(宴坐)함에는 흡사 학이 울 때 날개를 아래로 드리우는 것과 같았다.

 
바야흐로 하늘에까지 들렸으니, 어찌 상께서 선사(禪師)가 선교(宣敎)의 7세손이요, 법응(法膺)의 제자임을 듣지 아니 하였겠는가. 높이 선유방편(善誘方便)을 열고 널리 미묘법문(微妙法門)을 설하니 불교를 배우려는 무리가 시시로 운집하여 큰 회상(會上)을 이루었다. 이 때 왕이 보소(寶所)로 특사를 보내어 선중(禪衆)을 반산(頒散)하고 봉성(鳳城)으로 옮겨오시라고 초빙하였다. 선사는 앞을 내다보는 고견(高見)으로 피차(彼此)를 생각하고, 조사(祖師)의 덕을 지키면서 앙례(仰禮)의 청에 감사하며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 등(燈)을 보면서 탑(塔)을 참배하고 마음으로 그윽이 부촉(付囑)을 생각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경화(京華)에 도착하였다. (결락) 임금이 스님의 봉의(鳳儀)를 바라보고는 귀의(歸依)할 원심(願心)이 더욱 간절하였으며, 스님의 용보(龍步)를 보고는 기꺼이 위로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다음 날 옥당(玉堂)으로 맞아 들여 법회를 열고 법상(法床)에 올라앉으시니, 임금이 스님의 선덕(禪德)을 흠앙(欽仰)하여 다른 위인(偉人)들보다 10배나 더 영특함을 깨닫고 도풍(道風)을 이어 받들었으며, 친히 삼귀의(三歸依)의 예를 폈으니 왕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이제야 마음이 열리게 된 것을 한탄하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절감하였다. 그 후 (결락) 궁사(宮使)를 보내어 스님을 초빙하여 귀산선원(龜山禪院)에 주지(住持)하도록 청하였다.

 

이 때 그 곳으로 가서 악개(盖)를 멈추고 회상(會上)에 개설(開設)하니 학인(學人)이 사방으로부터 모여들어 즐비하기가 도마(稻麻)와 같고, 찾아오는 사람이 신선처럼 달려 와서 열을 지어 오고 가니 도리성혜(桃李成蹊)와 같았다. 그리하여 미혹한 것으로부터 반성하게 하며, 빈손으로 가서는 가득히 얻어서 돌아가게 하였다. 칭송하는 소리는 십방(十方)을 떨쳤으며, 고명한 그 이름은 천년에 빛났다. 이는 당(唐)의 문▨(章▨)으로 더불어 (결락) 가히 동년으로 비교하여 말할 수 없다. 이 곳에서 연좌(宴坐)하는 동안 5년이 지났다. 이후 유종(遊宗)할 때가 임박하였으니, 徃依 (결락) 천복(天福) 4년 10월 1일 귀산선원(龜山禪院) 법당에서 입적(入寂)하였다. 돌아가신 모습을 살아 있는 것 같았고, 과일 같은 입술은 마치 말을 하고 있는 듯 하였다. 육신을 던져 버리는 이치가 어찌 그리 한결 같으랴. 어떤 스님은 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열반하였다. 혹은 수도 중 그래도 입정(入定)한 듯 입적(入寂)하기도 하고, 혹은 매미가 허물을 벗 듯 좌탈입망(坐脫立亡)하기도 하며, 혹은 섶을 쌓아 놓고 스스로 화장(火葬)을 하는 선사도 있었다. 선사의 세속 나이는 58세요, 승랍은 48이었다. 그 달 6일에 문인(門人) 등이 영구를 메고 명봉사(鳴鳳寺)의 북쪽 산기슭에 임시로 가장하였다. 장사하는 날 조객인 사서(士庶)는 개천을 가득히 메웠고, 열반의 향내는 산곡(山谷)을 넘쳐흘렀다. 하천(河泉)은 슬피 울었고, 구름과 해는 수심에 잠겼으며, 임금도 항상 스님의 현종(玄宗)을 앙모하다가 갑작스런 열반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애통해 마지아니하였으며, 시호를 자적선사(慈寂禪師), 탑명을 능운지탑(凌雲之塔)이라고 추증하였다.

 

선사의 공(功)은 억겁(億劫)을 이루고 그 운(運)은 천년을 흘러가서 순정(淳精)에 응하여 옥을 꿰어 놓은 것과 같으니 함령(含靈)을 깨우쳐서 승경(勝境)에 출생(出生)하게 하며, 유진(有塵)의 과일은 그 법을 베풀지 아니함이 없고, 망념(妄念)의 꽃은 같은 중생에게 그 색을 나타내지 않음이 없게 하였다. 동(動)하는 곳에 있으나 항상 고요하며, 또한 고요한 곳에 있으나 항상 움직여 (그 묘용(妙用)은) 가만히 쉬지 않았다. 그 법문을 듣는 자는 바람에 먼지를 말끔히 날려 버리는 것과 같았고,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마치 혁혁한 일광(日光)이 캄캄한 어두움을 쫓아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선림(禪林)의 기재(杞梓)이며, 법역(法域)의 동량(棟梁)이요, 奈 (결락) 등(等)은 화성(華誠)과 자종(慈宗)의 장참(墻塹)이 되었고, 군생(群生)들의 자부(慈父)이어서 병을 치료하는 의왕(醫王)과 같다 하겠다. (결락) 법을 전해 받은 제자(弟子)인 작린(綽麟), 승담(承湛) 등 1백여 인은 모두 마음이 찢어지는 듯 생전에 스님과 대하여 말씀드리던 일을 생각하였으며, 선덕(禪德)을 추모하여 법은(法恩)을 갚고자 하였다. 其親 (결락) 좌승흠노(佐丞歆魯) 관거재보(官居宰輔) 직관궁위(職綰宮闈) (결락) 왕씨(王氏)의 연지(連枝)이며, 봉축(奉竺) (결락) 의 별파(別派)인 재가(在家) 제자 상부(尙父) 김공선소(金公善紹)와 대상홍공(大相洪公)이 있었으니 인자(仁慈) (결락) 함이 옥과 같이 맑고, 정렬(貞烈)은 쇠를 끊을 정도로 강직하였다. 이러한 재가 제자들이 함께 스님의 선화(禪化)에 힘입어 각각 불후(不朽)의 인연을 가졌고, 모두 도풍(道風)의 감화를 받아 한량없는 공덕을 닦았으니 법역(法域)주석(柱石)이며, 겸하여 국가의 금탕(金湯)과 같이 튼튼한 국가의 아성(牙城)들이라 할 수 있었다. 하신(下臣) 언위(彦撝)는 학해의 미파(微派)이며 사림의 말품(末品)이면서 외람되게 봉조(鳳詔)를 받들어 비문을 짓게 되었다.

 

명(銘)하여 가로되,

 

축건(竺乾)에서 발상(發祥)한 우리의 불교가
제1조(第1祖)인 가섭의 법통을 이어 받았네!
멀고도 먼 서역땅인 고향을 떠나
구법승(求法僧)의 원(願)으로 동토(東土)에 전했네.
빛나는 정법안장(正法眼藏) 법통을 이어받고
서건(西乾)의 불심(佛心)과 동토(東土)의 제자들이
이심전심(以心傳心) 그 마음 가을못 달빛처럼
청명한 여름날 구름 거친 산정(山頂)에
우뚝 선 큰 나무 하늘을 찌르는 듯
봉림(鳳林)의 법통(法統)을 현관(玄關)에 걸어놓고
한수(漢水)의 남상(濫觴)처럼 흐르고 또 흘러
도도(滔滔)하게 흐르는 정정(淸淨)한 그 법수(法水)
애저(藹藷)하고 무성한 선림(禪林)의 정간(貞幹)
자재(自在)히 흐르는 깊고 넓은 선하(禪河)여!
굳건한 의지(意志)로 심원(心猿)을 조복받고
자비는 깊고 넓어 미물(微物)도 구제했네!
선사(先師)의 간곡한 부촉을 이어 받아
위법망구(爲法忘軀) 대원(大願)으로 정진하였네!
수행(修行)은 높고 깊어 헤아릴 수 없어
현성(賢聖)을 초월한 독보적인 큰스님!

자비하신 그 원력(願力)은 바다와 같고
천진(天眞)을 잃지 않고 잘 보호하였네!
이 세상 어느 것을 견고하다 말하리!
공자(孔子)도 인생(人生)을 서천(逝川) 같다 했거늘!

천희(天福) 6년

 

(음기)생략

 

귀부 정면

 

귀부 측면

육각 귀갑문, 비좌의 복련

 

비신

 

이수 정면

 

이수 후면

 

그런데.

능운탑비는 명봉사에 남아 있지 않을까요?

 

명봉사 부도

약사전 앞 위치

뒤집힌 상대석과 팔각 탑신석, 옥개석이 남아 있습니다.

 

고려 팔각원당 부도는 분명하지만,자적선사탑비(941년) 조성시기를 고려하면 고려 초기 부도보다 략화된 양식처럼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자적선사탑으로 믿고 싶습니다.

 

명봉사 약사전 대좌(시나브로님 사진. 2013년)

연화대좌는 부도재 아닐까요?

하부 방형 부재는 태실 둘래석의 동자주로 추정됩니다.

 

 

뒤집힌 상대좌, 또는 하대좌입니다.

현재는 탑신석과 비례가 맞지 않습니다.

 

팔각 탑신석

1면에는 문비와 자물쇠를 4면에는 상을 새겼습니다.

생령좌가 아니어서 사찬왕상보다는 제석과 범천 여래(보살) 2분을 모신 듯합니다.

 

 

 

 

 

문비. 자물쇠

 

옥개석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우동마루 끝에는 귀꽃을 조식한 것 같습니다.

상륜부는 결실된 상태입니다.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자적선사탑 아닐까요?

 

2020.05.04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