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예천군

예천...명봉사 사도세자 태실

임병기(선과) 2020. 5. 27.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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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태실

문종 태실 뒤편에 위치.

문종 태실과 함께 2016년 복원되었습니다.

 

난간

둘레석의 연엽주석, 동자석, 횡죽석, 우전석, 중동석, 가첨석 등 대부분 복원되었습니다.

 

가첨석과 보주

 

명봉사(2013년)

http://cafe.daum.net/moonhawje/DjZP/2378?q=%EC%98%88%EC%B2%9C...%EB%AA%85%EB%B4%89%EC%82%AC%20%EB%B6%80%EB%8F%84%2C%20%EC%82%AC%EC%A0%81%EB%B9%84.%20%EB%AC%B8%EC%A2%85%ED%83%9C%EC%8B%A4%EB%B9%84

 

위 2013년 답사기에는 사도세자 가봉태비가 명봉사 사적비로 용도 변경되어있었습니다.

 

문종태비. 명봉사 사적비(2013년)

 

명봉사 사적비(2013년)

 

일제강점기에 서삼릉으로 태기 등이 옮겨간 후 가봉태비는 방치된 상태이었으며, 1940(불기 2,967년)년 명봉사 사적기를 새겨 명봉사 경내로 옮겼습니다. 정조대왕의 눈물겨운 효심도 총칼을 앞세운 제국주의 관리들의 횡포를 비켜가지 못했습니다.

 

가봉태비

경모궁 태실 景慕宮 胎室, 경모궁은 사도 세자와  비 헌경 왕후의 신위를 모신 사당 입니다.

가봉태비를 조성한 것은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실록과 감역각석문에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복원하면서 귀부는 옮겨왔지만 바신은 복원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19권, 정조 9년 3월 18일 정묘 1번째기사

1785년 청 건륭(乾隆) 50년

경모궁 태실을 봉하는 공사가 끝나자 서표관 이하 관리들을 포상하다

경모궁(景慕宮)의 태실(胎室)을 더 봉하는 공사가 끝났다고 고하자, 서표관(書標官) 이하의 관리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서표관인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홍양호(洪良浩)를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올려 주고 감역관(監役官)인 풍기 군수(豊基郡守) 李大永"이대영(李大永)을 통정 대부로 올려 주었다.

 

승정원일기

1579책 (탈초본 84책) 정조 9년 3월 18일 정묘 7/17 기사

1785년 乾隆(淸/高宗) 50년

備忘記, 景慕宮胎室加封工役順成, 以予小子追慕之誠, 凡係賞典, 豈循前例? 觀象監提調洪良浩, 今番則旣兼書標官及繕工提調之任, 效勞甚多。監役官兼都差使員豐基郡守李大永, 以地方官, 兼管兩役, 卽初有之擧, 參下監役, 例皆陞品, 況四品職乎? 倂加資。監役官·傳香官·奏時官副司果安思彦, 各役兼管, 係是無例, 且考前例, 皆有相當職除授之命, 今番豈可承傳而已? 善地察訪·監牧官中, 今日政擬入。浮石都差使員榮川郡守鄭來鼎陞敍, 員役工匠等, 比常例倍數施賞事, 分付戶曹。鄕看役將校, 令道伯拔例陞差後狀聞。吏隷工匠等, 亦令比常例倍數施賞事, 下諭

 

경모궁 태실 감역 각석문 景慕宮 胎室 監役 刻石文

경모궁 가봉 태실에 관여한 인물을 새김

 

명봉사 일주문 부근 위치

 

경모궁 태실 景慕宮 胎室

 

사도제자(한국사 인물열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XXXXh002

 

배면

 

귀부

 

귀부

 

이수

 

 

명봉사 사적비(경내)

비신은 사도세자 가봉태비입니다.

 

소화십오년 경진 오월 (昭和 十五年 庚辰 五月)

불기 이천구백육십칠년 (佛紀 二千九百六十七年)

 

1,940년

권상로(權相老)가 글을 짓고, 고영찬(高永贊)이 글씨를 썼습니다.

 

2016년 문종, 사도세자 태실 복원 후 남은 부재를 명봉사 경내 사적비 옆에 보관.

 

영조, 정조

조선 역사에서 손꼽히는 치적을 남긴 왕입니다.

그리고

영, 정조에 버금갈 정도로 회자되는 사도세자의 태실을 찾아 교과서 밖 여행을 권합니다.

 

20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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