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영월군

영월...부사 윤사은 철비

임병기(선과) 2020. 4. 2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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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 북면 마차리 산 147-6번지

몇 년 전 우리 카페 고 심충성 군이 다녀갔을 때는 철비 앞쪽은 좁은 도로이었는데, 지금은 2차선 포장도로가 개설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 주차 후 정류장을 등지고  10여미터 전방 도로변 절개지에 볼트로 고정시킨 철비가 있습니다.

 

마차리, 골마차 지명이 흥미로워 검색하여 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마차리(磨磋里)

마차는 한자로 갈 마(磨)자에 갈 차(磋)자를 쓴다. 그러나 1829-31년에 편찬한 ?관동지?에는 갈 마(磨)자에 어긋날 차(差)자를 쓰고 있으며, 1911년에 편찬한 ?조선지지자료?에는 갈 마(磨)자에 깨끗할 차(瑳)자와 우뚝 솟을 차(嵯)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벌마차의 경우는 평마차(坪磨差), 역시 골마차의 경우도 곡마차(谷磨差)라 하여 차자를 어긋날 차(差)자로 쓰고 있다.

 

그런데 1940년에 편찬한 ?강원도지?에는 지금과 같이 갈 마(磨)자에 갈 차(磋)자를 쓰고 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쓰는 마차의 한자 지명은

 

?강원도지?가 만들어질 당시에 굳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조선지지자료?에 따르면 당시 마차리의 소지명은 다음과 같다. 밤치(栗峙洞), 학전(鶴田), 미자골(美子谷), 느다리(板橋), 골마차(谷磨差), 졀골(寺洞), 율봉(栗峰), 숄치(松峙洞), 어라리(於羅里), 벌마차(坪磨差), 장구목(缶項), 가마골(釜谷), 빈미재(賓美峙), 분덕재(分德峙), 접산(接山), 빈미산(賓美山), 참물기(寒泉源)가 있다

 

?영월군의 지명유래?에는 마차리 소개를 이렇게 했다. 마차리는 북면의 면소재지로 동으로 거운리, 문산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연덕리와 문곡리가 있으며 남으로는 삼옥리, 영흥리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공기리와 평창군 미탄면과 맞닿아 있다. 영월광업소 마차탄광이 전성기였을 때는 종업원이 4,000여명에 달했으며 연간 8만톤 이상의 무연탄을 생산하였다. 지금은 행정 9개리에 536가구 1,922명의 주민들이 골마차, 절골, 분덕이, 솔치, 학전이 등의 자연부락에서 콩, 옥수수, 감자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하고 있다

 

지금까지 찾아본 지명지에는 마차라는 지명이 생긴 유래를 정확히 기록한 곳은 없다. 어떤 이는 편의상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한자숙어에서 취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지명생성의 원리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볼 경우는 마차가 아니라 차마가 돼야 옳다. 절차탁마는 후인들의 스토리텔링으로 볼 수 있는 마을유래 설명이다.

 

런데 필자가 2013년 7월 2일에 만난 이 지역의 토박이 신대식(71) 씨에 의하면,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마차는 갈 마자에 갈 차자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옛 선비들이 이 지역의 지형을 보고 명명한 것이다. 마차 뒷산에 높이 올라보면 마차의 형상이 맷돌을 닮았다. 곡식을 가는 맷돌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물이 양쪽에서 흘러 모여 벌마차를 돌아나가는 모습이 맷돌을 돌려 곡식을 가는 모양이다. 그 때문에 옛 선비들이 이곳 지명을 맷돌로는 지을 수가 없으니, 맷돌을 갈듯이 뭐든 갈고 닦는 마음으로 살 것을 바라며 마을 이름을 마차라고 했다. 또한 이곳의 지형이 맷돌 모양이기 때문에 이곳에는 2층집을 지으면 안 된다고 한다. 곡식을 갈고 있는 맷돌 위에 물건을 놓으면 흔들려 쓰러지듯이 2층집을 지으면 주인이 화근을 당하게 된다.

 

이곳에서 탄광이 한창 잘 될 때는 북면의 인구가 6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특히 마차리 인근지역은 경사가 심한 곳에도 집들이 있을 정도였으며, 월급날 벌마차지역은 명동보다 사람들이 더 거리를 활보 했다. 지나는 사람의 어깨가 부딪혀서 걷기가 힘들었으며, 월급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손으로 꼭 붙들고 집까지 갔다. 월급날은 소매치기가 많았고, 야바위꾼도 많았다. 유행을 얼마나 잘 따르는지 사람들은 ‘제2서울’이라고 말하였다

 

골마차(谷磨磋)

문곡에서 마차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지역이다. ?영월군의 지명유래?에는 이렇게 전한다. 개간이(문곡삼거리)와 벌마차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마차의 지형이 유리병 모양이라면 골마차는 병(甁) 입구처럼 좁고 가다란 골짜기에 해당되는 마을이므로 ‘골마차’라 한다. 이곳의 413번 지방도 옆에는 쇠로 만들어진 영월부사 윤사은의 청덕비가 있다.

 

부사 윤사은은 1837년(헌종3년) 8월 8일에 부임하여 1839년 6월까지 영월부사로 재임하면서 백성들에게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골마차 다리아래 집이 한 채 있던 곳에 서낭이 있었다. 그 서낭을 뜯은 사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죽었다.

 

부사 윤 공 사은 애민청덕 선정비 府使 尹 公 師殷 愛民淸德 善政碑

기해 칠월 일 북면 립 己亥 七月 日 北面 立

1839년

 

윤사은 尹師殷 (1,708~)

파평 윤씨. 영흥 거주,  1807년 식년시 병과 합격

영월부사  재직 기간: 1837년 8월 8일~ 1839년 6월

 

 

부사 윤 공 사은 애민청덕 선정비 府使 尹 公 師殷 愛民淸德 善政碑

청淸자 아래와 옆에 새긴 선善 이하는 매몰되었습니다.

시멘트 기단을 놓고 볼트로 고정하면서 흉물스럽게 세운 까닭입니다.

 

기해 칠월 일 북면 립 己亥 七月 日 北面 立

 

 

우리나라의 철비(목록,사진)

http://cafe.daum.net/moonhawje/MebK/321?q=%EC%9A%B0%EB%A6%AC%EB%82%98%EB%9D%BC%EC%9D%98%20%EC%B2%A0%EB%B9%84(%EB%AA%A9%EB%A1%9D%EA%B3%BC%20%EC%82%AC%EC%A7%84)

 

 

철비 앞 도로

화물차 통행이 제법 많아 사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주의를 요하며,

볼트를 풀고, 시멘트 기단을 헐어 내어 다른 곳으로 이건 하여야 합니다.

현재는 거의 방치에 가깝습니다.

 

2020.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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