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영월군

영월...흥녕선원지 부도. 석불대좌

임병기(선과) 2019. 6. 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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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녕선원지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법흥로 1352

 

법흥사 일주문을 통과하여 첫 다리 건너 우측으로 최근에 발굴이 끝나 진입로에서도 부도가 보입니다.

 

 

부도 위쪽 사지

 

 

흥녕선원지(출처/한국의 사지)

 

흥녕선원興寧禪院은 징효대사澄曉大師(826~900)에 의해 개창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자산문師子山門의 중심사찰로 알려져 있지만 창건시기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문헌은 없다. 다만 사자산법흥사중건비명「獅子山法興寺重建碑銘」(1933)과  강원도지(1941)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고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내용으로 단순히 저멸보궁寂滅寶宮과 관련된 구전을 기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944년에 건립된 영월 법흥사징효대사탑비명「寧越 興寧寺 澄曉大師塔碑銘」에 의하면 사자산의 석운대사釋云大師가 징효대사澄曉大師에 요청하자 선중禪衆을 이끌고와서 주석하였다고 하는데, 이로 보아 이미 이때(882년이후) 사찰이 창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헌강왕(재위 857~886)은 흥녕선원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대사를 머물게 하였다. 891년(진성여왕 4) 나라가 혼란해지자 대사는 상주 남쪽 조령鳥嶺으로 피난하였으며, 사자사는 병화兵火에 의해 소실되었다. 이후 흥녕선원에 관한 별도의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징효대사의 보인탑비寶印塔碑가 944년(갑진甲辰)에 세워지므로 사찰은 그 이전에 중건되었음을짐작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지리지 및 고지도에서는 흥년선원을 법흥사‘法興寺’ 또는 흥녕사‘興寧寺’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여지도서『輿地圖書』(1757)와 범우고梵宇攷』(1799), 관동지『關東誌』(1829~1831), 관동읍지『關東邑誌』에는 흥녕사興寧寺와 법흥사法興寺가 모두확인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흥녕사興寧寺는 위치와 탑비 및석분, 석함 등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범우고『梵宇攷』를 제외한 문헌에서는 사찰이 이미 폐사廢寺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법흥사는法興寺는 주州(원주原州)에서 동쪽으로 13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특히 관동읍지에는 그 위치를 사자산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대동지지『大東地志』와 강원도지『江原道誌』, 18~20세기의 고지도인 해동지도《海東地圖》, 광여지《廣輿圖》, 《輿地圖》, 원주목지도〈原州牧地圖〉(1872), 지승《址乘》에는 법흥사‘法興寺’만 기록되어 있다.이와 같은 내용으로 보아 흥녕사와 법흥사는 사자산에 있었던 사찰인데, 개칭된 사명이 모두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거나 법흥사가 폐사된 흥녕사 가까이에 새롭게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흥녕선원은 늦어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891년에 소실되어 폐사되었으나 944년 이전에는 중건됨을 알 수 있다. 또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문헌에 서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한동안은 폐사된 상태였으며, 이후 법흥사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운영 및 유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흥녕선원의 학술조사는 사지 내 석조문화재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69년 자료에는 1955년 8월과1967년 4월, 1968년 12월, 3차례에 걸친 사지 조사내용이 보고되었는데, 인문학적 내용을 포함한 지표조사와 석조문화재의 실측조사를 통한 도면화 작업이 진행되었다.사지의 중심부는 지표상에 석축과 원위치로 보이는 초석,기와편이 확인되나 경작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이곳 북동
쪽과 북서쪽에 산능선 일원도 건물지로 추정하였다.

 

또한 당시 법흥사가 건립되어 있었는데, 1902년 적멸보궁만 남아있던 사지를 대원각大圓覺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흥녕사 중심부의 건물지 위에 기존의 초석을 이용하여 법당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사찰은 1912년에 소실되고, 1931년에 홍수가 나면서 현재의 징효국사탑비 일원으로 이전하였다.당시 마을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법당 앞에 높이 6尺의 석탑이 있었는데, 홍수 때 계곡으로 떠내려갔으며, 한동안 계곡에서 확인되기도 하였으나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이후 1932년에 재건이 완료되었는데, 징효국사탑비 주변에 요사채를, 동북쪽 사면에 적멸보궁을, 그 바로 아래쪽법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77년과 1995년의 자료는 석조문화재를 중심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후 2002년에 이르러 강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정밀지표조
사가 진행되었으며, 이 자료를 근거로 2차례에 걸친 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2004년의 『문화유적분포지도』에는 앞선 내용이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

 

(사진...문화재청)

금동반가사유상

2018년 사지에서 출토

 

 

부도 뒤편 사지에서 바라본 법흥사 진입로 방향 입니다.

 

 

 

부도 죄측 사지

 

 

부도와 석불대좌

사지 중앙에 위치합니다.

 

 

방형대좌 위 원형 괴임 위에 탑신과 보주를 일석으로 조성하였습니다.

탑신에는 당호를 새긴 듯 하나 분명하지 않고

탑신석 상부에는 복련을 조식하였으며, 연주문 위에 연봉을 보주를 올렸습니다.

 

 

 

 

당호?

 

 

 

 

 

 

 

석조대좌

방형 지대석

(맨아래 부재는 뒤집한 석탑 기단갑석으로도 추정 됩니다)

 

하대석

팔각으로 저석,중석.갑석이 일석이며

중석에는 면마다 안상을 새겼습니다.

 

중대석

망실된 듯 하지만, 근거는 부족합니다.

 

상대석

이중으로 앙련을 조식하였고, 화문을 표현하였으며, 하단에 1단의 괴임이 있습니다.

 

고려전기 이전의 작품으로 전합니다.

 

 

 

 

 

 

 

 

 

 

 

 

 

 

석조부재

팔각 석등 간주석으로 추정 됩니다.

 

 

주초

부도 뒤편의 건물지에 상부를 치석한 주초가 남아 있습니다.

 

 

건물지

 

 

주초

 

 

 

흥녕선원지

저 앞을 수차례 다니면서도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는 저에게 보물이 가득한 곳간이나 다름 없습니다.

 

2019.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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