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대왕 태실비 추부면 마전리 본래 위치는 무학대사의 지시로 함경도 용연龍淵에 있었는데,조선건국 후 왕위에 오른 뒤인 1393년(태조 2)에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태실을 안치한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와 봉안사(奉安使)는 권중화(權仲和)였으며, 태실이 봉안된 후 진동현(珍同縣)은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승격되었습니다.
그 연유는 금산군청 홈페이지에서 실려 있습니다. "고려 말, 조선 초. 풍수지리에 능한, 한 시인이 이 산을 지나면서 “산의 모양이 깊고 두터우며 굽이굽이 겹쳐진 봉우리는 연꽃이 만발한 것 같고 계곡의 물이 한곳에 모여 흐른다.”고 극찬한 이후,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함경도 용연지역에 있는 자신의 태를 이 산에 옮겨와 태자의 태와 함께 안치하여 나라의 태평성대를 염원한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문외한의 눈으로 바도 태실이 위치할 자리는 아닙니다. 이마 햔의치 위쪽 봉우리가 본래 위치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에 서삼릉으로 태실이 강제로 이태된 후 훼손되었으며, 흩어져 있던 부재를 수습하여 다시 복원한 것 같습니다.
태종 태실을 검색하면 "일제강점기 대전, 도로를 개설하면서 1차 훼손된 후, 그 땅은 친일파로 알려진 조병갑에게 넘겼으며, 이후 1928년 서삼릉으로 이태되었고, 1993년 복원되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또한, 비석 후면 명문으로 미루어 판단컨데 본래의 태실비는 아닙니다.
귀부
태비 3개로 파손 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전면 태조대왕 태실 太祖大王胎室
후면 강희 28년 3월 29일 중건 康熙 二十八年 三月 二十九日 重建 즉 1689년 다시 세운 비석 입니다.
이수 전면
이수 측면
이수 후면
태실 둘레석에 동자주가 생략
지대석
기단(사방석)
중동석과 개첨석 일체형 입니다.
무슨 연유로 비석이 3등분 되었을까요?
2019.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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