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보령시

보령...웅천 미륵불입상

임병기(선과) 2019. 11. 20.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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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읍 대창리 산67-2

주산면 창암리에서 웅천석물석재농공단지 못 미쳐 국도변 속칭 미륵모퉁이에 계신 불상 입니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민초들은 미륵불로 모시는 듯 합니다.

 

 

미륵불이 계신 장소는

뒤로는 장항선, 앞은 국도 입니다.

 

즉, 철도 이전 부터 이자리에 계시면서 오고가는 길손들의 행운을 빌어 주었던 경배의 대상으로 생각됩니다.

얼핏 장승(홀을 든 무덤 앞의 문석인), 약기를 든 여래상으로 보였으나, 손에 들고 있는 꽃묶음(?) 때문에 존명을 미륵불로 보았습니다.

구태여 존명을 밝히는 것도 나의 과욕이겠지요.

 

 

불두는 훼손이 심하여 형체를 알 수 없으며,

긴 귀는 어깨에 닿았고, 눈과 코는 자식을 원하는 민초들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목에는 삼도가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대의는 통견, 손에는 꽃송이를 들고,연주문 대의 자락이 무릎 아래까지 길게 흘러 내렸습니다.

발목 아래는 매몰되어 확인되지 않습니다.

 

조선후기 민초들이 고갯마루에 모셨던 미륵불로 추정 됩니다.

 

 

상호와 불두

 

 

불신

 

 

보령시 홈페이지에는 미륵모퉁이의 미륵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보령시) 웅천면과 주산면 경계 국도변에 석불이 하나 서있는데 석불이 서있는 이 모롱이를 미륵모퉁이라고 한다.

옛날 아주 옛날에 개경(開京)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벼슬길에 오르는 것 보다 책읽기를 좋아해서 항상 책을 읽고 있었고 비록 가난하였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을 가장 잘 점쳐서 많은 사 람들로부터 공경을 받았었다.
하루는 우연한 기회에 산에 올랐다가 마침 지나가는 요란스러운 행차를 보고 언뜻 생각해서 말하기를

「허허 이제 마지막 행차로군」

하고 푸념 비슷하게 한마디를 했다. 그와 비슷하게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마침 산에 올랐다가 이 광경을 본 또 한선비가 그가 토하는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에게 물었다.

「여보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여 지금 행차는 마침 큰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처음 입궐하는 행차인데 마지막 행차라니요.........」

그러나 그는 오히려 빙그레 웃으면서

「꼬리가 길지 않소 저 대감은 꼬리가 길면 꼬리에게 물려서 물러갈 대감이요」

하는 총총히 사라졌다. 곁에 있던 선비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우선은 행차 구경에 넋을 잃고 있는데 그는 산을 내려와서 집으로 들어 왔다. 그가 집에 들어오자 방안에는 그의 친구인 한 무관(武官)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무관은 그가 들어서자마자

「이 사람아 오래 기다렸네 다름이 아니라 내가 이번 궁중 호위장으로 들어 가게 되었는데 장수할건가 좀 물어 보러 왔네」

하고 혼자서 싱글벙글 거드름을 떨었다.
그때 그가 생각하기엔 그 친구는 금방 오늘 입궐하면 저녁때 죽어서 나올 팔자였다. 그러나 친구는 그 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

「자네는 오라는데 가지 않아야 여생을 누릴텐데.......」

하고 여운을 남기자 그 친구는 벌떡 일어나서

「그래 맞아 오라는 곳은 아니야 그자들이 내 힘을 부려 먹을려는거지 그래됐네」
하고 문을 차고 나갔다. 그는 그 친구가 입궐하기를 만류 하느라고

「이사람이 그게 아니야 이사람아」

하고 뒤따랐지만 그는 호탕한 웃음으로 그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대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 날 친구를 보내고 그는 밤늦도록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어느듯 삼경이 지났을 때 였다. 바깥에서는 요란스럽게 말이 달려가고 군사들의 달리는 발자욱 소기가 들리더니 들려오는 소식에 새로 부임한 대감이 칼에 맞아 죽고 친구인 무관도 방패 삼아 싸우다가 죽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허허......」

웃고 잠을 청했었다.
그가 잠을 자고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해가 중천(中天)에 떠있을 때였다.
그는 그때서야 조반상을 받고 막 수저를 들려는데 행차라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소란스럽게 울리더니 여러 대감들에 둘러싸여서 한 대감이 들어 왔다.
그래서 그도 마루에 나가서 마중하며 바라본 즉 그 대감은 몇일전에 산에서 행차를 구경 하던 때 만났던 사람이었다. 그는 한번에 그 얼굴을 살펴보고 조용히 앉았다.

「나 이번 국사를 맡게 되어 의논할 것이 있어 왔소이다. 어떻소 나와 함께 국사일을 볼 생각은 없소」

하고 대감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발을 꼬고 앉더니

「국사야 남이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하고 싶은 사람이 하는 일인데 글쎄 올시다. 내가 70까지는 편히 살기 위해서 그만 사양하겠소이다」
하고 돌아 앉았다. 그러자 그 대감은 화가 난듯

「어디 벼슬길에 오르지 않나 두고 봅시다」

하곤 돌아가 버렸다. 그 대감이 물러가자 그는 바로 봇짐을 쌌다. 아내를 앞세우고 그는 정처없이 떠났다. 그가 천안 삼거리(天安三巨里)를 지났을 때 개경에서 새로 부임한 대감이 급사하였다는 소문이었다.
그는 다시 길을 재촉하여 충청도 땅에 깊숙히 들어왔다. 충청도 남도땅에 그가 자리잡고 처음은 사람도 사귈겸 정자나무 아래에 나와선 여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만 이곳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게 되면 서부터 가끔 마을사람들의 어려운 문제를 풀이해 주곤 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의 말대로 모든 문제가 척척 잘 풀려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를 아주 신처럼 따를 때 개경에서는 그를 잡아 들이라는 포고문이 내렸다.
그래서 포리들은 이곳까지 뒤졌었다. 그러나 그는 없었다. 그는 성주산에 들어가서 몸을 숨겼다가 그후 늙어서 죽었다. 그가 죽자 그가 살던 집터에 초막은 없어지고 하룻밤 사이에 미륵이 솟아 올랐다.
미륵이 솟아 오르자 이곳 사람들은 이 미륵이야 말로 옛날 우리를 보살펴준 미륵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생시에 살았을 때처럼 따랐다.
미륵에 소원을 빌면 또한 척척 풀려 나갔다. 몸에 신병이 있는 사람이 미륵에 빌면 신병이 바로 나았다. 눈먼 봉사가 미륵 눈알을 후벼다가 약을 해 마시고 눈을 떴다. 그래서 지금 미륵은 눈알 없으며 움푹 파지게 되었다 한다.

웅천 땅에서 최고의 점쟁이로 통하는 (미륵 모퉁이)의 미륵은 그래서 서민들의 우상이 되었다 한다."

 

 

 

미륵불과 더불어

오랜 세월 인연을 지었었던 님들

그리고

새롭게 인연을 짓는 나, 우리...

민속은 우리 삶의 원형질 입니다.

 

201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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