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보령시

보령...충청수영성, 영보정

임병기(선과) 2021. 6. 10.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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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 수영성

사적 제501호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던 수영(水營)의 성

예전에는 영보정(永保亭), 관덕정(觀德亭), 대변루(待變樓), 능허각(凌虛閣), 고소대(姑蘇臺)와 옹성(甕城), 4대문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4대문인 진남문(鎭南門), 만경문(萬頃門), 망화문(望華門), 한사문(漢舍門)은 없어지고, 서쪽 망화문터의 석문(石門)만 남아 있습니다.

 

수영성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되었으며, 그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 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선조 29년(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 7월 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또한,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써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海路) 요해처(要害處)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문화재청)

 

서문인 망화문(望華門) 

 

망화문터의 석문(石門).

 

성벽

복원한 서문 주변

 

성벽

 

영보정과 성벽

 

성벽

 

영보정(永保亭)

충청 수영성의 정자로 1504년 수사 이량이 초창하였으며, 이후 복원을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많은 시인 묵객이 찾아 시문을 남겼으며, 특히 다산 정약요, 백사 이항복은 이곳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하였다고 전합니다.

 

영후정자(營後亭子)...박은((朴誾,1479,성종10∼1504)

 

地如拍拍將飛翼(지여박박장비익) 땅이 푸드덕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날개 같고,

樓似搖搖不繫篷(누사요요불계봉) 누각은 흔들흔들 거려 매어 있지 않은 배와 같다.

北望雲山欲何極(북망운산욕하극) 북쪽으로 바라보니 구름 낀 산은 어디서 끝나려는가?

南來襟帶此爲雄(남래금대차위웅) 강물이 남으로 와 띠처럼 둘렀으니 이곳이 웅장해지네.

海氣作霧因成雨(해기작무인성우) 바다 기운이 안개가 되었다가 인하여 비를 이루고

浪勢飜天自起風(낭세번자천기풍) 파도의 기세가 하늘로 솟구쳐서 저절로 바람을 일으키네.

暝裡如聞鳥相喚(명리여문조상환) 어둠 속에 새가 서로 부르는 소리 들리는 듯,

坐間渾覺境俱空(좌간혼각경구공) >어느새 혼연히 경계가 모두 텅 비었다는 것을 완전히 알게 되었네.

 

-. 자료에 따라 5행의 氣를 氛으로. 7행의 喚을 叫로 다르게 실려있습니다

-. 출처를 정확히 알 수 없어 '다음'으로 표기합니다

-. 한문 음역은 개인적인 해석입니다

 

진휼청(賑恤廳)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 구제 업무를 담담했던 관아 건물

 

충청 수영성

문외한의 눈에도 해변의 구릉에 쌓은 성으로  바다를 관측하기에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춘 환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문 터 앞 주차장에 주차 후 성곽을 따라 느긋하게 소요하면서 영보정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경관을 감상하는 것도 답사의 또 다른 맛일 것입니다.

 

2021.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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