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서울특별시

서울...안산 봉원사

임병기(선과) 2019. 8. 6.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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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

작년인가?

절 입구 마애부도만 뵙고 돌아 왔었습니다.

이번에는

사찰에 있다는 삼봉 정도전 영조,원교 이광사,추사.옹방강,이완용.운강의 글씨 때문입니다.

언감생심, 서예에 조예가 깊은 것이 아니라 사찰 현판, 주련에 걸린 그 분들의 자취를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영조의 대웅전 현판 글씨는 소실되었으며,동국진체로 추정되는 원교의 글씨는 찾지 못 했습니다


 

수도 서울

뚜벅이 답사객에게는 더없이 편리(?)했습니다

독립문역  4번 출구.독립공원역 7024번 종점 입니다.

 


마애부도

버스 종점 아래, 사진에 새마을 정신 기념비가 보입니다.

마애부도 진입로는 기념비 반대편 맨아래 주차금지 팻말이 서 있는 산길 소로 50미터 전방입니다.

마애부도에 관한 글은 옛답사기를 참조하십시요

 

(2018년)

 

청신사 이각초 출세지탑 淸信士 李覺初 出世之塔.

운담대사 덕호 출세지탑 雪潭大師 德昊 出世之塔

 

(2018년)

 

상궁 청신녀 준법화 무술생 김씨 출세지탑 尙宮 淸信女 竣法華 戊戌生 金氏 出世之塔

무술생 김씨 지탑 戊戌生 金氏 出世之塔

청신녀 갑술생 안씨 경불화 사리탑 광서3년 정축 淸信女 甲戌生 安氏 敬佛華 舍利塔  光緖三年 丁丑

 

  

건물 누하주?


 

부도전

근세 부도와 부도비가 있습니다

 

 

연지

천원지방


 


봉원사

"봉원사(奉元寺)는 신라(新羅) 51대(代)(서기 889년) 진성여왕(眞聖女王) 3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년)가 현 연세대(연희궁)터에 처음으로 지었던 것인데 이후 고려시대에는 고려말 공민왕대에 활약한 태고(太古) 보우(普愚)스님이 크게 중창하여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성하여 당시 사람들로 부터 크게 찬탄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한산군(韓山君)이 이색(李穡)에게 명하여 태고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로 국사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여 봉원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태조 5년(1396)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하여 봉원사에 봉안하였고, 태조 사후에는 전각을 세워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제14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전각이 소진됨에, 17대 효중 2년(1651)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하였으나 동, 서 요사채가 다시 소실되어 극령(克齡), 휴엄(休嚴) 두 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 제21대 영조 24년(1748) 찬즙(贊汁), 증암(增岩) 두 스님에 의해 지금의 터전으로 이전하였고,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奉元寺)라 현액하였으며, 신도들 사이에는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제22대 정조 12년(1788)에는 전국의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제25대 철 종 6년(1856) 은봉(銀峯), 퇴암(退庵)화상 등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제26대 고종 21년(1884)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축을 이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 던 이동인(李東仁) 스님이 5년간 주석하였던 갑신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했다.고종 31년(1894) 주지 성곡(性谷)스님이 약사전을 건립하였으나 소실되었다. 1899년 인천 감옥에서 탈옥한 백범 김구 선생(법명 원종)이 공주 마곡사를 떠나 서울 서문 밖 이곳 새절(지금 봉원사)에 머물면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형세를 살폈다. 새절에서 인연이 닿은 사형(師兄) 혜정(慧定)스님과 동행해서 평양으로 가서 부모님과 해우했다.

1911년 주지 보담(寶潭)스님의 중수와 사지(寺地)의 확보로 가람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1945년 주지 기월(起月)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광복기념관을 건립하였다.1948년 백범 김구 선생이 봉원사를 다시 방문하였다.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당시 병화(兵火)로 광복기념관이 소진되었고 이때 영조의 친필 현판 등 사보와 이동인 스님 및 개화 파 인사들의 유물이 함께 소실되었다.

1966년 주지 영월(映月)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소실된 염불당(念佛當)을 중건하였는데 이 건물은 대원군(大院君)의 별처였던 아소정(我笑亭)을 헐어 옮긴 것이다.1991년 32세 주지 김성월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삼천불전 건립도중 대웅전이 소진됨에 즉시 중건을 시작하여 1994년 주 지 혜경(慧鏡)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대웅전을 복원 낙성하였고 같은 해 1,100평 규모의 삼천불전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2009년 9월 30일 아랍에미리트 세계유네스코 정부간 위원회 4차 회의에서 영산재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
2011년 전통사찰로 등록되었다.


현재 봉원사는 한국불교의 전통 종단인 태고종의 총본산으로서 전법수행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바 대중은 50여스님, 신도는 10만을 헤아리며, 국가무형문화재 제48호(단청) 이만봉 스님과 제50호(범패) 영산재보존회에서 단청과 범패분야의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봉원사 홈페이지)


  

지장.석가.관음


 

동종

"1760(영조 36)년) 예산 가야사에 봉안되었던 종입니다.

가야사는 1884년(헌종 10)  흥선대원군이  부친 남연군 이구의 묘를 쓰기 위해 폐사시킨 사찰입니다.


천판 위에 음통 없이 쌍룡의 종뉴를 표현하였으며, 그 아래 종신은 2줄 횡선으로 종신을 크게 세부분으로 구획하였습니다.

상단은 크게 구획하여 범자(梵字) 8개, 연곽 4개, 보살입상 2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주종기를 통해 1760년 가야사의 대종으로  덕산, 예산, 대전, 천안, 결성(홍성), 옥천 등에 사는 많은 신도들의 후원으로 조성되었고,주종장은 18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이만돌 李萬乭, 신덕필 申德必, 최정취 崔宗就 등 3인이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주종장 이만돌李萬乭(=万乭, 萬碩, 万石, -1759~1774-)은 18세기 후반에 경상도에서 구성된 경상도 이씨일파(이만돌-이만중-이만숙)의 장인이었다. 그는 이들 유파에서 주종활동이 가장 먼저 확인되는 인물로, 1759년 경주 천룡사 동종(현 영천 은해사 소장)과 당진 영랑사 동종을 시작으로, 1760년 덕산 가야사 동종(현 서울 봉원사 및 당진 영탑사 소장), 1761년 옥천 영국사 동종, 1768년 서울 관문사 동종(원 봉안사찰 미상), 1769년 경주 불국사 금고, 1774년 용담 숭암사 동종(현 공주 갑사 소장) 등 주로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사장私匠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는 약 15년 동안 활동하면서 동종 7점과 금고 1점을 제작하였다.


이만돌이 만든 동종들은 대체로 쌍용의 종뉴를 갖추고, 낮고 편평한 천판과 종구가 좁아진 종형을 표현하였으며, 또한 종신을 2줄의 횡선으로 구획하지만, 구획된 상단에만 돌기가 표현된 원권의 범자, 사선문의 연곽, 보살입상만을 장엄하는 점이 특징이다. 1760년에 제작된 서울 봉원사 동종은 그의 초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종뉴와 종형을 비롯하여 종신을 장엄하는 도안 등에서 그가 제작한 다른 작품들과 동일한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같은 유파의 주종장인 이만중ㆍ이만숙과는 차이점인데, 이들이 제작한 동종들은 17세기에 활동했던 승장 계열의 동종을 계승하여 천판 아래 상대에 범자를 장엄하거나, 하대에 띠 장식을 부조하는 등 전통적인 양식을 표현하였음. 이렇게 동일한 유파에 소속되었다 하더라도 개별 장인에 양식이 우선시되는 사실은 승장의 활동이 완전히 사라지는 18세기 후반부터 나타나는 특징이며, 이때부터 화원이나 각수와의 분업도 확인하기 어렵다.


봉원사 동종은 비록 그 크기가 대형은 아니지만, 주조상태와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할 뿐 아니라, 경상도 이씨일파에 대표적 장인인 이만돌에 대한 작품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 주종기를 통해 명확한 제작연대와 후원 계층도 파악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18세기 후반 동종의 일반적인 양식이나 私匠에 대한 계보 및 활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학술적인 가치도 높습니다."(봉원사 홈페이지 발췌 보완)

 

 

용뉴.천판



상대의 범자문



상대의 연곽,연뢰



상대의 보살 입상



중대의 주조기




산신탱.1994년 추정

 

 

 

구품극락도

 


신중탱.1994년 추정

 


대웅전 불화를 1994년으로 추정하는 것은

신중탱 화기에 있는 갑술 甲戌 三月 日 이라는 기록 때문 입니다.

대웅전이 한국전쟁 으로 소실되었다는 기록을 기준으로 1950년 이후 갑술년은 1994년 입니다.

  


시왕도.1994년 추정

 


감로도.1994년 추정

 


칠성각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치성광여래 라는 존명이 밝혀진 복장물 발견 유무는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

 

 

후불탱화는 칠성도 입니다. 

 


산신탱 

 

 

명부전 冥府殿

좌측 상단에 정도전 필(鄭道傳 筆) 각자가 있으며

사찰 홈페이지에는 정도전 글씨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사찰 홈페이지에는 주련은 이완용의 글씨라고 합니다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낙관으로는 글이 짧아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안인부동여대지 安忍不動如大地

잠잠히 인내함이 대지와 같이 동요함이 없도다



정려심밀약비장  靜慮深密若秘藏 

고요한 맘 깊고 깊어 비밀한 창고 같네



지장대성위신력 地藏大聖威神力

지장보살 큰 성현의 위대하신 위신력은



항하사겁설난진 恒河沙劫說難盡

항하사겁 연설해도 다 말하기 어려워라



견문첨례일념간 見聞瞻禮一念間

일념간 잠깐 사이 보고 듣고 한 순간만 생각해도




이익인천무량사 利翼人天無量事

이익된 일이 한량없이 많습니다.



대방 大房

봉원사의 염불당(念佛堂)입니다.

이 건물은 조선말 흥선 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 건물을 이건하면서 일부 변형 및 축소되어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1966년 ~ 1967년 주지 최영월 스님, 도화주 김운파 스님에 의하여 복원되었으며, 중앙(中央)대중방과 마루사이는 벽이 없어서 행사시 전체를 한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방에는 추사와 옹방강.운강의 글씨가 있습니다.

 


산호벽루(珊湖碧樓).추사

한유(韓愈 768~824)의 석고가(石鼓歌)에 나오는 구절 산호벽수교지가(珊瑚碧樹交枝柯)'산호 짙푸른 나무에 가지 서로 얽힌듯 하구나'

라는 뜻이며, 아름다운 서체를 형용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翁方綱)

 


청련시경(靑蓮詩境).추사

푸른 연꽃이 한편의 시를 이루는 경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봉원사 奉元寺

운강.석봉 雲岡 石峯

우리가 알고 있는 한석봉은 아닌 듯 합니다.

운강에 대한 자료가 검색되지 않지만, 하동 쌍계사 명부전 현판 글씨도 운강의 작품입니다.

 


석조아미타여래좌상

300년전 북한 철원군 소재 보개사 (심원사)에ㅔ 봉안되었던의 불상으로 전합니다.

 

 


신중탱.이만봉스님?

 


현왕탱

 


누구의 글씨인지?

 

 


기봉원사유 記奉元寺遊/풍고집(楓皐集)...김조순(1765년 ~ 1832년)


"기묘년(1819) 동짓달 16일 유자범(兪子範)의 처인서옥(處仁書屋)에서 술을 마셨다. 김명원(金明遠), 조군소(趙君素), 이숙가(李叔嘉), 조사현(趙士顯), 이사소(李士昭 ), 이문오(李文吾), 김사정(金士精)은 모두 우리 모임에 속한 사람들이다. 막 술을 마시려 할 때 산에서 불어온 바람이 사립문을 흔들고 싸락눈이 막 날리기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서 술기운이 거나해지고 밤이 깊어지자 맑은 달빛이 뜰에 비치었다.


갑자기 자범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이 밤이 참으로 즐겁소. 그러나 우리들은 답답하게 도회지에 갇혀 멋없이 지내는 것을 늘 한스러워 하였으니, 다음에는 성곽 바깥으로 나들이를 하는 것이 어떻겠소?” 내가 말하였다. “이 논의는 매우 묘하오. 성 서쪽 봉원사(奉元寺)는 나와 명원이 여름에 휴가를 보내던 곳인데, 한 번 떠나온 후 40년이나 되었소. 매양 다시 들르겠노라 생각해왔지요. 한번 가보도록 하지요.” 자범이 말하였다. “좋지요. 사소의 집이 그곳에서 가까우니 주관하도록 해야겠소. 또 좋은 일이니 열흘 후로 약속을 잡는 것이 좋겠지요. 해가 뜰 무렵 사소의 집에 모여 옷소매를 나란히 하여 가도록 하지요. 약속을 어기지 마시오. 따로 기별하지 않겠습니다.” 모두들 좋다고 하였다.
 

기일이 되자 모두 약속한 대로 모였다. 전날 저녁에 사소가 사람을 시켜 행장을 꾸리게 하였다. 봉원사의 중이 와서 인도하였다. 마침내 둥그내고개[圓峴] 서쪽에서부터 승전봉(勝戰峰)을 걸어서 넘었다. 이중예(李仲睿)가 이 소식을 듣고 술을 가지고 뒤따라 왔다. 정말 일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승전봉 뒤는 얼음과 눈이 덮여 있어 발걸음을 뗄 때마다 맑은 소리가 울렸다. 발을 잠깐이라도 멈칫 하면 넘어지게 되니 정말 고생스러웠다.


절에 이르니 풍광은 예전과 똑같았지만 황량하여 더욱 마음이 쓰였다. 예전의 중들은 한 명도 남아 있는 이가 없었다. 두 명의 주지는 삭발한 머리가 싸락눈이 소복하게 쌓인 듯 하얗게 세었다. 우습다, 인생이 이렇게 허망함이. 저 변함이 없는 갠지즈 강물과 같지 못하여 안타깝다. 함께 불전을 배회하면서 한참동안 감회에 젖었다.
 

함께 따라온 사람 중에 바둑은 한흥(漢興), 노래는 군빈(君賓), 거문고는 익대(益大)가 잘하는데 모두 솜씨가 제일이다. 또 새 사냥을 하는 이가 있는데 백발을 쏘아 한 발도 놓치지 않으니 그 또한 빼어난 기술이다. 각기 잘하는 바를 발휘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더하게 하였다. 식사에는 매운 양념을 쓰지 않았으니 승려들의 법을 따른 것이다. 밥을 먹을 때는 한 줄로 앉고 승려를 시켜 종을 울리게 하였다. 나도 들고 다니는 소쿠리에서 나무로 만든 발우를 꺼내어 여러 차례 밥을 받았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한밤이 되자 두 명의 승려가 소리를 나란히 하여 불경을 외웠다. 그 소리가 웅심하고 청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성찰하는 마음이 들게 하였다. 한 젊은 승려가 제법 의리를 담론할 줄 알고 자태가 단정하여 사랑스러웠다. 술을 마시다 새벽이 되어서야 베개를 나란히 하여 잠을 잤다. 방이 호젓한데다 따뜻하여 매우 추운 밤이지만 추위를 느끼지 못하였다.
 

다음날 나와 명원은 각기 시 몇 편을 지었다. 밥을 먹은 후 함께 돌아가는 길에 다시 승전봉에 올랐다. 이때 구름과 햇살이 맑고 고왔다. 가슴속이 탁 트였다. 동으로 한양성을 내려다보았다. 성 안팎의 누각과 골목길이 손금처럼 보였다. 북쪽으로는 삼각산과 도봉산인데 쌓인 눈이 빛을 뿜어 휘황찬란, 번쩍번쩍하여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다. 서남쪽으로 큰 한강이 깡깡 언 채 구불구불 뻗어 있다. 수십 리에 걸쳐 파란 유리를 강물 위에 갈아놓은 듯하다. 긴 바람이 모래와 눈을 불어 마치 안개가 낀 듯 흐릿하였다. 서로 돌아보며 매우 즐거워하였다. 바위에 걸터앉아 술을 데우고 거문고를 타는 이를 시켜 노래에 맞추어 연주하게 하였다. 거문고가 얼어서 더욱 운치가 있고 노랫가락은 높고 또 기운찼다.  소리가 처음에는 맑게 울려 퍼지다가 나중에는 애원조로 바뀌었다. 여음이 허공을 흔들어 솔바람 소리와 어우러져 절절하였다. 모두들 말하였다. “반평생 노래와 거문고 소리를 들었지만 오늘 같은 날이 없었던 듯하오.” 내가 다시 입으로 긴 율시를 읊고, 앞서 지은 시와 함께 내어놓고 여러 벗들에게 답하라 하였다. 다시 사소의 집으로 돌아왔다. 각기 술 한 잔씩을 마시고 헤어졌다.
   

아, 이번 유람은 날이 따스하지 않고 추웠으니 그 고통이 막심하였다. 길을 나서 말을 타지 않고 걸어갔으니 그 수고로움이 막심하였다. 절에 빼어난 물이나 바위가 없어 감상할 만하지도 못하였고 식사를 할 때 큰 상에 맛난 음식을 차려놓은 일도 없었다. 모두가 다 형편없는 일이라 하겠다. 남들이 보면 즐거울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상하게도 놀이에 함께 하였던 3-40인은 모두들 질탕하게 즐기며 기뻐 펄쩍 뛰기까지 하였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내심 마음에 맞고 밖으로 좋은 경지를 만났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마음에 맞으면 좋은 경지를 만나고 좋은 경지를 만나면 즐거움이 생기는 법이다. 즐거움이라는 것은 어떤 사물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법이다. 그저 그 경지에 들어가지도 못하여 이를 얻지 못하는 자들에게 가르쳐 줄 만하다."(출처/장달수의 한국학카페.낙민님 글)

 

2019.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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