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서울특별시

서울...옛돌박물관 실내전시장

임병기(선과) 2019. 8. 6.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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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이른 아침

정문을 통과하여 야외전시장을 살펴보던 중에 박물관 직원이 황급히 다가 옵니다.

 

관람하러 오셨는지?

그렇다고 하였더니, 입장료가 있다고 합니다.

입장료를 내고 다시 야외 밖으로 나와 야와 전시물을 먼저 답사하였습니다

 

무슨 이야기가 장황?

 

옛돌 박물관을 관람하실 분들은

1층 부터 실내. 발코니(2.3층), 옥상 답사 후, 다시 정문으로 나와  야외 순서로 관람하라는말씀 입니다.

 

저는

야외. 옥상 답사 후 실내로 내려가는 길을 찾지 못해  뒤죽박죽 두서 없이 되어버려 벅수,동자상의 디테일을 놓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2층 발코니,무병장수길도 알지 못했습니다.

 

참고로

1층은 환수 유물관

2층은 동자관, 벅수관

3층에서는 자수관,기획전시관

별도로 계단을 따라 이어지는 무병장수의 길이 있으며, 입장료는 7천원 입니다.

 

따라서 아래 사진도 뒤죽 박죽 입니다.



문석인.1층

 

 

금강역사상.1층



석불좌상.근세 작품처럼 보입니다.

2층



불두.신라.



 

 

나한상


 

 

  

 

장군석.고려후기

고려왕의 능을 수호하던 장군석인가요?

3층 로비에 위치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3층 자수관 앞

여인?

 

 

자수관에 위치

용도를 확인하지 못 햇습니다.

 

 

3층 자수관

문수,보현 동자

사자와 코끼리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벅수관

다양한 상징을 가진 손에들고 있는 물건을 확인치 못 해 아쉽습니다.

 


벅수

 


벅수관

 


벅수관

 


수심정기 守心正氣

참된[誠] 마음을 지켜 공경하고[敬] 믿는[信] 데서 그 기운을 바로 해야 한다는 천도교교리

위창선생이 천도교 입문(1902년) 이후 쓴 글씨로 추정됩니다.


위창葦滄(1864~1953)

우리가 익히 아는 개화파 역관 오경석의 아들

답사객들이 자주 접하는 글씨의 주인공 입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명(仲銘), 호는 위창(葦滄). 아버지는 중국어 역관으로 초기 개화파의 한 사람이었던 경석(慶錫)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20세에 역관이 되었으며, 김옥균·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과 접촉했다. 1886년(고종 23)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기자를 겸임했다. 1894년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농상공부 참의, 우정국 통신국장 등의 관직을 거쳤다.


1896년(건양 1) 독립협회의 간사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독립문·독립공원의 건조사업을 관장하는 임원으로 선정되었다. 1897년(광무 1)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도쿄 외국어학교[東京外國語學校] 조선어 교사를 지냈다. 1902년 6월 개혁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 이미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고, 이후 손병희의 참모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06년 1월 손병희와 함께 귀국하여, 3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교육개발·식산흥업을 표방한 대한자강회를 조직했으며, 손병희의 후원하에 국민의 지식계발을 목적으로 6월에 〈만세보〉를 발간하는 등 계몽운동·언론활동에 주력했다. 대한자강회의 활동과 영향력이 커져 이에 불안을 느낀 통감부가 1907년 8월 신문지법을 적용하여 이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11월에 남궁억(南宮檍)·장지연·윤효정·권동진(權東鎭)·지석영(池錫永) 등과 더불어 대한자강회의 이념을 계승한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이 되었다.


1909년 유길준(兪吉濬)과 융희학교(隆熙學校)를 설립하고, 장효근과 함께 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한 〈대한민보〉를 발간하여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삼갑운동(三甲運動)을 추진하는 등 천도교 교단에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18년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 당시의 세계정세와 국내동향으로 보아 일대 독립운동을 일으킬 시기라고 생각하고, 최린(崔麟)·권동진과 함께 독립운동 준비를 발의했다.


1919년 1월초 국내에 들어온 도쿄 유학생 송계백(宋繼伯)으로부터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계획을 듣고 손병희·최린·권동진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여, 운동의 3대기본노선을 대중화·일원화·비폭력으로 확정했다. 기독교계·불교계 인사 및 학생들과 비밀리에 접촉한 후, 손병희·최린·권동진과 더불어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제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서화에 전념하면서 은둔생활을 했다.


1918년 서화가들의 친목단체인 대한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발기인으로 참가한 그는 서화는 물론 그 감식(鑑識)에도 조예가 깊어 한국서화사 연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아버지와 자신이 수집한 역대 서화가의 사적을 토대로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화가들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하여 편술한 〈근역서화징 槿域書畵徵〉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이래의 서화가·문인학자들의 날인된 인장자료를 모아 집성한 〈근역인수 槿域印藪〉, 수집한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엮은 〈근역서휘 槿域書彙〉·〈근역화휘 槿域畵彙〉 등은 모두 서화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들이다."(다음백과)

 

 

 

동자관

꼭 다시 들리고 싶습니다.


 

주림석실 행서대련 珠林石室 行書對聯
추사·완당 김정희 (1786-1856)

珠林墨妙三唐字 주림묵묘삼당자
주림珠林의 기묘한 필묵墨妙은 삼당三唐의 자법字法이고,

이 글은 주림석실의 시이고, 대련은 글자의 구성과 획의 운용에 있어 추사 행서의 표준이 될 만한 빼어난 작품이다. 당시 최고급 종이에 좋은 먹으로 정성들여 쓴 이 대련은 해서에 행서법이 곁들여진 단정한 서체로 조화가 잘 이루어져있고 획은 굵기에 변화를 준 필획의 구사가 힘이 있으면서도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다. (옛돌박물관)



珠林墨妙三唐字 주림묵묘삼당자
주림珠林의 기묘한 필묵墨妙은 삼당三唐의 자법字法이고,

 


石室文高兩漢風 석실문고양한풍
석실石室의 고아한 문장文章은 양한兩漢의 풍격이로다.

 

 

서간문 書簡文
추사·완당 김정희 秋史 金正喜 (1786-1856)


나와 같은 중생이 거론하는 추사 이야기는 우수마발 사족에 불과 할 것이고...

 

 

동자관

 

 

동자상

손에는 꽃, 무릎 아래에는 양을 새겼습니다.

 

 

동자상

불로장생의 상징인 복숭아를 들고 있습니다.

 

 

애기를 품고.

 

 

 

 

 

환수관

대부분 문석인이었습니다.


1층에 위치

 

 


장명등.1층

 

 

옥외 계단

1층 부터 계단으로 이어지는 길

 

 


동자석

애기를 안고 있습니다

 


하마下馬

동자석에 새긴 하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분명 다시 올 것 입니다.

성북동 옛길을...

 

2019.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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