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안동시

안동...봉황사 부도전

임병기(선과) 2019. 7. 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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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사

햇수로 10년만에 다시 찾았습니다.

여느 사찰 처럼 루대를 비롯 불사가 이루어져 옛분위기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오늘은

예전에 뵙지 못한 부도 1기를 답사할 목적으로 들렸으나 입구에 있었던 부도전은 대웅전 뒤로 옮겨 놓았습니다.

또한 뒤편 계곡가에 이끼를 머금고 계셨던 석불은 대웅전 앞으로 옮겼으며, 석탑 옥개석은 그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래 2010년 옛글로 대신하며, 부도전 내용을 추가합니다.


 

남덕루覽德樓


 

대웅전.극락전


 

대웅전

내부 수리중


 

 

강희 25년 병자 팔월일 康熙二十五年 丙子 八月 日

1696년. 각자 통정대부 신행 刻字 通政大夫 信行

 

 

서명(?)書銘(?)

승 지조 僧 智照


 

목조석가여래좌상.1692년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은 대웅전 공사 때문에 별도로 모신 듯 합니다.

 

 

석가모니불화


 

아미타불화

 


약사여래불화


 

 

 

 

 

  

 

  

 

아기산봉황사사적비 鵝岐山鳳凰寺事蹟碑

1813년

鵝岐山鳳凰寺事蹟碑

(碑文) 寺在崎山下□□道誌所占□立不知□石守而 鵝岐山寺名曰鳳凰創今 樂西菴其舊址也 甲子山之僧懷應智□今處尙□□恭之法堂禪信堂乙丑□□□行造成伏像三遵(以下判讀不可) 崇禎一百十八年□□□□盖誠也寺在山畢之水重□□□之□□□曲簡之 □□定人□□而□奇觀也遂景遊人稱(以下判讀不可) 學子論於此則未於敢表焉浮屠三遵舊基法堂 樂西菴淨水菴大雄殿極樂殿者度僧堂禪堂淸風堂滿月臺泛鐘閣萬世樓(以下判讀不可)

歲次癸酉五月四日 立石 奉硯寺弘

 


석조여래좌상

10년 전에는 봉황사 대웅전 향좌측 뒤편 계곡부에 계셨습니다.

이끼를 제거하고 대웅전 중정으로 모셨습니다.


불두는 결실

삼도흔적이 남아 있고,법의는 통견. 승각기는 일자로 매듭지었습니다.

수인은 분명하지 않으며, 길상좌에 불신이 긴편 입니다.


고려초기 불상으로 추정됩니다.

 

 

 


석탑 옥개석

예전 답사 때에 부도 1기가 더 있다고 말씀해주신 분의 집입니다.

부도전 출입구가 펜스로 막혀 여쭈었더니 대웅전 뒤편으로 이건하였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극락전

 


지장.아미타

 


삼성각.산신각

 


봉황사 부도전

예전에는 봉황사 초입 산자락에 있었으며 현재는 대웅전 뒤편 등산로에 위치합니다.

좌측 3기는 10년전에 인연지었습니다.

좌측 3기는 부도 형식도 한 분 장인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대동소이하며 암질 때문인지, 아니면 산불의 영향인지 검은 색을 띠고 있습니다. 


맨 우측 1기는 이건하기 전 3기 부도 뒤편 능선에 위치하여 놓쳤으며 오늘 첫 인연 입니다.

 


부도 당호

육안으로는 쉽게 확인되지 않으며 자료마다 제각각 입니다.


한국의 사찰문화재총람

좌측 누락.송계당나식대사탑 松桂堂湜大師塔.청파당전대사탑 淸波堂全大師塔.포월당섬대사탑 抱月堂暹大師塔


한국사찰관광정보(요즘은 검색되지 않음)

좌측 누락. 송계(松桂).청파(淸波).포월(抱月) 섬대사(暹大師)


다행히도

이번에 다녀온 후 자료를 검색하다가 뜻밖의 정보를 얻었습니다.

 

 

어떤 자료에도 육안으로 구분이 힘든 당호는 실려있지 않습니다.


청운(설). 靑(淸)雲(雪) 2자만 희미합니다.


종형으로 상륜부와 일석으로 조성되었습니다.

다른 3기와 달리 원형대좌만 갖추고 지대석이 생략되어 3기 부도 보다 후대로 추정합니다.

 

 

 

송계당나식대사탑 松桂堂懶湜大師塔

동일인물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추적 끝에 단서를 찾았습니다.

 

송계대선사문집 상월대사시집.동국대학교출판부

"조선 후기 숙종~영조 연간에 경북 안동의 봉황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송계 나식의 문집《송계대선사문집》과 18세기에 활동한 불승 상월 대사 의 시집《상월대사시집》을 엮은 책이다.

 

송계 나식(1684~1765)은 본관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로 이름은 수호壽浩. 어려서 고향 근처의 교리校理 김칠탄金七灘에게 나아가 글을 배웠다. 16세에 기산岐山의 절에서 독서를 할 때 스님들의 청정수행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하였다. 가선공嘉善公에게 머리를 깎았고, 이후 청파당淸波堂 보전譜詮 선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경주 백련사白蓮寺에서 개당하였고, 기산岐山의 봉황사鳳凰寺 등지에서 주석하며 대중을 교화하였다."

 

또한 위 내용으로 미루어 봉황사 부도전의 청파당淸波堂 보전譜詮 선사도 이 시기에  생존하였던 스님으로 추정됩니다.

아울러,송계스님의 머리를 깍아 준 스님은 가선공 품계를 받은 분으로 혹  부도전 나머지 1기의 주인공  포월당 抱月堂은 아니었을까요?

 

 

 


즉, 송계당 부도는 1765년 이후 조성된 부도 입니다.

 

 

청파당보전대사탑 淸波堂譜詮大師塔

명문은 동국대학 출판부 송계당 시집을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청파스님은

송계당 스님에게 구족계를 내린 은사 스님으로 18세기 중후반 부도 입니다.


방형지대석과 원형대좌가 일석이며, 대좌상부에 홈을 두어 상륜과 일석인 종형 부도를 올렸습니다.

 

 

 

 

 

 

포월당섬대사탑 抱月堂暹大師塔

송계당 시집에도 구체적 언급은 없으며  송계스님의 머리를 깍아 준 가선공(후대에 추증?)스님으로 추정되지만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송계.청파 부도와 양식이 흡사하여 동시대에 봉황사에 주석하셨고 송계의 은사로 추정 해 봅니다.


송계스님의 생존년대가 분명하여 포월당 부도도 18세기 중후반 부도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향우측 3기 부도 편년을 확인시켜주는 다른 자료도 찾았습니다.


1813년에 세운 대웅전 옆 봉황사 사적비문 명문.

浮屠三遵舊基

부도삼준구기

부도 3기가 옛터에 있습니다.


즉, 3기 부도는 1813년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위치로 옮기기 전에는 3기만 부도전에 있었습니다)

나머지 1기는 그 이후임을 미루어 짐작 가능 합니다. 

 


무상당 시한대사

 


법제자 외

김휘동.형동.태동.훈동.준동.

휘동님은

안동시장을 역임하셨던 분인가?

 


1997년 입적

 

 

부도

주인공의 행장을 추적하는 즐거움에 그 여정이 어디까지 진행 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2019.06.25 

아래는

2010년 글 

 

 

지난달에 동선에 포함하였으나 답사하지 못한 안동의 옛님을 만나고 왔다. 몇달전부터 심한 목감기 때문에 오늘도 병원에 들려 진료를 마친 후 안동시 임동면  황산사를 찾았지만 그 곳에는 봉황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황산사(黃山寺)로 알고 있었던 봉황사는 1980년 당시 사찰 옆 개울에서 발견된 사적비를 통해 원이름이 봉황사였음을 알 수 있었지만,  아직도 황산사와 봉산사명을 두고 설왕설래 명확한 정리가 되지 않은 듯 했다. 절집명은 내게 그다지 중요치 않아 주석하는 스님들이 칭하고 있는 봉황사로 통일 하겠다.

 

"봉황사(鳳凰寺)가 자리한 산이 아기산(鵝岐山)이다. 산세가를 찾았습니다. 거위 모양을 하고 있어 거위 ‘鵝’자에 산 이름 ‘岐’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태백산의 한 갈래인 일월산(日月山) 지맥이 남으로 뻗어내려 해발 591m인 아기산을 이루고 있다. 그 주봉이 우뚝 솟아 무실마을의 진산(鎭山)이 되고, 봉황사를 끌어안고 있는 황산곡(黃山谷)을 만들었다. 황산골은 북쪽을 향하여 널찍한 터를 갖고 있으며, 아기산의 기(氣)가 모여 뻗어 내려온 곳에 봉황사가 자리하고 있다.

 

봉황사는 신라시대인 644년(선덕여왕 13)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창건 이후 조선시대까지의 내력도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으나, 다만 현존하는 자료로 가장 앞선 기록인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임하현에서 동쪽으로 15리 떨어진 기산(岐山) 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라고 황산사를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사적비의 내용에 비중을 두고 보면 번성기 때에는 대웅전, 극락전, 관음전, 승당, 선당, 청풍당, 만월대, 범종각, 만세루 등의 여러 전각과 부속암자로 낙석암(樂西庵), 정수암(淨水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든 전각이 전소되었다가 왜란 이후에 대웅전과 요사 1채만이 중창되어 그 명맥을 이어오다 사적비의 발견으로 가람의 옛 모습을 확인하고, 이에 맞게 옛 터에 중창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넓은 터전에 대웅전.극락전.산신각.요사.공양간이 있지만. 올망졸망한 산지 가람의 전형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분방만 평지 가람 같은 분위기이다. 임진왜란 이후 1624년에 중창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웅전은 높은 기단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불단은 후벽에서 한 칸 앞에 고주를 4개 세워 3칸의 불벽을 꾸민 다음, 어칸의 절반 정도까지 불단을 만들어 불단을 중심으로 우요삼잡이 가능한 구조다. 불단이 앞으로 돌출된 구조는 법당 예배공간이 좁아지는 것으로 조선 중기 이후 많이 보이는 구조로 알고 있다. 

 

 

강희 35년(1696년)이 새겨진 대웅전 편액. 각자를 한 인물이 정삼품을 지낸 신*이며, 편액 테두리 그림(?)은 승려 **이다. 임진왜란 이후여서 승려의 위상이 격상되어 사대부와 나란히 할 수 있었을까?

 

 

기둥에는 배흘림이 유려하다. 대웅전 외부의 단청은 특이하게도 전면과 좌우측면에는 했으나 뒷면에는 단청이 없다. 창호는 정자 살창으로 어칸은 3분합, 협칸은 각 2분합이며 양측면에도 출입문을 두었다. 추녀 끝은 활주로 받쳐져 있다. 

 

 

 불단의 삼세불. 과거불인 연등불. 현재불 석가모니불. 미래불 미륵불을 모셨다.

 

 

석가모니불

 

 

 과거불

 

 

미래불 

 

봉황사 삼세불화 중 석가모니탱...출처/다음

 

삼세불 후불탱은 최근에 조성하였으며 기존의 봉황사삼세불화는 안동 민속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최근 경북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들은 강희13년(1674) 갑인 4월에 조성된 불화로 알려져 있다.

 

중앙황제탱..출처/다음

 

"봉황사에는 밖으로 드러난 당우(堂宇) 외에 별도로 보관하고 있는 오제탱(五帝幀)이라는 불화가 있다. 오제탱은 현재 통도사성보박물관과 안동 봉정사, 문경 김룡사 등에 남아 있으나 그 용도는 불확실하다.

 

봉황사에 현존하는 오제탱은 동방청제(東方靑帝), 서방 백제(西方白帝), 중앙황제(中央黃帝), 연직사자(年直使者), 월직사자(月直使者), 일직사자(日直使者), 시직사자(時直使者) 등이다. 그러나 명문이 없어 정확한 도상의 주인을 밝혀내기가 어렵다. 크기는 대략 높이98cm에 너비 68cm이다. 조성 연대는 17세기로 보인다."

 

 

대웅전 우물 천장에는 연꽃이 활짝 피어 화려함과 장엄을 더해준다.

 

 

  대웅전 빗천장에는 극락세계를 묘사한 듯한 봉황 ·학 ·신선이 구름을 배경으로 하늘을 날고 화초가 만발해 있다.

 

 

대웅전 후벽. 전면과 달리 단청이 없다. 옛전설을 간직하려는 듯한 불사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전설에 의하면 대웅전을 중창한 후 봉황이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단청을 하였다고 한다. 건물의 정면과 좌 ·우 측면을 끝내고 건물 뒤에 단청을 할 때 그만 사람들이 쳐다보자 끝내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아서 결국 오늘날까지 뒷면에는 단청을 하지 못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이러한 연유로 봉황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짐작된다."

 

 

용마루와 막새기와에는 연봉을 세웠다.

 

 

대웅전 옆에 세워져 있는 1980년 주지스님께서 사찰 옆 개울에서 발견된 사적비.  ‘아기산봉황사사적비(鳳凰寺鵝岐山碑)’라는 아홉 글자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음각된 비문은 마모가 심해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태다. 

 

 

산신각

 

 

사전에 인지한 석불좌상을 수배하였으나 보이지 않아 보살님의 안내로 찾았다. 대웅전 뒤로 산길을 올라 샘이 있는 샘골에 계셨다. 어깨는 넓고 법의는 통견이며 주름은 깊지 않고 가슴아래 승각기가 보인다.  결가부좌에 수인은 선정인으로 보인다. 불상의 머리는 떨어져 나갔고 둥근 자연석을 시멘트로 접합하여 불두를 삼았다. 고려시대의 석불로 전해오고 있다. 

 

 

봉황사 초입 민가 건너편 산자락의 석종형 부도 3기. "종신에 당호가 새겨져 있으나 마모가 심해 완전히 읽혀지지는 않지만, '포월(抱月) 섬대사(暹大師)', '청파(淸波)', '송계(松桂)'등의 당호(堂號)가 기록되어 있다. 화강암제 이며 기단석과 종형부도석이 각각 1매의 돌로 제작되어 있다.

 

사각 형의 기단석은 상부에 2단의 몰딩이 처리되어 종형부도를 받치고 있다. 종형부도는 정점이 뾰족하게 돌기되어 있고 그 아래는 모자 의 창처럼 둥글게 처리했는데 가운데 1조의 침선을 돌리고 있다. 부도의 몸통부분은 상광하협식(上廣下狹式)의 타원형인데 상단부에 1조의 침선이 돌려 있다."

 

 

석등 간주석을 끝내 찾지 못하고 내려오는 길에 뵌 부도. 부도를 보고 내려오는 마을주민이 나를 부른다. 

 

-.교수님입니까? (내 대답도 듣지 않고)부도 몇 개 보았니껴?

-.세 기 보았습니다.

-.(득의만만만 표정으로)그위에 한 개 더 있는데

 

다시 올라가기가 싫었다. 인연이되면 다시 만나겠지요.

 

-.그럼 석탑부재 위치는 아시나요?

-.따라오소 

 

 

개인집에 옥개받침이 3개인 옥개석 하나가 뒤집어져 있었다.  밭둑에 있던 부재를 주인 아저씨가 지고 왔으며,예전에는 석조부재들이 산재했다고 한다. 심지어 작은 비석 등이 묻힌 개울가 위치도 짐작간다고 했다. 이런 증언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아니 할 수 없다. 하루바삐 전국 폐사지에 대한 심도 있는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이유라 하겠다.

 

주민 네분과 함께 옥개석을 보고 있는중에 재미난 이야기들이 솔솔 나온다. 봉황사가 폐사된 이유는 "봉황사에는 신도가 넘쳐나 스님들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날 주지스님이 도인으로 부터 절의 풍수 형국이 다리미 자리(즉 화기를 품은 형국)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절 앞에 연못을 조성하여 폐사되 었다고 한다."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큰기대 없이 들린 절집에서 뜻밖의 귀한 옛님들을 만났다. 기회가 되면 안동민속박물관의 삼세불화와 봉황사에 보관중인 오제방탱, 사자탱도 뵙고 접다. 최근에 들어 상처나고 마모된 님들이 오히여 정겨운 까닭은 왜일까? 연륜으로 생각하면 좋으련만 모두들 연로라고 말하겠지? 그래도 봄날에는 가끔 꿈꾸고 싶다. 남가일몽일지라도...

 

2010.04.03 

 

전통사찰정보 자료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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