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안동시

안동...천등산 봉정사

임병기(선과) 2018. 8. 23.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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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오늘은 부도 뵈러 오는 길.

옛사진이 없으니  마지막 으로 들린지가 2005년 이전이었던 것 같다.

 

옛글로 대신하며 간단한 설명을 더한다.

 

 

편액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 1909-1999)선생의 글씨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 더욱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하고,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하였다.

 

 

만세루.조선중기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을 달아 가구의 노출을 방지하고 비나 바람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이층 누각식 건물로 일층인 아랫부분은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주츳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우하주는 누상주에서 사용한 것보다 더 굵은 부재를 사용하여 견고하게 보이며 사찰의 중정으로 오르는 통로의 구실을 한다. 만세루는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으며 법고와 목어 판이 놓여져 있어 예불을 알리는 고루로서의 기능을 한다.

 

누에는 '덕휘루(德輝樓)'라는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어 이 누문의 이름이 덕휘루였음을 알 수 있으나 언제 만세루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웅전

대웅전은 조선 초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전면에 쪽마루를 깔았다..

자연석의 막돌허튼층 쌓기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 지붕건물이다.

 

대웅전 현판

극락전 현판과 더불어 광서 8년(1882년)에 채색하였다.

 

 

연화대좌와 석부재

 

 

괘불지주

 

 

쪽마루

 

 

공포

 

 

4분합 띠살문

 

 

측면

 

 

측면

 

 

후면

 

 

지장보살,석가여래.관음보살

 

 

불단 상부

닫집을 보개처럼 표현하였으며, 우물천정이다.

 

 

닫집의 황룡,백룡

 

 

 

 

고주

 

 

 

 

불단

 

 

 

 

동종.1813년

전체적으로 종신은 거의 직선형이다.

상부에 용뉴와 음통이 있으나 음통은 모양만 갖추었을 뿐 구멍은 막혀 있다.

상대에는 보살상을 2구,  유곽이 있다.

중대에는 4개 범자문을 새겼으고, 여백에 조성시기를 비롯한 명문이 있다.

하대에는 특별한 조식이 없다..

 

 

가경 18년.계서사월일

안동 봉정사 대종개주중 백오십근

지전 팔윤

 

1813년에 다시 주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명문을 미쳐 확인하지 못했다.

 

 

 

 

지장탱.1888년

 

 

신장탱

 

 

 

아미타탱.1713년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보살, 10대제자, 타방불이 있고 화면 가장자리에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 금강 등을 배치하였다. 아미타불은 주형광배를 배경으로 설법인을 결하고 높은 연화대좌에 결가좌하고 있으며, 아미타불의 좌우로는 보관을 쓰고 정병이 올려진 연화가지를 든 관음보살, 보협인이 올려진 연화가지를 든 대세지보살, 보주에 석장을 든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모두 10명의 보살이 배치되었다. 이외에 노승 모습의 가섭존자와 젊은 승려 모습의 아난존자를 비롯한 10명의 제자가 묘사되었다. 다른 불화에 비해 본존의 비중을 작게 함으로서 다수의 권속들을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면서도 답답하지 않은 화면을 구성하였다. 
 

원만한 상호묘사와 균형 잡힌 신체묘사, 유려한 필치, 금니의 화문 등에서 동일한 화승이 제작한 1731년 수다사 영산회상도 및 삼장보살도와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채색은 적색과 녹청색, 군청색이 중심이 되었는데 전체적으로 붉은 색감이 많이 사용되었다. 상호와
신체표현은 신체에 비해 큰 방형의 상호, 몰린 듯한 눈, 코, 입, 옆으로 뻗쳐나가는 콧수염, 몸에 비해 크고 통통한 손과 발 등이 특징적이다. 광배는 연봉형 거신광으로 특히 광배 안쪽에 파도문처럼 문양을 내어 붉은색을 칠한 후, 백색안료로 윤곽선을 두껍게 칠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수다사 탱화와 공통된 표현으로 화사 도익의 특징으로 보인다. 18세기 전반 경상북도 지역 불화의 특징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량해회

정면 4칸, 측면 3칸의 겹처마 집에 전면과 남쪽에 마루를 놓고 양쪽의 중앙에 칸벽을 설치하여 몇 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요사이다.

 

 

화엄강당

극락전과 대웅전이 17세기에 중수되었는데 스님들의 강학공간인 화엄강당도 함께 중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건물 내부는 남쪽 2칸이 부엌, 북쪽 4칸이 온돌방으로 되어있으나 원래는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현재의 온돌방 뒤쪽으로 4칸의 마루가 깔려 있으며 부엌이 지금보다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평면 구성이 언제 오늘날처럼 바뀌었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려우며 1930년대 이후로만 짐작될 뿐이다.

 

 

석능(石能) 김두한(金斗漢).1913년

 

화엄강당.무량해회.덕휘루 편액도 석능의 글씨이다.

 

 

측면

 

 

후면

 

 

고금당

화엄강당과 더불어 조선 중기 건물이다.

자연적으로 쌓은 축대 위에 장대석으로 낮은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을 놓았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공포는 익공에 가까운 주심포계이며 가구는 고주가 없는 7량가이다. 정면 3칸에는 칸마다 2짝으로 된 띠살문을 달았다. 어간 문의 크기는 중앙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어 좌우의 띠살문보다 높이가 조금 더 크다. 측면과 뒷면은 모두 벽으로 막았고 뒷면의 좌우 협칸에 외문의 띠살문을 달았다.

 

 

 

측면 5량가.

 

 

삼층석탑

이층 기단의 삼층석탑으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탑이다.

 

하층기단

지대석위에 하대저석이 없이 중대석을과 갑석을 올렸다.

중대석에는 양우주, 탱주 2기, 안상과 귀꽃을 표현하였다.

 

상층기단

중석에는 양우주. 1기 탱주를 모각하였고, 감입식으로 결구하였다.

갑석 상부에는 각호각 3단 굄을 조출하였고 부연이 생략되었다.

 

탑신석

양우주만 새겼으며, 초층 남면에는문비와 자물쇠를 새겼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급하며, 전각 반전이 뚜렷하다.

층급은 전층 3단이며, 절수구는 생략하였다.

 

상륜부

노반 복발 앙화 보륜 찰주가 남아 있다.

 

 

 

지대석,하층기단

 

 

안상과 귀꽃

 

 

상층기단 중석,갑석

 

 

 

문비.자물쇠

 

 

탑신.옥개석

 

 

상륜

노반.복발 앙화 보륜 찰주

 

 

 

 

극락전

현존하는 우리 나라의 목조건축 중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건물이다.

극락전 해체 보수공사 때에 1625년(인조3)에 작성한 상량문을 발견하였다. 이 상량문은 '천계 5년 3월'에 중수하면서 작성한 공사 기록인데, '前中創至正 二十三年 癸卯 三月日'이라는 구절이 있다. 중창은 중창(重創)을 의미하며 지정 23년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께서 개창하였다고 상량문의 신라 때에 창건은 이를 가리킨다. 공민왕 12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은 이보다 오래 전에 이미 건물이 조영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3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갑석을 올리고 크기가 다른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4칸의 구조이다. 이 건물은 감실형으로 주벽이 토벽으로 밀폐되고 따로 낸 문얼굴에 널빤지 2장을 사용한 문짝을 달았고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광창이 있다. 공포는 외 1출목 주심포의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가구는 9량가인데 그 구성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병인 육월일 송파동몽 서

1386년 병인년(丙寅年) 송파(松坡) 동몽(童蒙)이 썼다.

안동 권씨 권행의 15세손 송파(松坡) 권인(權靷)을 말하며 동몽(童蒙)은 자신을 낮춰 부른 말이라고 한다

 

광서 팔 이모사월일 개채(1882년 색을 입혔다)

 

 

 

측면 9량가

납도리 2개, 굴도리 7개

 

 

소조아미타여래좌상.조선후기 추정

 

 

봉정사홈페이지에는 이동식 불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동식 불단?

 

 

 

아미타탱.1900년

 

 

광창

 

 

불단 측면

이 공간의 용도가 궁금하다.

 

 

연등천정

 

 

 

안정사석조여래좌상.통일신라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안정사에 있었던 불상으로, 대좌와 광배는 결실되었다.

나발, 육계가 육계(肉髻)가 표현되었고, 상호는은 풍만한 편이다. 결가부좌를 한 하반신을 높게 표현하여 안정감이 느껴진다.

왼손은 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배에 대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이다.

법의는 통견,승각기에는 띠매듭을 표현하였다.

 

결가부좌를 한 하반신을 높게 표현하여 안정감이 느껴진다.

 

 

 

 

 

 

 

 

영산암

 

 

 

 

영산암...김봉렬교수의 가람의 장면

 

-소나무 그늘에 담긴 미학-

법당과 마당 조화
분리-통합의 구조
禪이미지 물씬
영화‘달마가…’촬영지

이 시리즈는 우리의 불교사원에 대한 건축적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마련되었다. 흔히 불교건축이라 하면 수덕사 대웅전이나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은 목조 기와집 건물을 연상하게 된다. 물론 이들도 불교건축의 소중한 부분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들 건물만이 건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건축이란 오히려 건물과 건물들로 이루어지는 전체적인 공간적 관계다. 부석사가 아름다운 것은 무량수전 건물 한동 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건물들과 잘 조화된 관계, 더 나아가 웅대한 자연과 일체화된 석축과 건물들의 관계에서 오는 감동 때문이다.

이처럼 건축은 전체적이며 집합적이다. 건물은 건축의 부분일뿐, 건축의 전체가 아니다. 특히 한국의 가람들에서 건물은 하나의 방에 불과하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불당이며, 산신각은 산신탱을 모신 작은 방이자 건물이다.

방을 보고 건축이라 하지 않듯이, 대웅전이나 산신각 건물을 건축이라고 보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건축은 공간적이며 입체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고, 오로지 감흥과 분위기로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공간적 환경의 감동이 바로 건축의 힘임을 알게될 때, 우리 가람건축의 가치는 더욱 승화될 것이다.

때로는 대자연과 건축의 호흡법을, 때로는 창살 하나에 담겨진 장인들의 숨결을 읽어야 한다.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봉정사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목조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극락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추정하기로는 고려 중기인 12세기경에 건설된 것으로 학계의 인정을 받으니 벌써 900년의 세월이다.

기적적으로 보존된 이 건물의 구조미와 역사적 가치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지만, 순수하게 건축적으로 본다면, 그다지 완성도가 높은 건물이라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집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기둥들과 구조부재들은 매우 비경제적으로 보인다.

봉정사에는 극락전 외에도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대웅전, 조선중기의 승방인 고금당, 조선후기의 대방인 화엄강당 등 각 시대를 대표하는 건물들이 있어서 ‘살아있는 야외 목조건물 박물관’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

그러나 각 건물들의 시대적 차이는 전문가가 아니면 감지하기 어렵다.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주심포계-다포계-익공계의 전형적인 구조형식을 가진 건물들로 학술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지만, 일반인들의 눈에는 그저 나무 기둥 위에 기와지붕을 얹은 고만고만한 건물들로 보일 것이다.

건물들의 구조적, 건축사적 중요성보다 더 큰 봉정사의 매력은 천등산 줄기와 기막히게 얽혀있는 가람의 전체구조일 것이다. 옆으로 길게 펼쳐진 능선에 기대어 앉은 가람은 좌우로 두 개의 마당을 만들며 역시 옆으로 길게 펼쳐진다.

가람은 산 중턱의 높은 곳에 평지를 만들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입구에서 입구 누각까지는 촘촘한 수많은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계단의 폭 역시 옆으로 길게 펼쳐지기 때문에 급하다거나 위험스러운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시 봉정사 건축의 백미는 동쪽 능선 위에 자리잡은 작은 암자인 영선암이다. ㄷ자 모양의 승방건물로 감싼 마당에 작고 초라한 법당 두동이 놓여있을 뿐이다. 건물의 질도 본 절인 봉정사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엉성하고 빈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선암은 한국건축이 이룩한 최고의 공간이며 건축임에 분명하다. 이제는 건축을 보는 눈을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화려한 색상에 두지말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만들어지는 비어있는 공간에 둘 때다. 영선암의 경우 구체적으로 마당이다.

영선암의 마당은 아래 큰 마당과 위단의 작은 마당으로 이루어진다. 두 마당은 세단 정도의 계단으로 나누어져 있기는 하지만 워낙 작은 규모여서 한 눈에 잡힐만큼 붙어있기도 하다. 자칫하면 붙은 것도 분리된 것도 아닌, 어정쩡하고 애매한 마당이 되었을 것을 영선암에서는 분리와 통합을 동시에 획득하고 있다.

두 마당 사이에는 바위가 하나 놓여있고 바위사이에 자란 잘 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있다. 얼핏보면 원래부터 있었던 자연물인 것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인공적으로 그 자리에 심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소나무의 형태를 감상하기 보다는 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주목해야 한다.

이 그림자는 아래 큰마당과 위 작은 마당의 연결점에 절묘한 그늘을 만들고, 그 그늘에 의해 두 마당은 서로 분리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는 어디까지나 허상이다. 따라서 두 마당은 관념적으로만 분리되며 실제로는 항상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이처럼 분리와 통합, 실상과 허상을 동시에 획득하는 장치가 작은 소나무 한 그루라니 놀랍지 않은가?

영선암은 90년대초 전세계 영화계의 각광을 받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로케 장소로서도 유명하다. 선(禪)적인 모티브를 주제로 삼은 이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배용균 감독은 전국의 사찰을 누볐다고 한다. 감독의 눈에도 영선암은 선적인 이미지와 명상의 분위기로 가득한 곳으로 보였을 것이다.

선사가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킬 때, 미망의 제자들은 달을 쳐다보지 못하고 선사의 손가락만 본다고 했다. 봉정사 극락전의 건물에만 몰두하거나 영선암 건물의 초라함을 비웃는 것은 흡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쳐다보며 손가락이 길네 짧으네 평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영선암 마당의 한 그루 소나무 그림자를 보는 것은 바로 달의 위대함과 감동을 보는 것이다.

 

 

부도전

당호를 새기지 않은 조선후기 부도 3기가 있다.

 

 

부도(1)

 

 

 

 

 

부도(2)

 

 

 

 

보도(3)

 

 

 

 

 

어떤 이유에서인지, 부도전은 개방하지 않는다.

종무소에서도 위치를 알려주지 않아, 안동의 민해님, 장영주 교장선생님과 통화 후 뵈었다.

두분 께 감사드립니다.

 

2018.08.01

봉정사 홈페이지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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