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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남양주시

남양주...홍유릉

by 임병기(선과) 2019.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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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문 



홍릉洪陵


"홍릉은 제26대 고종(1852~1919)과 명성황후 민 씨(1851~1895)의 능이다. 고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익종의 비인 신정왕후 조 씨(조 대비)의 지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때 조 대비는 남편인 효명세자를 양부로 하고 자신을 모친으로 입적했다. 적통으로 왕위를 받았다는 서류 처리에 완벽을 기한 것이다.

고종은 조 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맡기고, 흥선대원군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했다. 조선 시대 역사상 살아 있는 왕의 생부는 흥선대원군이 처음이다. 그전에 있었던 덕흥대원군(선조의 생부)과 전계대원군(철종의 생부)은 모두 사후에 추증각주1) 된 대원군이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 씨는 민치록의 딸을 고종의 비로 천거했다. 대원군이 8세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란 민비를 왕비로 간택한 이유는 외척에 의해 국정이 농단된 3대(순조, 헌종, 철종) 60여 년의 김씨 세도 정치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고종이 친정을 하자 그녀는 민씨 척족을 활용해 강력한 쇄국 정치를 폈던 대원군에 맞섰다.


고종의 재위 시에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개화파와 수구파 사이가 악화되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 전쟁이 발발했으며 아관파천 등 근대 한국의 주요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고종은 1897년 주변 국제 관계의 영향으로 대한 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그전에 고종에게 씻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1895년 을미사변으로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된 것이다. 주한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을 경원하던 명성황후를 별기군 참령으로 봉직하던 우범선(우장춘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에서 시해하고, 시신은 경복궁 뒷산 녹원에서 불태웠다. 우범선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정국이 바뀌자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자객 고영근에게 살해된다.


경위가 어떻든 명성황후의 사망은 고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이어진다. 왕비조차 살해당하게 할 정도로 무능했기 때문에 조선 왕조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고종은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다방면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 밝혀졌다. 고종의 밀사이자 대한 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 역사학자 호머 헐버트는 "황제가 유약하다는 사람들은 틀렸다"라고 했다. 또 고종의 황제 즉위식 때 『독립신문』 1면 논설은 감격적인 희망을 장식했다.


"광무 원년(1897) 10월 12일은 조선 역사에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조선이 몇천 년 동안 청국의 속국 대접을 받은 때가 많더니 하나님이 도으사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드사 대황제국이 되었으니 어찌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요."

이런 기록에서는 한국인들이 흔히 알고 있는 무능한 왕이라는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다. 적어도 고종은 대원군의 도포 자락에 숨거나 명성황후의 치마폭에 휘둘리기만 한 어리석은 군주는 아니었던 것이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명성황후가 일제에 살해된 지 6개월 후 고종과 왕세자(순종)는 두 대의 가마를 타고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했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그리고 같은 날 고종은 온 백성들에게 선언한다.


"8월의 변고는 만고에 없었던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들이 명령을 잡아 쥐고 제멋대로 위조했으며 왕후가 죽었는데도 석 달 동안이나 조칙을 반포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생각하면 뼈가 오싹하고 말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나운 돼지가 날치고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얼게 된다는 경계를 갑절 더해야 할 것이다. 을미년(1895) 8월 22일 조칙은 모두 역적 무리들이 속여 위조한 것이니 다 취소하라."


명성황후를 폐서인으로 삼은 것은 황제의 뜻이 아니었으니 취소하라는 뜻이다. 아관파천으로 만든 좁은 틈새로 고종은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준비한다.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 개혁을 꿈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야심찬 의지가 있어도 고종 역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었다. 결국 고종은 순종에게 황제 지위를 물려주고 근대 개혁을 미완의 과제로 남긴 채 1919년 1월 덕수궁 함녕전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일제 강점기이므로 대한 제국 황제였던 고종의 장례는 황제의 국장도 아닌 왕족의 장으로 치렀는데 그마저도 7개월도 아닌 3개월로 했다. 처음에는 조선의 국장제인 '상례보편제'를 따랐는데 갑작스럽게 일제가 개입해 장례위원회를 도쿄 국내성에 두고 조선 총독부가 칙령에 따라 일본식으로 치르도록 했다. 이왕 직제로 이루어져 조선의 상왕제에 일본식이 가미된 특이한 장례였다.


고종의 능이 남다른 것은 명 태조의 효릉을 본떠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홍유릉은 왕릉이 아니라 황제의 능이다. 그러므로 홍살문으로 들어가는 우측에 조선 왕릉 중 가장 큰 연지(蓮池)가 있다. 조선의 왕은 천원지방각주2) 의 연못을 기본으로 했는데 이곳은 연못 전체도 원형이고 가운데 섬도 원형이다. 연못에는 부들과 연꽃 등 수생 식물이 자라며 원형의 섬에는 향나무, 소나무, 진달래 등이 식재되었다. 금천교 안쪽 좌측에는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이는 황제 능에만 있는 특이한 형태다.


정자각도 변형되어 중국의 황제 능처럼 일자 모양의 침전을 세웠다. 침전은 고종의 신위를 봉안한 제전이다. 침전의 기단 아래 홍살문까지 참도가 깔려 있는데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좌우보다 한 단 높게 마련된 중앙 길은 황제와 황후의 영혼이 다니는 길이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 두 단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 왕릉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옆이 한 단 낮은 삼단이다.


참도 좌우로 석물이 도열하듯 서 있는데 침전 가까이부터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 순서다. 이러한 배치는 기존의 왕릉과 크게 달라 참배객들로 하여금 이색적인 느낌이 들게 한다. 각기 좌우 1쌍인데 석마만 2쌍으로 다른 상에 비해 키가 작다. 문인석과 무인석도 다른 왕릉과는 다소 다르다. 문인석은 건릉, 수릉처럼 키가 크고(385센티미터) 머리에 금관을 썼는데 너무 매끈해 오히려 품격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문인석, 무인석, 석수가 모두 침전 앞에 있어 봉분 주위는 웅장한 침전에 비해 단출해 보이기도 한다. 능침만 보면 황제 능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소박하다. 그럼에도 현종 이후 보이지 않았던 12면 병풍석을 세우고 면석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았고 혼유석 1좌 양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이를 3면의 곡장이 둘러싸고 있다. 혼유석 앞에 작은 대석이 있는 것도 이채롭다.


고종은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사람이다. 대한 제국의 황제가 된 후 1910년 한일병합이 되자 이태왕으로 불리다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사망했다.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나돌아 국장일인 3월 1일을 기해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온 나라를 울렸던 백성들의 함성은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목소리인 동시에 황제를 애도하는 마음이었다. 고종의 능을 이곳에 만들면서 천장론이 일던 명성황후의 능도 모셔와 1919년 3월 4일 합장했다."


글 출처...[Daum백과] 홍릉 – 과학문화유산답사기1, 이종호,


 


홍살문

 


재실

 


 연지



수복방

 


일자각

신도. 어도

좌측 배위

 

 

 


일자각



내부

 


비각

 


어정

 

 

 

 


유릉

홍살문



유릉(裕陵)

순종과 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의 능


"조선 왕조 마지막 왕릉인 제27대 순종(1874~1926)의 유릉도 황제 능으로 조성되었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났고 광무 1년(1897) 대한 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가 되었으며 1907년 일제의 강요와 모략으로 고종이 물러나자 황제가 되었다.


순종은 일본의 꼭두각시로 변한 친일파들에 의해 전혀 힘을 쓰지 못하다가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의 주재로 열린 어전 회의에서 한일병합 조약 조인을 거쳤는데 문제는 황제인(옥쇄)의 날인이었다. 순정효황후 윤 씨(1894~1966)가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 성향의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 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옥새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는데, 결국 큰아버지 윤덕영이 강제로 빼앗고 날인해 조선 왕조는 멸망한다.


순종은 이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다가 1926년 사망했는데, 장례는 도쿄의 국내성에서 주관해 일본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황제 장이 아니라 이 왕가가 진행하는 형식이었으며 장례 기간도 조선 왕조의 국상인 6개월이 아니라 한 달 반으로 짧게 했다.


순종의 하관일인 1926년 6월 10일은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고종의 장례 일에 3·1운동이 일어났듯 국부를 잃은 국민의 슬픈 감정이 독립 운동으로 결집되어 폭발했지만 대세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순명효황후 민 씨(1872~1904)는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딸로 1897년 황태자비가 되었으나 순종 즉위 전에 사망해 지금의 서울 능동 어린이공원에 모셔졌다가 순종 사망 후 천장했다.


순정효황후는 1904년 당시 황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 민 씨가 사망하자 1906년에 13세의 나이에 동궁 계비로 책봉되었고, 1907년에 순종이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황후가 되었다. 순종의 지위가 이왕으로 격하되었으므로 그녀도 이왕비가 되어 창덕궁 대조전에 머물렀으며 1926년 순종이 사망하자 대비로 불리며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인민군이 궁궐에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자 56세의 나이에도 크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고 할 정도로 두려움을 모르는 여걸로 알려진다. 만년에 불교에 귀의해 슬픔을 달래다 1966년 72세로 창덕궁 석복헌에서 사망해 유릉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순종의 능묘는 현재도 많은 구설수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릉이 명당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풍수지리상 매우 나쁜 자리에 있다고 한다. 장남식 선생의 유릉에 대한 평은 다음과 같다.


"유릉은 혈처가 아닌 내룡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장서(葬書)』에서 말하는 장사를 지내서는 안 될 산 가운데 하나가 이와 같은 '과산(過山)'이다. 또한 혈처 앞이 낮은 언덕으로 되어 있어 흉지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역룡(逆龍)'에 해당한다."

조선 왕조를 일본에 빼앗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황제로 불린 순종인데 왜 이러한 흉지에 안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이 부분에 관해 많은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음모론을 펼친다. 흉지에 매장해 후손을 절손하고, 조선의 부흥을 꿈도 못 꾸게 하려는 일제의 음모라는 것이다.


누가 그런 음모를 꾸몄을까라는 질문에 김두규 박사는 일본 총독부만의 작품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제가 조선 황실의 후손이 번창하는 것을 막았을 수도 있지만 당시 일본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있던 조선의 일부 대신이나 귀족 역시 한몫했을 거라는 설명이다. 풍수지리상 좋지 않은 곳에 장지를 선택한 것은 여러 집단의 묵계각주1) 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길지든 아니든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매장되어 있는 유릉은 유일한 동봉삼실 합장릉이다. 황제와 황후 2명의 현궁이 함께 있는 능으로, 이제까지 지켜졌던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제일 왼편에 황제의 재궁이 있어야 하나 이곳은 다르다. 중앙 순종, 우측 순정효황후, 좌측 순명효황후의 재궁을 두어 기존의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이는 중국 황제 능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릉은 능침, 침전, 홍살문 등이 직선형으로 배치된 홍릉과 달리 능침 공간과 제향 공간의 축이 각기 다르게 배치되었다. 그러나 홍릉과 같은 황제 능으로 조성되었으므로 홍릉에 비해 능역의 규모가 다소 좁지만 석물은 홍릉에 비해 사실적이다.

순종의 능역을 조성하는 산릉주감은 조선인이었지만 실무자는 도쿄대 교수이면서 메이지신궁 등을 지은 일본인 건축가 이토 주타였다. 일본인들은 유릉의 석조물을 일본식으로 조각하기를 고집했다. 1927년 6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유릉의 침전 앞 석물을 조성하는 과정을 기록한 기사가 실렸는데, 일제가 처음부터 조선의 전통 기술을 무시하고 문화를 짓밟으려 한 의도를 금방 파악할 수 있다.


"모형을 신라 시대부터 이어온 조선식에 근대 일본식을 가미한 절충식으로 한다고 했으나 그 후 이와 반대되는 순일본식으로 하자는 의견이 높아져 드디어 순일본식으로 해 짐승의 다리를 앙상하게 내어놓고 선을 일본식으로 하고……고종제의 황릉 앞 석물은 중국식을 가미한 것으로 졸렬하고 조선 말기의 작품으로 장래에 좋은 사실을 남기기 위해 홍릉을 지척에 두고 전연 딴 취미의 석상을 만드는 것이란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이들 석물은 예리하고 사실적인 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이창환 교수는 이것은 유럽의 조각 기술을 도입해 석고로 본을 떠 만드는 새로운 기술을 시험해본 결과라고 혹평했다. 서구의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시험적으로 도입하면서 일본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적 행위인데, 조선이나 중국의 문화는 쇠퇴하고 일본의 문화가 앞서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속셈이라는 것이다.


문·무인석은 현대적인 조각법을 인지한 조각가가 제작한 듯 정교하고 세밀하기는 하나 근거 없는 유럽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표정도 없다. 문인석은 눈망울도 없다. 마치 앞 못 보는 사람을 표현한 것 같은 인상이다. 다른 것은 사실적으로 조각하면서 그렇게 조각한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지적도 있다.


일자형의 침전 안에는 원색의 단청과 천정에 두 마리의 용이 그려진 용상이 화려한 무늬와 선명한 색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유릉의 능역 내에는 두 기의 어정이 비교적 잘 남아 있지만 금천 주변의 어정은 둘레석만 남아 있다.


재실은 홍릉과는 달리 좌우 동형의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황제 능답게 일반 왕릉에 비교해 매우 화려하다. 유릉의 비각 안 비석에는 비문이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출처...[Daum백과] 유릉 – 과학문화유산답사기1, 이종호


어정

 


일자각

신도.어도

배위

 

 

 


일자각

 


비각

 


홍릉

 


2019.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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