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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남양주시

남양주...운악산 봉선사

by 임병기(선과) 2019.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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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

969년 고려 광종 20년에 법인 국사께서 창건하고 운악사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서기 1469년, 조선 예종 1년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세조의 능침을 이산에 모시고는 광릉이라하고, 이어 당사를 초창하여 선왕의 능침의 명 복을 비는 자복사로 삼고 봉선사라 하였습니다. 낭혜대사(1539년)의 뒤를 이어 계민선사(1637년)가 중건하고, 1749년과 1848년에 다시 중수해 고아하고 장중한 대찰의 면모를 되찾았으나 오늘의 봉선사는1960년 무렵부터 재건불사를 일으킨 가람의 모습입니다.


운악산 봉선사

현판은 운허耘虛스님의 글씨입니다.


 

부도전


 

운허당대종사

"속명은 학수(學洙), 법호는 운허(耘虛.1892~1980))이며 법명은 용하(龍夏)이다. 청년기에는 일제의 침략에 당당히 맞선 항일투사, 종교인으로서는 불경의 번역가, 교육자로서는 후학의 양성에 전념한 분이셨다.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으로 어린 시절 고향의 회헌재(會軒齎)에서 사서(四書)를 비롯한 한문고전을 배우고, 1909년 10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평양대성학교에서 2학년까지 수학하였다. 1912년 1월 만주로 건너가 봉천(奉天)에 있는 한인교포학교 동창학교 교원으로 재직했고, 이해 6월부터 배일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배일정신을 고취하였다. 1914년 3월부터는 봉천성 홍유자 흥동학교를 설립해서 교포아동교육에 전념하였고, 1917년 4월부터는 배달(倍達)학교를 설립하여 1919년까지 교포아동의 교육을 실시했다.3·1운동 직후 4월부터 12월까지는 독립군정기관지인 한족신보(韓族新報) 사장에 취임하여 신문을 간행하고, 1920년 2월에는 독립운동기관인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해서 활동했다. 국낸단체와의 연계를 위해 비밀리에 잠입했다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강원도 봉일사(鳳逸寺)로 은신했다.


1921년 5월 경송(慶松)스님을 은사로 강원도 고성군 유점사에서 득도(得度)했으며, 6월부터 12월까지 유점사에서 불교초등과를 이수하고 서기를 맡아보았다. 3·1운동 직후 4월부터 12월까지는 독립군정기관지인 한족신보(韓族新報) 사장에 취임하여 신문을 간행하고, 1920년 2월에는 독립운동기관인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해서 활동했다. 그 뒤 국낸단체와의 연계를 위해 비밀리에 잠입했다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강원도 봉일사(鳳逸寺)로 은신했다. 1921년 5월 경송(慶松)스님을 은사로 강원도 고성군 유점사에서 득도(得度)했으며, 6월부터 12월까지 유점사에서 불교초등과를 이수하고 서기를 맡아보았다. 1924년 동래 범어사에서 사교를 이수했고, 1926년 청담스님과 함꼐 전국불교학인대회를 서울 안암동 개운사에 개최하여 학인연맹을 조직했다. 1929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봉천 보성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였고, 1930년 9월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여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동했다. 1936년 경기도 봉선사에 홍법강원(弘法講院)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노력했다. 해방 후 경기도 교무원장이 되었고, 46년 4월 광동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했다.


1953년 애국동지원호회에서 『한국동립운동사』를 편찬하는 일에도 참가했다.운허스님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춘원 이광수와의 인연이다. 운허스님과 춘원은 6촌간으로 어린시절 같이 공부하면서 자라났다. 이광수가 친일변절자의 오명과 아들 봉근의 죽음 등으로 괴로워할 때, 『법화경』을 소개해주어 불교의 세계로 인도해 주었으며, 감명을 받은 춘원이 '법화행자'의 길을 걷도록 조력해주었다. 불경을 번역하는 것을 평생의 원력으로 삼고 1964년 동국역경원을 설립하여 초대원장이 되었다. 1961년 국내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찬했고, 1962년 종교인으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훈장을 받았고, 1978년 동국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1980년 11월 18일 봉선사에서 속랍 89세, 법랍 59세로 입적했다. "(봉선사 홈)


 

춘원 이광수 기념비

운허스님과 친척으로 봉선사 홈페이지에 관련 글이 실려 있습니다.

"운허스님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춘원 이광수와의 인연이다. 운허스님과 춘원은 6촌간으로 어린시절 같이 공부하면서 자라났다. 이광수가 친일변절자의 오명과 아들 봉근의 죽음 등으로 괴로워할 때, 『법화경』을 소개해주어 불교의 세계로 인도해 주었으며, 감명을 받은 춘원이 '법화행자'의 길을 걷도록 조력해주었다."


 

승과원 僧科園

"명종6년(1551) 봉선사가 교종갑찰敎宗甲刹로 특선 되었다.교종갑찰이란 전국 승려들의 교학능력을 평정하는 곳으로 일종의 승려들의 과거장이다. 명종7년(1552) 승과가 열리니 서산, 사명 같은 고승께서도 응시하였다고 한다.그 간 구전되어 오던 과거장, 승과평僧科坪 자리를 주변 원지園地와 더불어 승과원이라 이름 짓고 불기2553년(서기 2009년) 7월에 이 표석을 세운다

봉선사가 교종 수사찰首寺刹이 되는 것은 명종이 등극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불교 부흥 정책을 전개하면서 비롯됐다. 명종6년(1551) 6월25일에 문정왕후는 보우普雨를 판선종사도대선사봉은사判禪宗事都大禪師 奉恩寺 주지로, 수진守眞을 판교종사도대부判敎宗事都大師 봉선사 주지로 임명하고 각각 선종과 교종을 총괄토록했다.봉은사를 선종의 수사찰,봉선사를 교종의 수사찰로 정하고 승과를 부활하여 선교 양종의 인재를 시험보아 뽑으라고 명령했다.

식년시와 증광시에 모두 승과를 보이게 하니 명종7년(1552) 임자 무오시 壬子 式年試부터는 봉은사에서 선종시를, 봉선사에서 교종시를 보여 인재를 가려 뽑기 시작했다."(Daum)


 

하마비

1469년 세조의 위패를 어실각에 모시고 중창불사를 하면서 세웠다고 합니다.


 

봉선사 느티나무

정희왕후가 심었다고 전합니다.

 


괘불지주

안내문에는 당간지주로 표기되어 있으나, 짝을 잃은 괘불지주 입니다.

회암사지에도 동일 한 형태의 괘불대가 있습니다.

 

 

 

범종루

 


봉선사 동종(銅鐘)

종뉴는 두 마리 용이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하고 있으며,  음통(音筒)은 여타 조선 종 처럼 없습니다.

종견(鐘肩)에는 단엽복판연화문을 조식하였고, 종견 아래에 횡대를 돌려서 종신과 구분 지었습니다. 종신 중앙에는 세 줄 횡대를 돌려 상하를 구획하고 윗부분에는 유곽과 보살상을 배치하였습니다. 유곽은 종견의 횡대에서 분리되어 정사각형 구획 안에 돌기된 9개의종유가 돌출되어 있습니다.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다. 또한 상하에  범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종신 하부에는 명문이 있으며, 아래에는 파상문을 새겼습니다.

명문은  강희맹(姜希孟)이 찬(撰)하고 정난종(鄭蘭宗)이 쓴 것으로 종을 조성한 연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명문에 의하면  성화오년(成化五年.1469년)에 정희왕후가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봉선사를 세울 때 함께 주조하여 봉안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종뉴,종어깨

 

 

종신

 

 

조성 명문. 파상문

 

 

 

청풍루

이층 누대로 큰법당을 마주하는 배변에는 설법전 현판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초 김응현의 작품 입니다.

 

 

대의왕전

약사여래를 모셨습니다.

 


큰법당

조선 예종 1년(1469)으로, 89칸의 절 규모와 함께 서울 이북에서 가장 크다고 전해졌으며, 1637년 계민(戒敏)선사에 의해 중창, 1970년 운허스님에 의해 건립된 현 전각으로, 스님의 뜻에 따라 '큰법당'이라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소맷돌

 


큰법당

운허큰스님께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경전을 한글번역작업을 하신 분이어서 큰법당 현판을 걸었습니다.

 

법당 편액 글씨는 운봉(雲峰) 금인석(1921~92) 작품입니다.

포항 출신으로 도쿄대 경제과와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한 운봉은 고등고시(행정과)에 합격, 국회 재경위 전문위원까지 역임한 관료 서예가라고 합니다.

 

큰법당주련

온 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 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

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

부처님 공덕 다 말 못하고.

 

화엄경에 있는 보현보살의 게송을 운허스님이 한글로 옮겼으며, 석주(昔珠) 스님(1909~2004)의 글씨라고 합니다.

 

 

석가여래 삼존

 


지장전

어실각(御室閣)으로서 세조대왕과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셨던 건물

1999년에 복원하여 지금은 지장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실각(御室閣)으로 인해 봉선사 주지는 조선왕실로부터 봉향판사(奉香判事)의 작위를 수여받았습니다.

 

 

어실각

현판 글씨는 봉선사 주지. 조실을 지냈던 월운(月雲.1921~)스님 글씨 입니다.

을묘(乙卯)는 1975년으로 추정 됩니다

 

 

지장보살.시왕

 


방적당放跡堂

스님들이 어느 단계의 수행을 마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더 낳은 수행을 준비하는 곳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당우라고 합니다.

(현재는 능엄학림 스님들의 교육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운봉(雲峰) 금인석(1921~1992년)

큰법당 현판 글씨를 쓴 분 입니다.

 

 

보운당報雲堂

참배를 마치고 돌아 나오다 뵈었습니다.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후기 부도로 추정되며, 일주문 밖에 위치합니다.

 

 

봉선사는 첫 인연이었습니다.

좀 더 여유롭게 돌아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201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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