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보은군

보은...속리산 중사자암

임병기(선과) 2019. 3. 31. 08:29
300x250
300x250

 

 

 

복천암

문장대 오르는길

땀 서너번 훔치고 속세의 풍진을 털어 낼 즈음 모퉁이 돌아서니 중사자암이 객을 맞이한다.

 

 

중사자암 中獅子庵

창건은 신라 성덕왕 19년(720년) 의신조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사찰의 초창과 고려조에 대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사찰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중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지도서에 의면 “중사자암은 현 동쪽 35리 속리산 아래에 있다. 원종대왕 원당宗大王 願堂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원종은 선조의 아들로서 조선의 16대왕인 인조의 아버지이다. 원래 정원대원군이었으나 인조 즉위 후 왕으로 추존된 분이다. 따라서 중사자암은 인조의 지원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중사자암은 인조 19년(1641년) 에 창건되었는데 이때 인조의 형인 능원대군과 능창대군의 청에 따라 지선(智禪)스님이 일을 감독하고 낙성일에 능원대군이 용화에 있는 전답을 절에 희사했다고 한다.

 

능창대군은 1615년 광해군 시기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능창대군에 의했다기 보다는 그 가문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이후 영조 33년 (1757년)에 중사자암을 중수하였는데 명례궁으로부터 궁감 이수창과 주지 현익에게 감독하도록 하였다하며 또 헌종 3년(1837년) 총섭 하운을 파견하여 다시 중수했다고 한다.

 

이후 고종 24년 (1887년) 중사자암을 다시 크게 중수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 등 사회의 혼란과 더불어 사찰은 일시 폐사되게 되었다. 기존에 화려했던 전각들은 모두 폐허로 변했다.현재의 중사자암은 1957년 새롭게 건립한 것이다. 이후 1985년 종현스님이 사찰을 중수했으며 1986년에는 삼성각을 새롭게 건립했다.(다음 백과사전)

 

현재는 20여년 전 부터 지륜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목조여래좌상

자료에는 조선후기로 비로자나불로 설명하고 있으나 지륜스님은 일제강점기 김복진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김복진이 법주사 미륵불(시멘트) 봉안할 때 조성한 불상으로 추정)

법주사 극락전 불단 아래에 있던 불상을 모셔왔다고 한다.

 

 

충청지방에서는 흔치 않은 수인이 드러나지 않은 부처이다.

 

 

석조여래좌상

일견 경주불석으로 보았으나 스님께서는 아니라고 하시며 앞서 주석하였던 스님이 봉안한 불상으로 조선후기로 추정되나 이력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신중탱화

세존강생 2937 世尊降生 2937(1910년)

 

 

속리산중사자암원납비 俗離山中獅子庵願納碑.1742년

(사찰문화재총람)

 

어떤 분의 중사자암 불사와 관련 시주 내력을 새긴 비석으로 보인다.

사찰에 비석을 세울 수 있는 층은 왕실 외에 있었을까?

따라서 인조를 비롯 왕실과 관련된 인물의 원납기록으로 생각되지만 조성시기가 그 이후이어서 단정하기 어렵다.

 

 

너럭바위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암대(巖臺)로 기술하였다.

 

 

산중일기

 

중사자암 지륜스님

반갑게 맞이해주시며 차와 더불어 짧은 시간 긴(?) 대화를 나누었다.

 

법당 가득한 불경과 서책 때문에 꼿꼿한 학승으로 생각되었지만 소탈하기 그지없는 분이었다.

 

스님은 몇 년전 방문한 분이 산중일기에 중사자암이 등재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구입해 읽었다고 했다.

나도 읽었지만 중사자암 관련 글은 기억조차 없었다.

이번 속리산 폐사지 답사 후 다시 꺼내보니 글을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참.

스님께 산중일기를 소개한 분이 오랜 지인인 대전 거주하는 안병기(닉:늑대별)님이 었다.

 

정시한. 산중일기. 1686년 10월 10일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씻은 다음 옷을 갖추어 입고 영천에 있는 가묘를 향해 참배했다. 홍연스님이 아침을 차렸다. 설제스님이 일찌감치 와서 만났다. 대왕암을 떠나며 설제, 운밀스님과 작별했다. 성희스님이 옷가지와 식량을 지고 따라왔다. 중사장암에 도착했는데 절의 스님은 모두 나가고 단지 상좌 차현스님만 있다.  뜰 앞에는 암대가 있어 올라가 도량을 두루 살펴 보았는데 다른 암자와 특별히 다른 점은 없다. 잠시 앉아 감상하다가  차현 스님더러 짐을 지게하고 다시 출발하였다 고개를 넘어 상자암을 바라다보니 공허해보인다(하략)"

 

 

 

 

 

석탑 갑석

스님은 대암암지 석탑 부재로 설명하셨다.

 

 

 

 

 

 

 

다담을 나누시던 지륜스님께서 중관음암지(대암암지)를 직접 안내하겠다면 앞장 선다.

 

귀인

나의 답사길, 인적이 있을 수 없는 산속에서 여러번 조우한 경험이 있다.

오늘도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스님이 아니었다면 중,하관음암지 순례는 언감생심 꿈 꿀 수 없는 곳아었다.

 

 

중사자암 해암당(海巖堂) 부도

우리카페 오분향님 사진 외에 어떤 자료에도 기록되지 않은 부도 이다.

행장을 찾을 수 없었으나 조선후기 영조 재위시 사세가 번창할 즈음에 중사자암에서 한 세월 지낸 스님이었을 것이다.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언급되지 않았다.

 

 

대석 위에 한 돌로 탑신,옥개석.보주를 올렸다.

 

 

 

해암선은지탑海菴禪隠之塔

 

 

옥개석과 보주

둥근 장독 뚜껑 같은 옥개석은 익숙하지 않다

그것도 탑신과 일석으로 조성된...

 

 

보주 받침 위에 연화보주를 일석으로 올렸다.

 

 

 

 

인연

난 지독하게 신봉한다.

 

중사자암 지륜스님

그런 분으로 오래 가억 될 것 같다.

 

()()()

 

 

중사자암...권상하(權尙夏, 1641~1721)

 

답진선산만수춘 踏盡仙山萬樹春 일만 나무 선산의 봄 두루두루 밟으니 
냉풍표산만의진 冷風飄散滿衣塵  옷에 찌든 티끌이 찬바람에 흩어지네 
암문소로초제근 巖間小路招提近  바위 사이 오솔길 절간이 가까우니 
임외해향인인    林外淸香解引人 수풀 밖의 맑은 향기 사람을 당기네 

(초제 招提:해석이 되지 않았으나 검색해보니 사액한 절을 칭한다)

 

2019.03.28

 

300x250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