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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정사孤峯精舍 정사는 명망 높은 선비가 벼슬길에 나서지 않거나 또는 벼슬을 하다가도 향리나 경승지에 은거하면서 학생을 뽑아 학문과 수신의 도를 가르치던 교육 기관이다. 고봉정사는 조선 중기 김정이 학문을 연마하고 즐기던 곳에 최수성이 고봉정을 세웠다. 이름은 김정이 삼파연류봉을 고봉이라고 하고 올라가 즐긴데서 비롯되었으며,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이후에는 구수복이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 뒤 정자가 낡자 구수복의 5세손인 구일봉 봉우리 아래로 옮겨 지으면서 지금의 건물로 세웠다 한다. 김정(1486∼152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고봉(孤峯). 1507년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고, 수찬(修撰)·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옮겨졌다. 이어 병조정랑·부교리(副校理)·헌납(獻納)·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이 때 왕의 구언(求言: 정치에 도움이 되는 말이나 글)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 때 권민수(權敏手)·이행(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히 다스릴 것을 주장한 반면,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이에 반대했고, 조광조(趙光祖)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간 사이에도 대립이 생겼고, 둘 다 옳다는 설까지 제기되었다.1516년 석방되어 박상과 함께 다시 홍문관에 들고, 권민수와 이행의 파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곧 중앙 정계에서의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 뒤 응교(應敎)·전한(典翰)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司藝)·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그 뒤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1545년(인종 1) 복관되었고,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수학하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최수성(崔壽峸)·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시문에도 능했으며 새·짐승 등의 그림도 잘 그렸다.일찍이 사림 세력을 중앙 정계에 추천했고,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다. 그 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세력 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다.또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 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 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추진하였다. 제자로는 김봉상(金鳳祥)·김고(金顧)·최여주(崔汝舟) 외에 조카인 김천부(金天富)·김천우(金天宇) 등이 있다.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암집(冲菴集)』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이다.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최수성(1487∼1521)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가진(可鎭), 호는 원정(猿亭)·북해거사(北海居士)·경포산인(鏡浦山人). 치운(致雲)의 증손자로 생원 세효(世孝)의 아들이다.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배출된 신진사림파(新進士林派) 학자로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교유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친구들이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아예 포기하고 술과 여행, 시서화(詩書畫), 음악으로 일생을 보냈다. 1521년 35세 때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남탄현(南炭峴)에 집을 마련해서 원숭이를 길들여 함께 살았으며 원정이라는 아호는 그 것에서 연유하였다. 젊어서부터 세속을 멀리하여 명산승경을 유람하며 술과 거문고, 시를 즐겼고 뜻이 맞는 교우들과는 만남에서 화흥(畫興)을 폈다.문장·시·서화·음률이 모두 뛰어난 절세의 기재(奇才)로 평가되었으나 유작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인종 때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강릉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구수복(1491∼1535)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백응(伯凝)·정지(挺之), 호는 병암(屛菴)·수재(睡齋) 1510년(중종 5)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51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부정자(副正字)에 제수되었다가 곧 검열에 천거되었고, 주서(注書)·부수찬(副修撰)·정언(正言)·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밤, 재상들이 예문관 관원을 파직하기를 청하였을 때 이조좌랑으로 패초(牌招: 왕명을 받은 승지가 그 명령을 패에 써서 당사자에 전함)를 받고 대궐에 이르러 “만약 사관을 다 파면하면 오늘날 기주(記注)는 누가 담당해 닦으오리까.” 하며 항의한 바 있다. 또한, 조광조(趙光祖) 등을 치죄할 때 왕이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성운(成雲)을 승지에 임명하자, 그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는 등 사림파의 성향을 띠어 파직되었다. 1533년 가을에 이준경(李浚慶) 및 아우 구수담 등의 힘으로 구례현감으로 서용되었으나, 재직중에 죽었다김정(金淨) 등과 도의(道義)로써 사귀고, 경학(經學)에 몰두하여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성품은 겉으로는 온화한 듯하면서도 안으로는 강의(剛毅: 강건하고 굳셈)하여 모든 의롭지 않은 일에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남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인물 자료/다음백과사전) 삼문 아침 이른 시간 문이 닫혀 있었으나 다행이 담장이 낮아 정사를 촬영할 수 있었다. 고봉정사 현판 우암 송시열의 작품이라 한다. 팔작지붕 측면 산고수장 山高水長 고봉사 고봉사 현판 최수성의 후손인 최규하 대통령 작품이라 한다. 능성구씨 보갑 석조보갑(石造譜匣)은 전쟁을 비롯하여 족보, 선조들의 유고(遺稿) 등을 보관하기 위하여 지하에 매몰할 수 있도록 제작된 석함을 이른다. 실제로 고봉정사에 전하는 구씨가승 목판(具氏家乘 木板)은 구봉서(具鳳瑞)가 1640년(인조 18) 10월에 제작한 것으로 고봉정사 내 능성구씨 보갑에 보존하였다고 전한다. 석조 보갑은 흔치 않은 유물로 인근 불목리 기계유씨 문중에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장 탐문 결과 예전에는 마을 중앙 영모재에 남아 있었다고 하여 찾아 보았지만 발견하지 못했고, 행방을 아는 주민이 없었다. (오전 9시 이전이어서 주민들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느낌이었다) 우리나라의 보갑(보실), 족보 바위 https://cafe.daum.net/moonhawje/MebK/341 2019.9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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