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암암지(중관음암지) 문화재청발간 한국의 사지에는 중관음암지로 기술하고 있다.
"中觀音庵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法住寺事蹟記』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의 기록인 『俗離山大法住寺事蹟記』에 ‘中觀音’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중반 이전에 폐사되었다가 19세기 경에 중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래에 언급하겠지만 중관음암지는 17세기 말에도 운영되고 있었다.
중사자암 지륜스님 중관음암지는 찾을 수 없다면서 직접 안내해주셨다. 우리역사. 문화유산에 해박하였으며, 속리산 폐사지의 불적을 꿰뚫고 계셨다.
성큼성큼 어찌나 발이 빠른지, 무협지에 나오는 축지법이 떠오르는 행보였다.
대암(외톨바위)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도 기록된 바위
1686년 10월 6일 대암암 영자전 影子殿 (스님 영정이 모셔진 전각?)
(상략) 다시 4~5리를 가니 등에 땀이 흥건히 흘러내리고 다리가 몹시 피곤하여 겨우 대암암에 닿았다. 갓같이 생긴 커다란 바위 하나가 절 앞에 서있고, 그 앞과 좌우에도 커다란 바위 아닌게 없으니 대암암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축대와 계단을 높게 쌓았고, 법당이나 요사도 매우 큰 절이다.높고 너른 곳에 자리하고 있어 법주사나 여러 봉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다(하략)
축대 1960년대 다시 쌓았으나. 국립공원내 거주자 소개 정책 때문에 폐쇄 되었다고 한다.
사지 부도 앞쪽에도 사지 전각터가 남아 있다.
와편
도자편
맷돌
부도에 대해서는 정시한의 산중일기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정시한 산중일기 1686년 10월 6일.대암암 영자전
(상략) "설제(雪齊). 운밀(雲密) 두 종장이 학도 수십인을 이끌고 7월에 황학산에서 옮겨왔다고 하는데 이 두분은 모두 임신생(1632년)이다 난간 앞에 앉아서 오랫동안 부채를 부치며 땀을 말렸다.스님 한 분이 방문을 열고 인사하고 돌아갔고 다시 한분이 나와서 맞아주는데 그 행동거지와 용모가 다른 스님과 다르다. 이름을 물어보니 운밀이라고 한다.설제 스님도 다른 방에서 왔는데 그 모습이 밝고 뛰어나고 태도도 진실하다.(중략) 영자전의 주인인 홍연스님은 출타 중이고 성희 스님이 맞아 주었으며 두 분 종장도 역시 왔다 갔다."
정시한은 대암암에서 한국선맥의 큰 스님인 50대 중반의 월담 설제스님과 그의 제자 환성 지안을 만났다.
월담 설제 月潭 雪霽(1632~1704) "성은 김씨(金氏). 호는 월담(月潭). 창화(昌化) 출신. 13세에 설악산으로 출가하여 숭읍(崇揖)의 제자가 되었고, 16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동문(同門)의 벗인 일여(一如)와 함께 보개산(寶蓋山)의 설청(說淸)에게서 수학(修學)하다가 다시 영평(永平)백운사(白雲寺)의 풍담(楓潭)을 찾아갔다.
풍담은 그의 사람됨을 알고 지극한 정성으로 가르쳤으며 그에게 법(法)을 전수하였다. 그 뒤 금강산과 묘향산 등지의 유명한 사찰에서 선교(禪敎)의 종지(宗旨)를 강설하였고 문예도 익혀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다.
특히 『화엄경』과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좋아하여 입에서 외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후학을 지도하여 그 깊은 뜻을 얻은 이가 수백에 이르렀다 한다. 대부분 금강산정양사(正陽寺)에 머물렀으며 만년에 금화산(金華山)징광사(澄光寺)로 옮겼다.
이때부터 산문 밖을 나가지 않고 후학들의 지도에만 전념하였는데, 그로 인해 호남지방에 경교(經敎)가 크게 천명되었다. 1704년 문인들을 모아 임종계(臨終偈)를 남기고 입적(入寂)하였다. 화장 후 사리(舍利) 2과가 나왔는데 징광사에 탑비를 세웠다."(다음 백과사전)
그의 법맥은 청허 휴정(淸虛休靜) 편양 언기(鞭羊彦機) 풍담 의심(楓潭義諶) 월담 설제(月潭雪霽) 환성지안 (喚惺志安)으로 이어진다.
(보성 징광사지.월담대사 탑비 귀부,이수)
정시한 산중일기 1686년 10월 9일.대암암
{상략) "식후에 뜰을 거닐다가 설제 스님 방에 들어 갔다.스님은 문도를 이끌고 불경을 강학하고 계셨는데 그 가운데에는 지안(志安) 스님도 보인다. 나이는 스물 세살이다. 용모와 행동거지가 출중한데다 문장에도 능하니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지 헤아리기 어렵다"(하략)
환성 지안 喚惺志安(1664~1729년) "강원도 춘천 출신. 성은 정씨(鄭氏). 호는 환성(喚惺), 자는 삼낙(三諾).15세 때 미지산 용문사(龍門寺)로 출가하였고, 정원(淨源)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7세 때 설제(雪霽)를 찾아 법맥(法脈)을 이어받은 뒤, 침식을 잊고 경전(經典)을 연구하였다. 1690년(숙종 16) 모운(慕雲)이 직지사(直指寺)에서 법회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했는데, 모운이 수백 명의 학인(學人)을 그에게 맡기고 다른 곳으로 떠나갔으므로 뒤를 이어 그들을 지도하였다.
그의 강연은 뜻이 깊고 묘하고 특이한 것들이 많았으므로 의심을 품는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육조대사(六祖大師) 이후의 여러 주석서(註釋書)를 실은 빈 배가 전라도 낙안의 징광사(澄光寺) 부근에 왔는데, 그 주석서들의 내용이 지안이 말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므로 모두가 탄복하였다.
그 뒤 전국의 명산을 순력하고 지리산에 머물렀는데, 어떤 도인이 다른 곳으로 갈 것을 명하여 급히 옮기자, 며칠 뒤 그 절이 불타 버렸다. 또, 금강산정양사(正陽寺)에 머물다가 큰 비가 쏟아지는 날 절을 떠났는데, 도중에 한 부잣집에서 자고 갈 것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오두막집에서 잤다. 그날 밤 정양사와 그 부잣집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
1725년(영조 1)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대법회(華嚴大法會)를 열었을 때 학인 1,400명이 모여 강의를 들었다. 1729년 법회관계의 일로 무고를 받아 호남의 옥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으나, 반대 의견 때문에 다시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도착한 지 7일 만에 병을 얻어 입적하였다. 입적할 무렵, “산이 사흘을 울고 바닷물이 넘쳐 오른다(山鳴三日, 海水騰沸).”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나이 65세, 법랍 51세였다. 전라남도 해남대흥사(大興寺)에 비가 있다.
임제종(臨濟宗)의 선지(禪旨)를 철저히 주창한 선사였으며, 조선 후기 화엄사상과 선을 함께 닦는 전통을 남긴 환성문(喚醒門)의 시조이자 대흥사 13대종사(大宗師)의 1인으로도 숭봉되었다.
법맥은 휴정(休靜)-언기(彦機)-의심(義諶)-설제(雪霽)-지안-체정(體淨)-상언(尙彦) 등으로 연결된다. 저서로는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 1권과 『환성시집(喚惺詩集)』 1권이 현존한다."(다음 백과사전)
대암암지 부도 당호를 새기지 않아 부도의 주인공이 전하지 않는다.
지대석, 기단석, 탑신석, 상륜이 각각 1석인 석종형 부도이다. 상륜에 결실된 부재를포함하면 거의 3미터 높이가 될 듯 하다. 방형 지대석 위에 팔각 상대석과 하대석을 일석으로 조성하였으며 복련과 앙련을 새겼다.
배례석 방형 지대석 상대석. 하대석 상단, 하대석 하단
상륜부
부도의 주인공은 어떤 스님이 었을까? 지륜스님은 괴산 공림사에 오랫동안 주석하였고 봉암사에서 입적한 함허 득통 스님 부도로 추정하였다. (미처 그 까닭을 여쭈어보지 못 했다)
함허 스님 부도라고 하면 정시한이 이곳에 왔을 때 부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는 바로 옆 하관음암지 정관대사 부도와 다른 1기는 기술하고 있으나 이 부도에 관한 언급이 없으며, 1633년 입적한 함허스님의 부도는 강화 정수사. 문경 봉암사. 공림사(추정)와 북한에 남아 있다.
개인적으로는 월담 설제 스님 또는 환성 지안스님의 분사리로 판단되나 근거를 찾을 수 없으니...
석탑재 갑석 부재 2매가 남아 있다.
크기로 미루어 소형 석탑으로 추정된다.
부도 대석으로 추정되며, 상부에 방형 홈이 있다.
거듭 지륜스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
2019.0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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