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고택 우리에게 선병국 가옥으로 널리 알려진 민가이다. 오늘은 2012년 옛글에 철비에 관한 언급이 없어 철비를 찾아 왔다.
전 비서경 선 공 영홍 시혜비 前 秘書卿 宣 公 永鴻 施惠碑
철비에 관한 유래를 기록해 두었다. 본래는 전남 고흥에 있었으나, 도로 개설로 인해 이건할 상황이 발생하여 이곳으로 옮겨왔다. 전 비서경 벼슬을 지낸 선영홍이 소작농들에게 전답을 불하하고, 세금을 경감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분인이전 혜택균시 分人以田 惠澤均施 사람들에게 밭을 나누어 주고, 혜택을 골고루 베풀었다.
곡수태경 비민무기 穀收太輕 俾民無飢 곡수를 크게 깍아주고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였다.
자당세금 경자부지 自當稅金 耕者不知 경작자가 알지못하도록 세금을 부담하였다.
부이호인 사공기수 富而好仁 捨公其誰 부자이면서 어질함을 베푸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임술 19월 일壬戌 十月 日.1922년 고흥 두원.점암.남면.남양면 소작 립 高興 豆原 点巖 南面 南陽面 小作 立
1922년 고흥군 4개면의 소작농들이 세움
노블리스 오블리제 오늘을 살아가는 사회지도층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2019.03.28 |
아래는
2012년 글이다.
솟을문과 바깥담장
원정리 석탑 답사후 법주사로 향하는 동선에 선병국 고가와 서원리 소나무를 포함시켰다. 내비의 안내로 진입하면 가옥 후문 소나무 숲 사이의 작은 주차장으로 안내한다. 별수 없이 집을 돌아 효열각이 보이는 솟을문으로 갔지만 이른 시간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가옥 답사는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솟을문
선병국 가옥은 고려시대 예의판서와 우문각대제학을 지낸 선윤지를 시조로 하는 보성선씨 가문의 고택으로 가옥을 건립한 것은 병조판서 약해의 후손으로 현 종손인 선민혁씨의 증조부인 선영홍공 때이다. 선영홍은 고종 40년인 1903년에 전남 고흥에서 지금의 하개리로 입향하여 1919년에서 1924년 까지 아들인 선정훈과 함께 이 집을 건축하였다. 선민혁씨에 따르면 증조부께서 이곳에 집을 짓기를 하명하고 당시 17세의 나이였던 조부 선정훈공이 주도하여 부친과 함께 신축하였다고 한다. 이때 도편수로 참여한 사람이 당시 궁궐목수로 유명했던 ‘방대문’이라는 사람이었다.
이곳에 터를 잡은 데에는 유래가 있다. 선영홍이 집터를 찾던 어느날 꿈을 꾸는데‘섬’에 집을 지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명한 지관과 함께 전국을 다니며 선몽한 집터를 찾아다녔다. 당시 서울의 여의도와 보은의 현재 집자리가 후보지였는데 지관이었던 심노인이라는 분이 이곳으로 터를 정하였 다고 한다.
선병국 가옥은 입지를 인위적으로 변경하여 수해를 입은 적도 있었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선병국 가옥의 동.서로 갈라져 흐르는 하천 중 동쪽의 물길을 막는 직강공사를 하여 농토로 개간하였으나 1980년과 1998년 집중호우 때 물이 범람하여 가옥에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가옥 주변의 소나무 숲은 처음 조영할 때 안산의 역할을 하기 위해 조성한 것인데 두 차례의 큰 수해로 인해 함께 피해가 일었다. 이에 종손 선민혁씨가 지역 주민의 동의를 구해 삼가천을 현재의 상태로 복원하였고 이후로는 홍수 등의 수해를 입지 않고 있다. 그리고 훼손된 소나무 숲 역시 다시 복구를 이루었다.
사랑채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이 큰 개울을 이루고 개울 중간에 삼각주를 이루어 섬이 된 연화부수형 명당이며, 아름들이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 중앙에 99칸의 큰 기와집이다. 안채·사랑채·사당의 3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안담으로 둘러싸고 다시 바깥담으로 크게 둘러쌌다. 가옥의 목재는 속리산과 청화산에서 벌채하여 장마철 뗏목으로 운송하였으며, 석재는 탄부면 매화리, 기와는 장내리에서 구었다고 한다.
사랑채는 솟을대문에서 안채 반대방향에 위치해 있다. 중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마당과 H자형 사랑채가 눈에 들어 온다. 사랑채도 안담이 둘러져 있다. 사랑채 영역에는 3개의 문이 있으며 그 중 하나의 문은 사당과 안채로 통하고 있다. 세벌대 기단의 8칸 사랑채의 좌우에는 날개채를 달았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전면에는 툇마루는 우물마루로 짜여 있다. 몸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반이다.후면에도 툇마루를 놓았고 남쪽 날개채에는 쪽마루를 두었다. 날개채는 몸채보다 두 칸 내밀었다. 날개채는 정면 두칸 측면 5칸 반이다. 현재 사랑채는 ‘도솔천’이라는 전통 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툇마루 뒤에는 불발기 들어열개 사분합문을 달았다. 사분합문의 머름은 툇마루와 대청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위선최락. 사랑채와 안채에 걸린 현판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동의어로 '선을 베푸는 일이 가장 큰 즐거움이다.'라는 의미이다. 집안의 내력을 살펴보면 오늘을 사는 사회적 지도자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선영홍공은 전남 고흥에서 대흥사라는 서숙을 설치하여 각지의 인재를 모아 무료로 교육 및 시설을 제공하여 지역 유림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아들인 선정훈은 한일합방(1910) 이후에 전남 고흥에서 외속리면 하개리에 이주하여 부친과 함께 99칸의 대저택을 신축하고 저택 동편 에 관선정을 만들었고, 보은 향교 명륜당에도 서숙을 설치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제반 비용을 사저로 전담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러한 유지를 받들어 현재 이집에는 종손인 선민혁씨 내외분과 자제분들이 살고 있으며, 안채에 있는 곳간채를 이용하여 고시생이 공부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큰사랑
사랑채 우측 날개채의 큰사랑이다. 전면에 툇마루를 내고 돌출부에는 루를 두고 완자 난간을 둘렀다. 여름에는 삼면의 문을 열 수 있는 들어열개문으로 여름에는 시원하며 겨울에도 광창을 통해 바깥 경치를 조망 할 수 있다. 정면에는 광창이 측면에는 들창이 있다.
골방과 약방 안채 중문
안채 중문은 솟을문 우측 방향으로 안담장이 서있는 마치 고샅 같은 분위기의 끝에 위치한다.
안채와 마주보고 있는 곳간채는 ㄷ자 평면으로 좌측 안대문채 3칸을 제외하고 32칸이며 대부분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북쪽에는 사랑채와 연결되는 출입문이 있으며 대문간 북측 일렬로 선 방은 안채 살림을 맡아하는 안노비들의 방이었다고 한다. 현재 곳간채는 고시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곳간채 배면 안채
서향한 안채는 H평면으로 ㄷ자형 곳간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정면 8칸 측면 6칸으로 중앙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전후로 돌출된 구조이다. 사랑채 세벌대와 차이를 두어 이벌대 기단, 전면 두리 기둥, 측면 모기둥이며,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왼족방은 겹집구조로 윗방과 아랫방으로 나누어지며 오른쪽방은 통간이다.
사랑채와 안채가 동일한 H자 구조이지만 용마루를 기준으로 사랑채는 전면이 넓고 안채는 후면이 넓다고 한다. 이러한 구조는 익히 아시겠지만 바깥주인의 생활과 안주인의 일상생활의 편의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안채 좌측 방
안채의 안방이다. 겹집구조로 윗방, 아랫방으로 나뉘어진다. 전면 툇마루와 후면 쪽마루에서 북쪽 날개채 까지 연결되어 부엌마루. 찬방과 통한다.하부에는 부엌, 상부에는 벽장과 다락을 배치하였다. 우측은 건넌방이다.
안채 안방 용마루 안채 후원 장독대 사당
일반 고가의 사당은 정침 동쪽에 설치되지만 이 집의 사당은 안채와 사랑채 뒤쪽으로 물러나 있다.
사주문四柱門
선병국 가옥의 후문이다. 하지만 나처럼 대부분 사람은 사주문을 통해서 출입할 것이다. 가옥의 바깥담장으로 난 문으로 사랑채 협문과 유사하며 문 은 숲과 연결되어 있다.
아침 이른 시간에 현재도 집주인이 거주하는 공간이라 조심스레 주마간산격으로 들려 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느 고택과는 다른 호방한 터, 전통 가옥 배치와 다른 구조, 사랑채 안채의 동일 평면속에 남녀구분을 둔 기단의 차이 등 격변기의 가옥의 일면을 살펴본 좋은 기회였다.하지만 해설사의 유려한 설명을 듣지 못한 것, 집 주인과의 대화 부재 등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2012.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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