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합천군

합천...허굴산 청강사. 부도

임병기(선과) 2019. 1. 13.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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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강사.

대구에서 멀지 않은 곳.

영암사지 답사를 비롯하여 산행, 여행으로 빈번하게 스쳐 지난 길위에 위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나브로(이계재)님의 포스팅 이후에 인지하고 오늘 인연 지었다.

 

 

청강사

벚꽃이 허드르지게 핀 봄날이면 벚꽃 축제와 산사음악회, 장학사업 등의 행사를 이어오고 있으며,

그 외에도 혜광 주지스님은 지역 사회에서 많은 봉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청강사

1941년 고려시대 사찰이었던 허굴사지에 정규락(정진사)선생이 만년을 보내기 위하여 만귀암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강거사는 준공을 앞두고 돌아가시어, 아들인 정방해 선생이 선친의 호를 따서 청강사로 사명을 바꾸어 1943년 개창하였다.

또한, 대웅전 현판은 위창 오세창, 산신각 현판은 창남 오제봉, 칠성각 현판은 정현복 선생으로 부터 받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개창 초기에는 근세의 큰 스님인 동산스님, 정강스님,운허스님이 머물기도 하였다고 주지스님께서 말씀하였다.

 

가람 배치

요사를 거쳐 바위 위에 오층석탑, 바위 굴을 통과하면 지장전, 뒤편에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산신각, 관음전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영역 뒤에 최근 약사선원을 세웠다.

 

 

청강사비(晴岡寺碑)

청강사 입구에 있으며 1944년 음력 4월 우리에게 익히 "논개"로 알려진 수주 번영로의 형인 변영만이 짓고 썼다.

 

한글 비문(해석...청강사 카페 정도님)

청강사(晴岡寺)는 고() 청강거사(晴岡居士) 정규락(鄭逵洛)이 짓기 시작하고, 그의 대를 이은 아들 방해(邦海)가 완성하였다. 거사의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청강은 그의 별자(別字, )이며, 효자 백조당(白棗堂)의 후손으로 고종(高宗) 신미년(1871) 311일에 삼가(三嘉) 고향집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을 갓 넘어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다. 중년이 되어서 느닷없이 벼슬을 구하고자 하여, 하루는 당로자(當路者)를 만나 뜻을 알리니 당로자가 들어주어 장차 아무 날에 하동(河東) 부사에 제수하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사는 제수되기로 한 전날 저녁에 스스로 포기하기를 원하여 당로자를 크게 놀라게 하였다.

 

거사의 용모는 크고 튼튼했고, 국량이 넓고 권도와 기궤를 잘 했으며, 관대함은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었고, 굳세고 엄격함은 대중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속내가 깊고 마음씀이 좀체 드러나지 않았다.

그가 집에서 치산(治山)할 때에 사람들은 그가 산대를 놓거나 장부 적는 일을 본 적이 없었으며, 편안하고 그윽할 뿐이었다. 다만 꽃과 새들을 매우 사랑하여, 널리 수집하여 심고 키우면서 너무 지나칠 듯 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해마다 그 재산을 불려 풍부하게 할 수 있어서 몇 갑절에 그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혹 일이 생겨 서로 우왕좌왕하며 위태로운 경우에도, 한번 굽어보고 올려다보는 잠깐 사이에 스스로 신속히 그 살길을 파악하고서 손수 그 임무를 맡아 감독하고 지도하여 애초에 아무 일도 없었던 상태로 돌려놓곤 했다.

 

그가 아들을 가르치며 항상 하던 말이 있다. “()는 곧 복()이고, 복은 곧 화이니, 너는 반드시 복도 아니고 화도 아닌 사이에 처신하며, 평생 구담(부처님)의 가르침을 주시는 바에 마음을 의탁하도록 하여라.”

그는 밖으로는 소탈하고 안으로는 항상 분발하며, 신속한 기분으로 명산을 두루 참배하고, 덕이 높은 어른들을 찾아뵈면서, 공부할 때는 면밀하게 하고, 심오한 이치에 가만히 깨달음이 있었다.

무릇 이와 같은 모든 것은 사람들이 그의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정하고 오붓하게 임종을 잘 하였는데, 그가 그러함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임오년(1942) 섣달, 그는 장차 내년 정월에 이 사바세계(俗世)를 떠나겠다고 미리 말했는데, 그 때가 되니 과연 유언을 제대로 남기고 스님을 불러 관화(觀化)하고 유연히 입적하였다.

그가 행한 일의 시말을 종합해보면 가히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

 

절은 삼가(三嘉)의 허굴산(墟窟山) 자락에 있는데, 그 서쪽은 금성산(金城山)이고, 그 북쪽은 악견산(岳堅山)으로서, 세 산의 명성은 참으로 옛날부터 아름답게 칭송되었다. 허굴산은 황매산(黃梅山)의 첫 가지로서, 바위와 샘, 골짜기와 구릉의 풍부함이 세 산 가운데 최고가 된다. 그리고 청강사가 여기에 있으니 더욱 그 빛과 정채가 더하게 될 것이다.

 

그의 아들 정군(邦海)이 올해 음력 2월에 북쪽으로 서울에 올라왔다가, 다시 서쪽으로 꺾어서 주부토(主夫吐)의 집으로 나를 방문하여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후세에 보여주게 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정군을 보니 역시 우뚝하고 얽매임이 없어서 능히 아버지의 뜻을 잘 이어받을 만한 사람이다.

이에 위와 같이 엮은 다음 사언(四言)으로 덧붙여 그 다하지 못한 뜻을 이어두기로 한다.

 

嘉有三山 삼가에 세 산이 있으니

墟窟金岳. 허굴과 금성과 악견이로다.

墟窟最奇, 허굴산 가장 기이하여

鬼剜神劚. 귀신이 깎고 다듬은 듯.

晴岡之作, 청강이 출생함에

稟德瑟懿, 덕성을 타고남이 엄숙하고 성실하여

夜行密勿, 밤길 가듯 면밀하고 침착하니

與山爭卓. 허굴산과 높음을 다투도다.

噓出淨財, 맑은 재물 시원하게 내놓아

爲梵宮渥, 범궁(사찰)을 위해 베푸니

重昏之揆, 어두운 세상 바로잡고

陋俗之濯. 비루한 풍속을 씻었구나.

亦厥肖子, 역시 그를 닮은 착한 아들

紹之有覺. 이어받아 깨달음이 있었네.

奉影奠骨, 영정을 모시고 유골을 제사 지내니

孝忱純樸. 효성과 정성 순수 질박하도다.

庤書盈萬, 쌓아둔 책 만권이 넘어

用惠來學. 후학들에게 은혜를 베푸네.

有是父子, 이 부자에게

疇能與角. 누가 능히 겨룰 수 있을까?

豈弟之流, 화락하고 단아한 물줄기

爲百代沃. 백대의 옥토를 이루리.

 

佛紀 二千九百七十一年 甲申年 首夏之月

* 甲申年(1944) 음력 4


密陽后人 卞榮晩 撰幷書

밀양후인 변영만 짓고 쓰다.

 

변영만

"중국 북송시대 문장가이며 정치가였던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 삼부자를 일컬어 삼소(三蘇)라고 했는데, 변영만(卞榮晩)[1889~1954]·변영태(卞榮泰)·변영로(卞榮魯) 삼형제도 그와 비견되는 천재성을 가진 명문장이란 의미에서 ‘한국의 3소(三蘇)·변씨삼절(卞氏三絶)·삼변(三卞)’으로 불렸다. 국어학자인 이희승은 이들 삼형제를 가리켜 “변문(卞門)에는 별 셋이 있어/ 별마다 뚜렷하여/ 다 같이 별이로되/ 빛은 또한 각각이로다”라고 하였다. 이들 형제는 모두가 문학과 어학에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고 천재적인 풍모를 지녀 숱한 일화를 낳았고, 창씨개명 정책에 저항하여 끝까지 이름을 바꾸지 않아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후반에 삼형제 모두 고향인 부천군 고강리로 내려와 은둔하였다.

특히 변영만에게는 ‘우리나라 한문학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 문장대가’, ‘한문고전을 기반으로 서양의 문학과 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여 독특한 정신세계를 개척’, ‘식민지 시대에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적 지성’, ‘조선의 천재’, ‘회색 괴짜’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출처/_한국향토전자문화대전)

 

 

적막한 산사.

먼저 주지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참배를 시작하였다.

혼자서 부도를 보고 있는 도중에 사시예불을 위해 대웅전에 오신 주지스님은, 거창 연수사에서 옮겨온 인도 전단향 목불좌상, 고려시대 탱화를 비롯 많은 문화재가 도난 당했으며, 그나마 요사에 보관해오던 성보와 자료도 금년 1월 3일 화재로 전소되었다고 한다.

 

현재 사찰의 성보문화재 중에 정확한 내력을 모르는 것은 부도가 유일하다고 한다.

 

 

 

오층석탑

근세작이다.

 

 

 

바위굴

 

 

두 개 암반 사이를 지나면 지장전이 자리한다.

 

 

지장보살,무독귀대왕.도명존자.

 

 

대웅전

 

 

위창 오세창의 글씨

현 주지스님의 조부이신 정방해 선생은 서울과 영남 일원의 만석꾼으로, 서울 안국동에 99칸 집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군자금을 지원하였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오세창 선생과 다른 서예가로 부터 현판 글씨를 받았다고 주지스님은 말씀하셨다.

 

정방해 선생은 독립자금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육영사업에도 뜻을 가지고 진주여고, 합천의 학교에도 많은 기부금을 희사하였다고 전한다.

 

 

오세창 낙관

 

 

목조석가여래삼존

개창시기에 모셨던 인도 전단향 목불은 정방해 선생이 거창 연수사 스님으로부터 구입하여 모셨지만고려시대 후불탱화와 더불어 도난 당했다.

 

 

 

 

 

산신각 현판

청남 오제봉菁南 吳濟峯

승려출신의 서예가로 진주 의곡사 주지를 거쳐 환속하였다.사찰 현판으로는 범어사,석남사,표충사에 남아 있다.

청강사 산신각 현판은 청남선생이 위창 오세창 선생과의 깊은 교류에 그 연원이 있는 듯 보인다.

 

 

산신.나반존자 탱

 

 

관음전

 

 

낙관이 없다.

 

 

합천 청강사 승탑

2015년 9월 3일 문화재자료 594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합천군청 홈페이지에는 아직도 등재되지 않았다.

 

문화재청 설명을 가져 왔다.

(아래의 설명문 중 굵은 글씨는 다시 리뷰하겠다)

 

"합천 청강사 승탑은 지대석에서부터 상륜부까지 승탑의 일반적인 세부 구조를 다 갖춘 이 승탑은 지대석과 하대석이 높게 가구되어 있어 규모에 비해 전체 높이가 높은 편이다.

지대석과 하대석은 체감된 층단처럼 유사한 형태로 각각 1매의 팔각 석재로 가구되어 있다. 다만 문양이 없는 지대석과는 달리 하대석 각 면석에는 연꽃을, 곡면으로 처리된 윗면에는 복련을 새겨 놓았다. 중대석은 고복형으로 상하 가장자리에 연판문을 새긴 후 표면에 두 마리의 용이 보주를 희롱하는 모습과 함께 여의두문을 가득 조출하고 있다. 팔각의 상대석에는 각 면에 박쥐를 새겨 놓고 있다. 탑신부의 탑신석은 구형이며 표면을 4등분하여 국화문, 연화문, 목련문 등을 조각하고 있다. 팔각의 옥개석에는 기와골이 각출된 낙수면과 귀꽃 및 밑면에도 부연과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상륜부는 보개석과 보주석으로 가구되어 있는데 1매의 석재로 치석되어 있다.

이 승탑은 치석된 석재 형태와 문양의 시문 배치 형식 및 문양들이 조선시대에 건립되는 장명등의 조각 수법 및 문양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또한 이 승탑은 조선후기부터 건립되는 대부분의 승탑이 석종형 양식을 따르거나 팔각원당형과 석종형이 혼합된 간략해진 양식을 지니고 있는 것에 비해 독특한 양식을 갖추고 있어 조선말기에서 근대에 이르는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방형 지대석.

기단 하대석(하대석 상대.하대석 하대)

중대석

상대석

탑신

옥개석

보개

노반

앙화(복발)

연주문, 보주

 

 

방형 지대석

 

 

팔각 하대석

하대하대석에는 별다른 문양이 없다

하대상대석에는 면마다 창처럼 구획하여 화문을 얕게 새겼다.

 

 

 

 

 

 

 

 

 

하대 상단석 상부에는 복련을 조식하였다.

 

 

중대석

전면 용문

문화재청 설명문에는 고복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원형으로 상하부에 받침과 괴임, 앙련 복련, 여의두문을 대칭으로 장식하고 중앙에는  여의주를 희롱하는 2마리 용이 꿈틀거리고 있다.

 

 

중대석 후면

 

 

상대석

문화재청 자료(위 설명문 굵은 글씨)에는 상대석은 팔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내사진에는 6면에 박쥐문이 새겨져 있다.

어찌된 까닭인지...

 

박쥐문은

일반 민간이나, 민화에서는 복과, 다산의 상징이다.

불교에서는 卍자 문양. 범어문자와 더불어 길상의 의미로 해석된다.

 

 

 

 

 

 

 

 

상대석 하부

앙련이 새겨져 있으며

 

 

상대석 상부에는 복련으로 장식하였다.

 

 

원형 탑신석

국화문

탑신석도 문화재청 자료(위 설명 굵은 글씨)에는 굵은 선으로 4등분으로 구획하여 연,국화,목련문 등을 조각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내눈에는 3면이었다.

이 또한 어찌된 까닭인가?

 

물론

문화재청 자료와 차이가 나는 부분이 나의 실수가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목련문(?)

 

 

연화문

 

 

상륜부

팔각 옥개석의 기왓골이 깊고, 우동은 높으며 귀꽃을 표현하였다.

상부에는 복련이 조식된 듯 하다.

하부에는 겹처마를 새겼다.

 

 

귀꽃

 

 

옥개석 위 부재

정확한 부재 명칭이 궁금하다.

팔각보개와 노반. 앙화 또는 복발, 연주문 돋을대(받침).보주로 추정된다.

 

 

조성시기

개인적으로는 1943년 입적하신 개창주 청강거사의 부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주지스님은 미술 하시는 분들이 다녀가면서 연곡사 부도와 견줄 만한 장식성을 가진 부도로 조성시기가 올라간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청강선사에 이어 정병해 선생이 주석하실 시기에는 많은 재산을 기부하여 사세를 넓히고, 독립운동 군자금, 육영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으나 해방후 이런 저런 사유로 사세가 기울어져 갔으며, 거의 퇴락한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현재 주지스님인 혜광스님이 늦게 귀의하여 증조부인 청산거사와 조부인 정방해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아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고 있으며 뜻 깇은 불사를 이뤄가는 중이다.

 

벚꽃이 절정인 봄날

다시 다녀 가리라 다짐하며 인연에 감사드린다.

 

201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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