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합천군

합천...백암리사지 석불좌상.석등

임병기(선과) 2018. 12. 4.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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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겨울 하루가 기웃기웃

 

사내 둘이 빈절터를 찾아 들었다.

"사진은 찍을 수 있겠지" 라는 대화를 주고 받으며..

 

옛글을 보니 2007년 마지막으로 다녀 온 절터이다.

 

 

 

 

백암리 사지

"삼국유사’ 제4 탑상편 백엄사 석탑사리(伯嚴寺 石塔舍利)조에는 “개운3년(開運3年, 946)에 쓰인 진주 임도대감주첩(任道大監柱貼)에 선종백엄사(禪宗伯嚴寺)는 초팔현(草八縣-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에 있는데 사승(寺僧) 간유상좌(侃遊上座)는 나이가 39세이고, 절을 처음 세운 때는 알 수 없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옛 문헌에 신라 때 북택청(北宅廳) 터에다 이 절을 지었는데, 중간에 오랫동안 헐어 폐지되었다. 지난 병인년(906)에 양부(陽孚)스님이 이 절을 고쳐 짓고 주지가 되었다가 정축년(917)에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있다.

또 함옹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인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수립(秀立)이 절에서 지켜야 할 규칙 10조를 세웠는데, 규칙 중에는 이 절의 법을 지키던 경승(敬僧) 엄흔(嚴昕)·백흔(伯欣) 두 명신과 근악(近岳) 등 세 분을 모시라고 했다. 민간에 전해오기를 엄흔·백흔 두 사람이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으므로 절 이름을 백엄사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 백엄사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에 있는 사지를 발굴조사한 결과 이 사지에서 통일신라후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조사단은 이곳을 ‘삼국유사’에 언급된 백엄사지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1407년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된 천태종 사찰 중 ‘초계의 백엄사’가 포함되어 있어, 조선 전기까지도 지역의 주요한 사찰로 법등을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에서는 사찰의 명칭이 확인되지 않아 15세기 전반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암리사지는 백암리 상촌마을 상촌저수지 아래에 있다. 이곳은 청계산 무월봉의 남쪽 계곡 중류에 해당하는 곳으로 신반천으로 흘러드는 큰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 뒤 경작지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자료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대동사지’라는 명칭으로 보고되어 있는데, 사명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높이 4척의 석탑과 높이 5척의 석불, 탑의 지대석으로 보이는 부재 2매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출처...법보신문)

 

 

현재 사지에는 석불좌상. 석등 2기가 유존하며

이곳에서 반출된 팔각 불상대석과, 석등 옥개석은 합천박물관에 있다.

 

 

석불좌상

 

 

하대석

지대석은 결실되고 하대하단석은 팔각이며, 상단석에는 복련을 조식하였다.

상부에는 팔각 3단 굄이 있다.

 

 

중대석

팔각을 우주로 구획하여 보살상(?)을 입상으로 새겼다.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

 

 

 

 

 

상대석

 

 

 

 

석불좌상

광배는 결실되었고. 나발에 육계는 높으며, 상호는 훼손되어 구분하기 어렵다.

목에는 삼도가 있었듯 보이며, 법의는 통견으로 승각기 매듭을 표현하였으며, 옷자락이 무릎을 덮고 양발 사이로 흘러내렸다

항마촉지 수인이다.

 

통일신라 하대 불상으로 전한다.

 

 

승각기 매듭

 

 

 

 

나발이 뚜렷하다

 

 

 

석등(1)

방형 지대석.복련의 하대석. 팔각 간주석.상대석,화사석.옥개석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부재가 남아 있다.

 

 

하대석

복련 끝을 뾰족하게 표현하였다.

복련에는 씨방이 있고, 간엽을 굷게 새겼다.

 

 

상대석

하대석과 거의 대칭이다.

2단 괴임이며, 상부에는 1단 받침이 있다.

 

 

화사석

팔각으로 4개 화창과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다.

윤왕좌이며 사천왕상 구분은 쉽지 않다.

 

 

화창에는 문비를 달았던 홈이 남아 있다.

 

 

남방증장천왕. 유일하게 두광을 표현하지 않았다.

 

 

서방 광목천왕

 

 

동방지국천왕

 

 

북방 다문천왕

 

 

옥개석

팔각으로 귀꽃이 있었던 것 같다.

낙수면 물매는 급하지 않으며, 상부에는 팔엽 복련이 조식되어 있다.

상륜은 결실되었다.

 

화사석을 옥개석 하부의 촉공에 끼워 넣었다.

 

 

통일신라 하대의 석등으로 추정된다.

고려초기로 기록한 자료도 많다.

 

 

석등(2)

석등(1)보다 후대 작품 부재로 추정되며, 합천박물관 석등 옥개석과 동일 석등으로 보인다.

 

 

합천박물관. 백암리사지 석등 옥개석

 

 

합천 박물관. 석불대좌

 

 

 

 

 

 

뉘엿뉘엿 해지는 겨울의 폐사지

어쩌면

나의 모습이 아닐런지.

 

개망초 흐드러지게 피었던 그날이 어제  같건만

 

 

2018.11.28

 

아래는

2007년 글이다.

 

 

진주 출장 일을 마치고 귀가길. 파랑새님이 생각나서 폰을 했더니 묵묵부답

산청 생비량 양천강을 지날 무렵 난리가 났다. 당장 진주로 돌아오라고.

맛난 저녁 사주겠다며  협박이다.

 

이제야 밝힙니다..

여름날 백암리가 보고파서 되돌아 갈 수 없었습니다.

 

 

 눈내리는 폐사지 해질녘 폐사지가 좋다지만

보아라

 풀빛에 물든 폐사지도 그림이지 않은가?


 

회화나무. 느티나무 그늘아래 그렇게 계신다.

당산과 미륵으로 추앙 받으며

마을을 보호하고 자식을 점지해주었다.


 

멀리 동리를 바라본다.

오늘은 건방진 선과놈이 오는구나.

그러셨죠?


 

개망초랑 숨박꼭질도 하며 머~언 옛님을, 유년을

되새김질 하시는 듯


 

복원은 잘못되었지만 이렇게라도 남아 있어 고맙다.


 

수작의 신라 전형 팔각원당 석등이다.

지붕돌에 귀꽃이 피어 있다면 더욱 미인이었을텐데

버려서 더욱 아름다운가?

어쨓거나 시골에 어울리지 않은 늘씬한 미인이다.


 

앙련 연잎에도 복련 연잎에도 몽글몽글 꽃이 피어 있다.


 

화사석에는  악귀를 밟고 있는 사천왕상을 돋을새김 하여 모셨다.


 

민초들에게 몸을 육신을 내어주고 형체조차 알 수 없는 얼굴.

돌팔이의 집도로 성형을 했지만

그래도

기가 흐른다. 금방이라도 미소가 보일 듯한...


 

제짝이 아니면 어때?

낮은 부조지만 귀티가 나는 신상(?)이다.

시골티가 나지 않고, 도회적 세련미의 여인네처럼



 

개망초와 석등,석불의 숨박꼭질이 끝났나 보다.

이제는 내가 술래를 해볼까?

내게도

유년으로 돌아가고픈

아니

젊은날 백암리에 동행했던 그녀와의  숨은 추억을 찾기 위해......

 

2007.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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