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논산시

논산...불명산 쌍계사

임병기(선과) 2018. 11. 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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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나홀로 답사

오늘은 동호회원들과 함께했다.


 

봉황루

전면에는 쌍계사 현판이 걸려 있다.

 

 

쌍계사雙溪寺

세재갑자맹춘 청암 김윤환(歲在甲子孟春 淸菴 金閏煥)

명덕 서(明德 書)


세재갑자맹춘甲子孟春은 1924년 음력 1월이라고 한다.

그 근거가, 청암의 생애로 추정한 것인지 아니면 세재歲在가 고종 재위기간을 의미하는 년도인지 확인 하지 못했다.


또한

명덕 서明德 書의 의미는 무엇일까?

청암이 명덕일까?


청암 김윤환은 쌍계사 신중도를 비롯 불사 대시주를 하였으며, 명덕은 다른 인물이 아닐까?


청암에 관해서는 대웅전 신중도 화기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봉황루


 

쌍계사

홈페이지에는 관촉사 은진미륵을 조성한 혜명대사가 창건하였으며 백암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이후 사적은 전하지 않으며 조선초에 번성하였으나 임진왜란의 병화를 입어 다시 중건하였으나 화재로 인해 전소되어 영조15년(1739)재중건하였으며, 번성시에는 중층 대웅전을 비롯 5~6백간의 전각이 있었다고 전한다.


현존하는 당우

대웅전.나한전.명부전.칠성각.봉황루.영명각. 요사체가 있다.


 

쌍계사중건비

쌍계사중건비명(雙溪寺重建碑銘)
은진쌍계사중건비명병서(恩津雙溪寺重建碑銘幷序)

덕은(德恩 : 충남 논산시 은진읍) 수령 월성(月城) 김낙증(金樂曾)이 글을 짓고,
노성(魯城 : 충남 논산시 노성면) 수령 한산(韓山) 이중화(李華重)는 글씨를 쓰고,
함라(咸羅 : 전북 익산시 함열읍) 수령 월성 김낙조(金樂祖)는 전액한다.

불명산(佛明)의 쌍계사(雙溪)는 옛날 이름난 사찰이니 일명 백암(白菴)이라고 한다. 고려 때 행촌(杏村) 이암(李嵒)이 발원하여 중창하고 목은(牧隱)선생이 연기문(緣起文)을 지었으니 그 오래되고 이름났음을 알 수 있다. 절은 비록 기이한 경치를 볼 것은 없으나 산과 숲이 우뚝하고 계곡은 깨끗하고 골짜기는 깊으며 승방과 불전이 웅장하고 화려하게 이어져 있어서 오고가는 나그네가 유람하고 구경하는 곳이며 고승과 시 잘하는 승들이 머물고 학문을 닦는 곳이니 대개 호남과 호서사이의 크고 웅장한 경관이 되어있다.


불행히 병진년(영조 12, 1736년)에 화재가 났는데 바람을 타고 불이 번져 단청과 보배들이 모두 재가 되어 버려 금불상을 가리지도 못하고 스님들은 밖에서 잠을 자니 지나가는 중생들이 또한 비통한 마음이 없을 수 없었다.


절의 스님인 성능(性能)과 극찰(克察)등이 울면서 여러 신도들에게 상의하기를 “우리 절이 오래되고 명성이 있는 절인데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어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무리들의 평생 원업(寃業 : 악업 때문에 받는 응보)이 되었습니다. 또 우리 서방의 대성인여래(大聖人如來 : 석가모니)가 일부러 겁화(劫火 : 세계가 파멸될 때 일어난다는 큰 불)를 일으켜 온 세상의 변란을 보게 하고 인간 세상의 망하는 것을 한번 내려다보게 하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습니까?” 라고 말하니 모두들 알겠다고 답하였다.


이에 서로 함께 모연(募緣 : 재물을 절에 기부하여 좋은 인연을 맺게 함)하고 시주를 얻으니 시주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불당과 전각, 곁채를 앞뒤로 건립하는데 몇 년이 되지 않아 거의 그 반이나 복구되었다. 아! 성주괴공(成住壞空)은 진정 운수가 있는 것이로되 이치는 끝내 다함이 없어 윤회가 끝이 없으니 이 절이 무너지고 다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마도 유마힐(維摩詰 : 부처의 세속 제자, 유마경의 주인공)이 이른 ‘불속에서 연꽃이 피어난다.’는 것인가?


여러 스님들이 내가 이 곳의 수령이라 하여 돌을 갖추고 그 일을 써주기를 청하였는데 나는 처음에 옛날 유학자들이 불경에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들어 사양했으나 다시 생각함에 나는 목은 선생의 외가 후손인즉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강제로 명(銘)을 하게 되었다.


너른 산악 높은 하늘, 신령스러운 기운 충만하게 모였고
용과 봉황이 높이 날아올라 불명산에 모였구나.
그 가운데 웅장한 사찰을 품고 있어 많은 기둥 황금빛으로 빛나네.
행촌이 세우고 목은이 뜻을 함께 하였도다.
신령이 감싸주고 귀신이 보호하여 그 사찰 빛나더니
천년의 겁화에 불타 가련한 초토(焦土 : 화재가 난 땅)로구나.
허깨비런가? 망상이런가? 다 사라지고 텅 비어버렸네.
하루 저녁에 우뚝 솟으니 자비의 힘이라.
아름다운 숲은 모습을 바꾸고 온 하늘이 밝게 빛나네.
내가 큰 돌에 글을 써 천년, 억년토록 이 사실 증명하네.

백암(白菴)의 한 골짜기는 혜명(慧明)의 도량으로 부처님의 궁실이 피해를 본지 오래되어 온 세상이 함께 탄식하니 비구 자영(自英)이 병신년(숙종 42, 1716년)에 중창하였다. 각공(刻工)은 장치구(張致久)와 노인삼(盧仁三)이고 정심(淨心)은 은진과 함라의 글을 쓰고 전액하니 붓은 비구니 상 ~마멸~

숭정기원후 128년(영조 15, 1739년) 두 번째 기미년 5월 일
별좌(別坐) 두성(斗星) 뇌신(雷信) 본사질(本寺秩)

대시주(大施主) 현재주지 가선 문익(文益) ~마멸~ 가선▨행 통정 관행(寬行) 학명(學明)
통정(通政) 신유(信裕) ▨간 별좌(別坐) 희열(熙悅) 수승(首僧) 세천(世天) 삼보(三寶) 행흠(幸欽)
~마멸~
대시주 가선 ▨태귀(▨泰貴) 가선 정광석(鄭廣碩) 최이만(崔二萬) ▨사 삼율(三律)
대시주 통정 백춘석(白春碩) 최만기(崔萬起) 공양 지운(知云)


*출처/한국금석문종합종합영상정보시스템


 

대웅전

처음에는 2층 중층 건물이었으나 후대에 단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앞면 5칸, 옆면 3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전각이다.

막돌로 허튼층쌓기 기단, 덤벙주초,두리기둥이다

전면 중앙 어칸을 비롯 5칸에는 2짝 창에는 화려한 꽃창살로 장식하였다.

아쉽게도, 어칸의 모란 문양, 향우측 2짝의 해바라기 문양을 제외하고는 꽃이름이 분명하지 않다.


내부는 연꽃 봉오리를 뚜렷이 조각하고서 겹쳐 쌓아 화려하게 꾸몄다.

우물천장이 높이 결구되어 있고, 양쪽 대들보 위  보 머리에는 용머리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불단에는 각각의 닫집을 두고 소조삼세불을 모셨다.


1972년에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단청을 새로 칠하였다.


 

청암인淸菴印

청암 김윤환의 글씨


이로 미루어 청암은 서예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봉황루 현판의 명덕 明德의 의미는 사람 이름이라기 보다는 청암의 마음을 함축하는 것 아닐까?


 

소조석가여래삼존불상

칠보궁의 아미타 여래, 적멸궁의 석가여래, 만월궁의 약사여래

후불탱은 1923년에 조성되었다.


"17세기 초에 조성된 소조불좌상으로서 본존은 석가여래, 향좌측은 아미타불, 향우측은 약사불로 구성된 삼세불이다. 수조각승 원오(元悟)가 1605년 3월부터 7월까지 신현(信玄), 청허(淸虛), 神釰(신일), 희춘(希春) 등 네 명의 조각승과 함께 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임진왜란 중에 소실된 사찰들에 대한 중창불사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쌍계사도 2층의 불전을 세우고 이들 삼세불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대웅전은 1층으로 중수된 것이다.


삼세불은 대형의 수미단 위에 봉안되어 있는데 앙련과 복련으로 구성된 타원형의 대좌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중앙의 석가여래불이 가장 크고 좌우 아미타·약사불이 조금 작게 조성되어 있어 다소간의 위계를 두었다. 얼굴은 넓적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양감을 넣었고, 눈은 마치 졸린 눈처럼 지그시 뜨고 있으며, 도톰한 이등변삼각형의 콧등,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여유로운 미소 등은 원오가 제작한 다른 불상, 예를 들어 익산 관음사와 혜봉원에 분산 봉안된 문수·보현보살상 등과 유사하다.


본존인 석가불은 오른손을 무릎 밑으로 내려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왼손은 앞으로 내밀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다. 커다란 신체에 비해 작고 섬세한 수인이 대조를 이룬다. 한편 아미타불은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고, 왼손은 배 높이로 들어 하품중생인을 결하였고, 약사불은 아미타불과 대칭으로 수인을 결하였다.


석가불의 착의법은 오른쪽 어깨를 덮은 변형 편단우견식인데 어깨 위의 옷자락 끝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가슴의 일부를 가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슴 아래로는 수평의 내의가 보이는데 부채처럼 접힌 옷주름을 큼직하게 표현했다. 이에 반해 아미타불과 약사불의 착의법은 통견이면서 오른쪽 어깨를 덮는 대의를 걸치고 있어 석가불과는 차별된다.


옷주름은 깊지 않으면서도 유려하고 간략한 편이다. 하체를 덮은 대의자락은 종아리를 감싸는 부분은 인체에 밀착되어 있고, 바닥에 접하는 부분에만 얕은 단을 규칙적으로 부여하여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이 옷주름들은 평행에 가까우나 발목 부분은 조금 높은 사선을 이룬다. 가사를 발목 교차점에서 바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해서 부채꼴 형상으로 펼쳤는데, 이러한 표현은 이 시기에 조성된 불상의 일반적인 형식이다.


복장유물로는 한지를 재단해서 두루마리로 만든 불상의 조성 발원문과 오곡·오약·사리 2과(顆)를 넣은 후령통, 『묘법연화경』 3책, 「관음보살예문」, 「아비달마대비바사론」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묘법연화경』 권5·6·7은 완주의 안심사에서 제작된 것으로 1402년에서 1410년 사이에 판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보물 제1306호인 『묘법연화경』의 원판본일 가능성이 있다. 「관음보살예문」은 1462년(세조 8)년에 중각한 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적멸궁.세존이 머무는 궁전


 

아미타여래


 

석가여래


   

약사여래



신중도

여타의 신중도와 달리 신이 아니라 중앙에는 익선관을 쓴 임금,뒷편의 금량관을 쓴 신하가 묘사되어 있다.


누구일까?


"신중도를 그린 금어는 호은정연(1882~1954)과 보응문성(1867`~1954)이다.

특히 보응문성이 그린 공주 신원사 신중도(1907)는 쌍계사 신중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신원사 신중도는 전통적인 무장을 하고 있는 신중들 사이 위태천 앞에 대한제국의 군복을 입은 2명의 신중을 배치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군모 전면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금색 오얏꽃 문양을 하고 견장에는 태극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풍전등화 같은 시기에불교의 신ㄴ에 의탁하여 나라를 구하려 함이 었을까? 근대기 변화하는불화에 시대적 의미를 부여한 중요한 예로 꼽히는 작품이 신원사 신중도이다"...출처(권중서.조계종전문포교사.불교미술)

 


앞서 인용한 자료에서 계속 이어 진다.


익선관을 쓴 신중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화기를 살펴보자.


"계해년 11월 15일 봉안 쌍계사 대웅전 신장단상 癸亥年 十一月  十五日 奉安 雙溪寺 大雄殿 神將壇上"


즉, 1923년 쌍계사 대웅전에 모신 신장상이다.

또한

화기에는 익선관의 주인공을 밝힐 단서가 기록되어 있다.


"금차 지성 발원재자 공주군 상반정 거주 건면 경오생 김윤환 今次 至誠 發願齋者 常盤町 居住 乾名 庚午生 金潤煥"


김윤환은  봉황루 현판, 대웅전 현판 글씨를 쓴 사람이다.


위에서 인용한 자료에는 관련 내용이 이어진다.


"청암 김윤환(1870~1936)은 가선대부 내장원경을 지낸 인물로 가선대부는 종2품 문무관의 품계이고, 내장원은 왕실의 세전물이나 재산관리를 맡아 보는 곳으로, 최고책임자가 내장원경이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41년 갑진 9월 27일 조령을 내리기를 종2품 김윤환을 내장원경으로 삼으라 하였다. 왕실의 재산관리를 책임진 김윤환은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신하이다. 그는 쌍계사 신중도 불사 발원재자로 자신의 가족이 모두 참여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익선관을 한 신중도의 주인공은 고종황제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뒤의 신하는 흥선 대원군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중략)

또한 김윤환은 이무렵 대웅전 편액과 1924년에 쌍계사 편액을 1932년에 쌍계사의 모든 불사를 마치고 쌍계사재숭수기를 쓴 바 있고 이현판은 봉황루에 걸려 있다.


쌍계사 신중도는 고종의 신하였던 청암의 후원에 의해 새롭게 제작된 불화이다. 호은정연스님과 보응문성스님에 의해 고종황제가 불교의 신으로 재창출되는 의미를 지닌 신중도이다.대한독립을 바라는 민중의 염원이 불화에 투영된 특별한 신중도로 역뎌진다"

 


서왕모도


도교와 불교의 습합(?)

 

 

문수.보현 동자상



도석도

 


금강역사상

 


금강 역사상

 


향좌측 1

 


향좌측 2



향좌측 협칸 1

 


향좌측 협칸 2

 


어칸 1

모란

 

 

어칸2

모란



향우측 협칸 1

 


향우측 협칸 2

 


향좌측 1

해바라기

 


향좌측 2

해바라기

 

 

 

석조부재.

불상대좌로 추정

 

 

부도전

쌍계사 중건기 비석, 석종형 부도 6기, 옥개석을 갖춘 부도 3기가 전합니다.

대좌의 모습이 너무 닮아 흩어진 부도를 수습한 후에 대좌를 후보하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당호가 전하지 않는다.

 

 

부도 주인공을 알 수 없다

 

 

당호가 알려지지 않는다.

 

 

당호가 전하지 않는다.

 

 

부도 주인공을 알 수 없다

 

 

 당호를 새기지 않았다.

 

 

옥개석 용문양이 이채롭다.

 

 

○○당혜찬대사지도 ○○堂慧粲大師之屠

 

 

당호가 있지만 마모가 심하여 육안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대좌도 본 모습은 아닐 것이다.

보주도 후보물로 추정된다.

 

 

매헌당대사각훈지도 梅軒堂大師覺訓之屠

상대,하대를 갖추었으며, 보주는 후보물이다.

상부에 복련과 보주 받침을 조출하였다.

  

 

쌍계사 봉황루 雙鷄寺 鳳凰樓에 걸린 노승의 시

(음과 해석은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등루부운 登樓賦韻


고루아독와 高樓我獨臥 나홀로 봉황루에 누워 있으니

심적상비천 心適上飛天 마음은 하늘을 날아 오르는 듯 하다. 


중수운유백 衆峀雲留白 산봉우리에는 흰 구름이 머물고

군계월영휘 群溪月影輝 계곡 곳곳에 달 그림자 비치네


석등명불실 夕燈明佛室 저녁 등은 전각을 밝게 비추는데

조우암선비 朝雨暗仙扉 아침 비는 선비(?)을 어둡게 하네


일상금지지 日賞金沙池 하루하루 금지지(?)에 젖어

신망속체귀 身忘俗諦歸 세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


건륭 사십 해월 일 乾隆 四七 亥月 日 1782년 12월 

춘파 노납 春坡 老衲  노승 춘파


(우리나라에 춘파 스님의 부도는 여러 기 있지만 동일 인물 여부는 추적하지 않았다)


2018.10.20

 

아래는

2007년 3월 11일 글

 

 

논산 쌍계사는  월정사,내소사,운문사처럼 아름다운 진입 동선이 없어도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편안한 까닭은 해질무렵의 시각적 색상과 어우러지는 작봉산을 비추고 있는 영지와 말없이 많은 말을 전해주는 부도밭 때문으로 믿고 싶다.

 

절집까지 밀어낼 듯한 사하촌의 경박한 상혼도, 밀려드는 인파의 요란스러움도 없는 한적한 산사를 독차지한 기분이다.

 

작봉산 쌍계사는 고려  광종 때 혜명대사가 창건으로 추정되며  대단히 번성하였으나 쇠락하고 고려말 다시 중건하였다고 전해온다. 중건은 당시 대문장가 행촌 이암 선생이 발원하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연기문(緣起文)을 적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후 병란으로 건물이 불탄 후 중건을 하고, 재차 불탔던 것을 조선 영조15년(1739년)에 이르러 현재의 대웅전을 비롯한 중건불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쌍계사 현판이 걸린 봉황루를 누하 진입하면  확트인 대웅전 중정이 전개되어 눈이 휘둥거려진다. 우리나라 어느 사찰에서 이렇게 넓은 중정이 있었던가? 한편으로 치우쳐진 요사 외에는 어떤 건물도 없다. 낮은 기단위에도 시각적으로 궁궐 전각 같은 대웅전과 명부전 산신각만이 빈자리를 매우고 있다.
 

 

이렇게 중정을 비워 둔 내력이 없을까?

쌍계사 대웅전은 풍기 성혈사.강화도 정수사.부안 내소사와 더불어 꽃창살이 아름다운 절집으로 회자되어 탐승객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가람이다.

 

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이놈의 화상 고운 꽃창살에는 눈길 주지 못하고 엉뚱한 신체부터 살핀다.

삼단으로 된 막돌 바른쌓기 기단위 대웅전은 5칸*2칸 겹처마 팔작 지붕으로 정면 5칸에 여닫이 문, 양측면에는 외여닫이문을 내었다.

 

 

정면만 아름다우면 화장발,성형 미인이라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지 못해 머리끝도 바라본다.


 

물론 옆모습도 살핀다. 덤범주초에 민흘림 기둥이다.

외여닫이문은 우리네 고향집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띠살문이다.


 

문을 열고 바라본 내부는 감히 입을 다물지 못할 전경이 펼쳐졌다.

이렇게 화려한 대웅전 내부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노릇이다.


주불인 석가모니불과 협시불로 모신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에는 각각 보궁형 닫집을 꾸몄다.

닫집에 적멸궁(寂滅宮), 만월궁(滿月宮), 칠보궁(七寶宮)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적멸궁은 석가여래, 만월궁은 아미타여래, 칠보궁은 약사여래불의 상주처다. 닫집은 붉은색으로 칠하였고 용, 가릉빈가가 꾸며 놓고 화려하게 단청을 하여 장엄함을 강조하였다.

자세히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몇 손가락안에 꼽힐만한 닫집으로 생각된다.

 

궁궐, 민가의 문살에도 꽃창살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검소하고 소박한 사찰의 요사에 비하면 금당 문살은 화려하고 장엄하다.

물론 다양한 상징성을 함축하고 있는 꽃창살이다.


어칸 솟을 모란 꽃살문

 

모란은 부귀, 영화를 의미한다.


모란 연꽃창살(어칸 좌측)

 

국화꽃살문(맨 좌측)

 

국화는 은일화 또는 옹초(翁草)라고도 하며 고상함과 품위 장수를 상징한다.


빗 모란연꽃 꽃살문(어칸 우측)

 

일반 민가에서 연꽃은 군자로 받아들여지지만 불교에서는 처렴상정, 연화화생과 더불어 민속에서 통용되는 다산(多産),풍요 등을 의미한다.


국화꽃살(맨 우측)

 


 

긴 그림자를 그리며 나를 바라보는 부도에 젖어 대웅전의 아름답고 장엄한 꽃창살과 화려한 닫집에서 받은 감정, 느낌 모두 내려놓고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그렇게......

 

2007.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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