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논산시

논산...개태사

임병기(선과) 2018. 11. 3.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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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 앞 1번 국도를 여러번 지나쳤지만 답사기는 2007년에 다녀온 글만 남아 있다.

어언 10년이 지났구먼...

 

개태사

 

"개태사(開泰寺)는 936년(태조 19)에 고려의 왕건이 후백제를 제압하고 세운 사찰이다. 근래에 들어와 수차례 발굴 조사되었는데, 최근 법당 등을 복원한 개태사 구역과 원래의 개태사지로 구분된다. 개태사지는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있는 현재의 개태사로부터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있다.

 

개태사에 전하는 문화재로는 석조삼존불입상과 오층석탑, 철확 등이 있고 개태사지에서는 석조공양보살상과 석조(石槽) 등이 수습되었다. 개태사 마당에 세워져 있는 오층석탑은 개태사지에서 옮겨온 것인데, 원래는 석조공양보살상과 한 짝을 이루고 있었다. 즉 이 석탑 앞에 석조공양보살상이 탑전 공양보살상의 형태로 놓여 있었다. 현재 석조공양보살상은 개태사지 부근에 위치한 용화사 법당에 봉안되어 있다. 석조공양보살상은 두부가 결실되어 있으며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형상이다.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세워져 있는 현재의 개태사 구역은 936년 태조의 명으로 창건되기 시작하여 940년 완공되었다. 개태사 북쪽에 위치한 개태사지는 태조 사후에 정비된 지역이다. 개태사지는 불전지와 진전지로 구분되며 중앙에는 출입시설이 있었다. 주요 출입구가 진전지와 불전지 사이에 위치해 있는 점으로 보아 두 사역(寺域)은 동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개태사지는 출토된 막새를 통해서 조성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출토된 기와 중 가장 시기가 이른 것은 꽃술대가 시문된 수막새 기와이다. 이 기와는 954년(광종 5)에 창건된 충주 숭선사지 초창기 기와와 매우 유사하다. 충주 숭선사지를 비롯하여 청주 흥덕사지, 안성 봉업사지 등에서도 동일한 문양의 막새기와가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막새기와가 출토된 지역은 954년을 전후한 시기인 광종 재위 전반기에 창건되거나 중수된 사찰로 보는 것이 통상적이다. 따라서 개태사지 석조공양보살상 역시 광종대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태조 왕건이 개태사의 낙성을 기념해 직접 작성한 「개태사화엄법회소」에 따르면, 일리천 전투에서 패배한 후백제의 신검이 마성(馬城)에 주둔하고 있었던 왕건에게 와서 항복을 청하였다고 한다. 신검이 항복을 청한 장소는 당시 고려군 지휘부가 주둔했던 왕건의 숙영지라 할 수 있는데, 현재 개태사 주변에 있는 토성이 바로 마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특히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세워진 자리가 마성의 중심부에 해당하는데, 이 위치가 바로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한 장소로 추정된다. 즉 이곳 개태사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백제로부터 최후의 항복을 받은 역사적 장소이며, 마침내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상징적인 장소인 셈이다.


개태사에 관한 역사 기록은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과 관련하여 다시 등장한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하였다. 이후 피난에서 돌아오던 길에 공민왕은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를 확신하기 위해 태조영전이 있는 개태사에 신하를 보내어 천도에 관한 점을 치게 하였다. 결국 불길한 점괘가 나와 천도 계획은 중지되었다. 한편 1383년(우왕 9)에는 왜구 천여 명이 내륙으로 들어와 보은을 거쳐 개태사를 경유해 계룡산에 웅거하였으며, 창왕 즉위년에는 개태사에 침범해 노략질하기도 하였다. 후삼국 통일을 기념해 태조 왕건이 세운 개태사는 고려 말기까지 거찰의 규모를 유지하며 지역의 거점 사찰로서 기능하였지만, 고려말 왜구의 약탈과 방화로 급격히 쇠퇴하였고,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폐사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오층석탑

개태사지에서 1946년 옮겨온 석탑으로 개태사지 공양보살상이 봉안된 불전지 앞에 있었던 탑이다.

즉, 940년 개태사 창건 이후 광종대에 조성된 탑이다.

 

 

개태사지 (2016.3.27일 촬영)

 

 

개태사지 공양보살상 (2016.3.27일 촬영)

 

 

기단부와 초층탑신은 후보물이다.

추녀와 처마의 반전이 뚜렷하다

낙수면 물매는 급하며 옥개석 상부에 탑신 굄이 생략되었다.

층급받침은 위로부터 2.3.4.4 이며 얕게 새겼다.

 

 

탑신에는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상륜에는 노반과 보주가 남아 있다.

 

 

 

모든 자료의 내용과 달리

5층탑신과 4층옥개석은 일석 아닌가?

 

 

극락대보전

2007년 답사기에는 용화보궁 현판 이었다.

당시에는 미륵불로 모셨는데, 왜 극락대보전 아미타불로 봉안하였을까?

 

그렇다면

관촉사 미륵보살상도...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

후백제로부터 항복을 받고 후삼국 통일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개태사에 세운 삼존불로 940년이라는 절대년도를 알 수 있다.

본존불 좌우에 협시보살을 두었으며, 본존불은 방형연화대좌, 협시보살은 팔각연화대좌이다.

 

또하나

삼존불 모두 이마 위쪽에 한 단의 턱이 보인다.

분명 보관을 쓴 흔적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불.보살 뒤편 대좌 홈은 광배일까?

 

 

본존불

 

 

우협시보살

 

 

우협시보살

 

 

좌협시보살

 

 

좌협시보살

 

 

개태사 철확

 

 

2007년 답사기가  마음에 든다

 

"개태사에서 사용하던 철솥으로 우여곡절 끝에 제자리를 찾았다.

솥의 규모로 미루어 왕건이 백제 유민을 위무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승려를 동원했는지 여실히 증명된다.

가뭄에 솥을 옮기면 비가 온다는 아름다운 전설도 간직한 솥이다.

 

그나저나 훗날 염라대왕이 솥을 보긴보았지만 엉터리로 보았다고 다시 이승으로 보내주실려나......"

 

 

이번 동호회 답사의 가장 큰 화두는

삼존불 뒤편의 대좌 홈은 광배홈이냐 아니냐로 귀결 되는 듯

아직도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2018.10.20

 

아래는

2007년 3월 11일 글

(오류도 있지만 수정하지 않았다)

 

 

백제의 옛터전에 화랑의 정기 맑고~~~~~, 28년이 지난 지금도 논산훈련소가가 흥얼거려진다.

대한민국 많은 젊은이가 다녀간 그 곳은 언제라도 깊은 추억에 젖게한다. 빡빡머리 푸른 제복에 내 젊음을 처음으로 담보했던 놀뫼!!!

 

황산벌,

넓은 들은  민초들에게 풍요로운 수확 보다는 패망의 쓰라린 아픔만 안겨준 비운의 전장터 였다.  

패망한 나라 백성 위무책으로 왕건은 놀뫼 요소요소에 거대불을 조성하여 아픔을 보다듬는  왕실의 모습을 전개했다.

 

동상이몽. 새로운 문화사조라고 거창한 타이틀이 아니라도 솔직하게 통치철확을 홍보했으면 좋았을 텐데,

어디 뭐 패망국의 국민은 머리도 없었겠는가?

그대들은 관음이지만 우리는 미륵이라우!!!


오층탑

 

복원이 잘 못 되지 않았을까? 이제는 전국 문화재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와 고증이 있어야 하겠다.

비제도권시 그렇게 귀에 쏙쏙들어오는 말씀만 했던 분이 이런저런 문화유산 정책에 대한 비젼은 고사하고 엉뚱하게도 우리문화유산을 뜨겁게 사랑하는 님들에게 헌법 개정 홍보 메일을 집단으로 발송하고도 눈만 멀뚱멀뚱 하고 있다. 

 

기단도 없이 지대석위에 올린 탑. 경제적 지원없는 상황에서 최선이었다면 이제는 바로잡아주자. 

사시로 비뚠 시각의 눈에는 최소 7층탑으로 보이는데 전문가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개태사지 제일 북쪽에 있던 것을 1930년 이후에 천명보살에 의해 현재 위치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배례석이 없으면 어때? 불상대좌? 아니면 뒤집힌 다른 용도의 부재?

제자리가 아니라도 좋으니 양복 입은 몸에 갓은 얹지 않았으면...


삼존 석불

 

고려왕실 국정홍보처의 용의주도하고 면밀한 지속적 홍보 노력에도 불구 효과는 제로였다.

보아라.

지금 왕실 바램과 달리 삼존불은 미륵불로 모셔져 용화보궁에 계시지 않는가? 

정치도 법도 물 흐르듯 두면 되었을 것을...

 

지금은 제모습을 찾았지만  본존불은 허리가 잘리고 협시불은 목이 잘린 상태였다고 한다.

본존은 복련을 새긴 방형대좌 위에 서 있다. 소발,육계가 넓고  미소가 보인다.  

둔중하다는 느낌이 들면서 경주 괘릉 석인상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조화인지???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들이 그러했듯이 건장한 느낌은 고려를 건국한 집단의 자신감의 표현이다. 

왼손은 배에 대고 무엇인가를 잡고 있고 오른손은 시무외인 수인이지만 양손은 크게 묘사되었다.
 

 

협시불은 복련을 새긴 팔각연화대좌 위에 서있다. 

둔중한 주불에 비해 왜소하며 부드럽게 보여진다. 

수인은 여원인, 시무외인으로 보인다. 


 

밀려드는 참배객 행렬로 용화보궁을 벗어났지만 정법궁?,우주정?, 팔각정?은 정이 가지 않고 축대밑에  외롭게 자리한 부재만 눈에 들어온다.

 


철확

 

개태사에서 사용하던 철솥으로 우여곡절 끝에 제자리를 찾았다.

솥의 규모로 미루어 왕건이 백제 유민을 위무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승려를 동원했는지 여실히 증명된다.

가뭄에 솥을 옮기면 비가 온다는 아름다운 전설도 간직한 솥이다.

 

그나저나 훗날 염라대왕이 솥을 보긴보았지만 엉터리로 보았다고 다시 이승으로 보내주실려나......

 

2007.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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