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논산시

논산...반야산 관촉사

임병기(선과) 2016. 4. 20.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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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촉사.

어쩌면 절이름보다도 은진 미륵으로 널리 알려진 사찰 아닐까?

 

관촉사는 조계종 제6교구  마곡사  말사이다. 968년(광종 19) 혜명(慧明)이 창건하였으며 은진미륵과 관련된 창건설화가 전해온다.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보았더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속으로부터 솟아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바위로 불상을 조성할 것을 결정하고 혜명에게 그 일을 맡겼다.혜명은 100여 명의 공장과 함께 970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006년(목종 9) 불상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불상이 너무 거대하여 세우지 못하고 걱정하던 어느날, 사제총에서 동자 두 명이 삼등분된 진흙 불상을 만들며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먼저 땅을 평평하게 하여 그 아랫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그 중간과 윗부분을 세운 다음 모래를 파내었다. 혜명은 돌아와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불상을 세웠다.

 

그런데 그 동자들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화현하여 가르침을 준 것이라고 한다.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 주었고 서기가 21일 동안 서렸으며, 미간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다. 중국의 승려 지안이 그 빛을 좇아와 예배하였는데, 그 광명의 빛이 촛불의 빛과 같다고 하여 절이름을 관촉사라 하였다.

 

 관촉사 사적기에 따르면 1386년(우왕 12) 법당과 정문이 중건되었으며, 1581년(선조 14)에는 백지가, 1674년(현종 15)에는 지능이, 그리고 1735년(영조 11)에는 성능이 각각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방 다문. 동방 지국

 

 

남방 증장. 서방 광목

 

 

천왕문 옆 해탈문

사찰 진입 공간이 전각이 아닌 경우는 드물며 관룡사에 비슷한 사례가 있다.

 

 

대광명전

 

 

비로자나불, 노사나불,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다.

 

 

반야루

불광보조(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온누리에 비추다) 현판이 걸려 있다.

 

 

윤장대輪藏臺

어려운 불경을 읽지 못하는 신도들을 위해 경전을 넣어 돌리기만 하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는 상징으로 예전에는 예천 용문사를 비롯 몇몇 사찰에만 있었으나 현재는 전국 많은 사찰에 조성되어 있다.

 


사적비.

1743년(영조 19) 승려 각혜와 속인으로 구성된 불량계원(佛粮契員) 다수가 참여하여 세운 비석으로 불상과 관촉사 창건배경과 불상 건립 기간이 각자되어 있다. 귀부위에 방형 비좌를 두고 대리석의 비신을 세웠으며 우진각지붕이다. 측면에는 관촉사사적비명이 새겨져 있다.


 

은진미륵.석등.석탑

 

 

오층석탑

3층(?) 탑신과 옥개석이 결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초기 석탑이다.

지대석과 하대저석은 매몰된 상태이며 하대면석과 갑석은 일석으로 면석에는 안상이 조식되어 있으며 훼손이 심한 갑석 상부에는 2단 괴임이 있다. 상층 기단 면석에는 1개 탱주,양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상대갑석 1단 괴임위에  별석으로 괴임을 두었으며,연화문을 복엽으로 새겼다. 탑신에는 우주가 조각되어 있고, 옥개석 층급은 3단이며 받침이 깊숙이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보주만 올려져 있다.



 

배례석

장방형으로 일석으로 조성되어있다. 저석에는 괴임을 두고 중석에는 가로면 3개, 세로변 2개 안상을 새기고 귀꽃을 표현하였다.상면에는 복판 8엽 연화문이 조식되어 있다.

 

 

 

석등

미륵불과 동시대에 조성된 석등으로 추정된다.

여러매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방형기단을 두었다.기단에는 3매의 안상을 새기고, 상면에는 복련을 장식하였으며 위에 2단 괴임을 두었다. 백제계 고복형 석등의 변형으로 보이는 간주석은 원형으로  상부에 2개, 중앙에 3개, 하부에 2개 원형의 돌대를 조출하였다. 중앙 돌대에는 8송이의 꽃이 피어 있다.

방형 상대석 하면에는 앙련이 장식되어 있고, 2층의 화사석은 사각이며, 옥개석도  이중으로 되어 있다.  옥개석 모서리에는 귀꽃이 조각되어 있다. 상륜에는 화염문을 새긴 보주를 두었다.


 


 

 

 

 


미륵불

968년에 조성된 미륵보살 입상으로 알려져 있다.

원통형의 높은 관을 썼던 흔적이 남아 있다. 즉 상호와 보개 사이가 거칠게 처리되어 미완성인 처럼 보인다.

이러한 까닭은 원통형금속제 보관이 둘러져 있었으나 결실된 모습으로 보관의 이탈 방지를 위해 거칠게 치석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위에는 이중으로 왕관 모양의 보개를하고  모서리에는 풍경이 달려 있다.

상호는  삼각형 모양으로  옆으로 길게 돌아간 눈과 넓은 코, 일자로 꽉 다문 입술은 강인한 모습이다.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수인은 오른손은 위로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아미타불의 중품하생인 처럼 보인다.

오른손에 연꽃을 들고 있고, 곱슬  머리카락,귀위에는 보발이 표현되어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단조롭게 표현되어 있다


결실된 원통형 보관에는 화불이 표현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수인으로 미루어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인 관음보살일텐데...
 

 

기단부


 

 

 

 

 

관음이 미륵으로 불려지는 까닭은?

(예전 글에서도 언급했던 내용으로 근거 없는 개인적인 관점이다)


왜 광종은 황산벌이 눈앞에 전개되는 관촉사에 관음보살을 조성하였을까?

황산벌은 계백장군, 후백제의 신검이 최후를 맞은 백제의 고토로 백제의 혼이 서린 땅이다.또한 자신이 개국한 후백제를 버리고 고려땅에서 생을 마감한 견훤이 묻히고 싶었던 곳도 이곳으로 지근에 무덤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도 후삼국을 통일 후 가장 먼저 창건한 사찰도 이곳의 개태사 아닌가?

개태사 창건과, 관촉사 관음보살 조성은 우연의 일치일까?


고려초기의 혼란된 정세를 바로잡은 광종은  왕권강화의 상징과 전장에서 목숨잃은 사람들의 혼을 달래주며, 백제고토 민초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위무한다는 명분으로 거대한 관음보살을 봉안하였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백제인이 고려 사람이 되겠는가?


고려왕조에서는 모든 소원을 들어 주는 관음으로 조성하였지만, 백제계의 석수장이들은 그들의 원한과 고토 복원을 꿈꾸며미륵불로 모셨을 것이다. 그러한 유민들의 바람이 흘러흘러 미륵불로 불려지지 않았을지.

즉, 백제 사람들에게는 관음이 미륵인 것이었다.

 

 

구전되는 설화에 염라대왕은 저승에 논산 사람들이 오면 개태사의 가마솥,강경의 미내다리,관촉사 은진미륵을 보았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나는 논산 사람이 아니지만 오래전에 모두 뵈었기에 극락행 반야용선의 VIP석은 당연하겠지?


201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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