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논산시

논산...개태사지 공양보살상

임병기(선과) 2016. 4. 2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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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넘새님과 나눈 대화

 

-천호리 비로자나불 사진이 없어 가보아야겠다.

-형님 비로자나 아닙니다. 공양보살상입니다.

-내가 직접 보았는데...

-내려가면서 가 보입시더.

 

나이탓 하기에는 아직 청춘인데

2007년 글에는 공양상이라고 했거늘...

 

 

개태사지에는 황량한 바람만 일고 찾는 사람의 발걸음이 끊어지진지 오랜 듯 하다. 전국 대부분 폐사지에는 새로 창건한 사찰이 있지만 참배객이 드문 편이지 않는가? 답사 동선도 폐사지에만 한정되어 있고... 개태사에 옮겨간(?) 삼존불과 철확 석탑 때문일까? 

 

개태사지 석조

 

개태사지 표지석 윗동네 담장가에 누워 있다.

숨겨진 이야기의 편린같은  낙엽을  가득 담고서...


석축

 

옆집 장독대 뒤란에는 개태사지 석조부재가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으며,

석축 위 밭고랑에도  널부러져 있었다.

개태사지

 

세태가 그러한들, 시절 인연 탓으로 돌려버려야지. 답답함도 서러움도 업인 것을... 

 



연산 천호리 비로자나석불/문화재청

 

 

급히 올라와 카메라를 두고 왔다.

예비 카메라로 촬영했지만  인연이 아니었는가 보다. 후덕한 보살님이 계신 개태사지 끝자락 작은 절집 이름도 다이어리에 메모되지 않았다. 복원된 얼굴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업보인가?


흔치 않은 자세로 왼무릎은 세우고 오른무릎은 꿇은 좌상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강원도 사굴산문 사찰에서 보이는 공양 보살상 자세와 비슷해보여 어떤 관련성이 얼핏 뇌리를 스친다. 

 

개태사에 가시거든 개태사 옛절터도 거닐어 보세요.

 

2007.03.11

 

 

*이 글을 올리기전 옛님서재 게시판에 흔별님이 올린 "논산개태사 공양보살상 연구.정성권" 논문을 참고로 했다.

 

 

여전히 출입로는 좁다.

옛기억을 더듬어 들어갔지만 동승한 님도 확신하지 못한다.

 

당간지주일까?

 

 

개태사지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 후 창건한 개태사와는 다른 절집이다.

비로자나 삼존과 철확이 남아 있는 개태사는 왕건이 창건 하였지만 개태사지는 왕건 사후 광종 재위시에 창건한 절로 추정되며 개태사의 오층석탑, 용화사의 천호리 비로자나불(문화재명)은 개태사지의 유물이라고 한다.

 

 

디지털 논산 문화대전 자료를 보자.

위의 논문과 달리 동일한 사찰로 보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왕건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어 "진전眞殿" 이라고 불리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왕건 사후 광종 재위시절에 중창 또는 새로운 사찰이 창건되었음을 시사한다.

 

태조 왕건은 936년(태조 19) 황산군(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서 후백제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후삼국을 통일한 후, 삼국 통일이 부처님의 은혜와 산신령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여 연산면 천호리개태사를 창건하기로 하였다. 『고려사』 태조세가 19년조에 따르면 “이 해 광흥사, 현성사, 미륵사, 사천왕사 등을 창건하고 또 개태사를 연산에 세웠다.”라고 되어 있다. 940년 개태사가 완공되자 왕건은 낙성화엄법회를 베풀고 친히 소문(疏文)을 짓기까지 하였다.

왕건은 이 소문에서 “부처님의 도움에 보답하고 산신령의 음조에 부응하기 위해 관청에 명하여 연궁(蓮宮, 사찰)을 건립하게 하였는데 산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 이름을 개태사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천호산개태사를 창건한 동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록에 의하면 개태사고려 태조 왕건의 영정이 봉안되어 ‘진전(眞殿)’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나라에 변란이 발생할 때에는 제사를 주관하였다. 또한 국가 대사에 대한 길흉을 점치는 사찰이었으며 공민왕의 경우 강화도로 천도하려는 마음으로 개태사에 사람을 보내 그 가부를 점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태사태조 이후로는 개경과 거리가 멀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며 우왕 대에 이르러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을 받으면서 방화·약탈되었고, 도원수 박인계가 왜구를 맞아 싸우다가 죽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세종의 불교진흥책으로 잠시 중흥의 기틀을 보였으나 그 뒤 폐허가 되었다.

개태사지 내에서 수습되는 백자편으로 보아 개태사는 고려 전기부터 조선시대까지 법맥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간 금당지로 추정되는 유구는 3차례에 걸쳐 중건되었으나 개태사에 대한 사적기가 남아 있지 않아 확실한 중건 시기는 파악할 수 없다. 이는 사찰 내의 다른 전각도 마찬가지이다.

1934년 여승 김광영(金光營)이 개태사지에 매몰되었던 삼존석불을 찾아내 세우고 개태사지 근처에 절을 짓고 개태도광사(開泰道光寺)라 부르기도 했으나 최근에 다시 개태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화사 대웅전에 공양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개태사지 공양보살상(문화재 지정명: 연산천호리비로자나석불)

 

우슬착지右膝着地

왼쪽 무릎을 세우고 오른쪽 무릎을 구부려 꿇어앉은 자세를 이른다.

 

전체적으로 살 찐 불신, 큼직한 손,  두꺼운  주름이 눈에 들어 온다. 상호는 후보하였고 목에는 목걸이를 걸었으며,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쳤다. 띠 매듭으로 이어진 습의는  양 다리 사이로 늘어졌다. 양쪽 팔뚝의 팔찌. 팔에는 완천腕釧으로 장식했다.

일견 지권인 처럼 보이는 수인은 연꽃가지를 등을 든 모습으로 공양상의 수인이다.

 

 

생각나는 불상이 없는가?

 

 

안성 매산리 미륵불

개태사지공양보살상의 법의를 모본으로 제작한 후대의 모습이다.

 

논산과 안성?

위의 논문에 의하면 왕건 사후 광종은 여러 사찰에 태조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최초로 951년 개경 봉은사에 우리에게 왕건불상으로 알려진 불상을 봉안하였으며, 그외에도 안성 봉업사(960~968), 문경 양산사(봉암사) 등에 모시고 왕권 강화와 왕건의 적자임을 온누리에 알렸다고 한다.

 

또한,왕건의 개태사 창건 상한년대를 940년, 봉업사지의 미륵불 조성시기를 960~968로 추정하여 개태사지 공양 보살상의 조성시기를 954~960으로 추정하였다.

 

 

 

개태사지의 사찰은

불전지佛殿址와 진전지眞殿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공양보살상은 개태사 오층탑과 함께 불전지 앞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완천으로 장식했다.

 

 

 

 

우슬착지

충주 가금면 봉황리 마애반가사유상군,양양 서림사지 비로자나불 불대좌, 홍천 물걸리사지 비로자나불 대좌, 남산 탑골 마애조상군의 공양상에서 보인다.

 

환조로는 구례 화암사 사사자 탑 앞, 구례 대전리, 구례 논곡리(정성권님은 누락)에서 보이지만 모두 승상이라고 추정한다.

이후 공양보살상은 개태사지를 최초로 신복사, 법천사,월정사에서 확인된다.

 

논문에서는

이런 지역에서 보이는 보살상은 태봉-고려-강릉으로 이어지는 장인의 계보로 보았지만 구례의 공양상과의 연관성은 언급이 없었다.

 

 

충주 봉황리

 

 

양양 서림사지

 

 

홍천 물걸리 비로자나

 

 

구례 논곡리

 

 

구례 대전리

 

 

구례 화엄사

 

 

신복사지

 

 

월정사

 

 

전국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늘 의문으로 남아 아마츄어 시각으로 감히 소설 한 편 각색하고픈 옛님이 서너 곳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사굴산문, 구례 화엄사, 논곡리, 대전리에서 보이는 공양상의 친연관계를 밝히는 것이 었다.

위에 언급한 논문으로 궁금증의 일부는 해소되었지만 속시원한 답은 얻지 못했다.

 

그나저나

왜 문화재 지정 명칭은 바꾸지 않을까?

 

201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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