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나들이 제황산 공원 정상의 진해탑에 오르기 전에 근대 역사거리에서 기웃기웃 발품을 팔았다. 일요일 오후 건만, 인적이 드문(?) 황량한 분위기의 거리에는 바람만 스쳐 지나간다. 무엇이 문제일까?
진해역 1926년 진해선의 개통과 함께 영업을 개시하였다. 이후 1961년에 해병대 전용선이, 1966년에는 진해화학 전용선이 각각 개통되었다. 2002년에는 역사의 보수가 있었으며 2005년 9월 14일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에 건립된 일반적인 지방 역사의 형식과 규모가 온전히 남아 역사적·건축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등록 문화재 제192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에는 마산과 진해를 잇던 통근 열차의 운행이 중지됨에 따라 KTX와 연계하는 대구행 새마을호의 운행이 개시되었다. 2012년 11월 1일에는 새마을호의 운행이 중지됨에 따라 폐지되었던 마산행 무궁화호의 운행이 재개되었다.
진해우체국 1910년 9월 진해 우체국이 개설되어 있었고, 성내 우체국과 경화 우체국도 있었지만, 거리가 멀어서 일본인들이 사용하기에 불편하다고 하여 현재의 중원로터리에에 새로 창원진해우체국을 건축했다고 한다. 1955년 9월 1일 객장(客場) 좌측 일부를 증축하였으나, 1984년 12월 21일에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복원하여 다시 증축부를 철거하였다.
흑백 다방 1912년에 건축된 일본식 2층 목조건물로 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던 고전음악다방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눈엔 입구의 돌확과 동자석이 눈에 들어왔다.
진해탑 제황산 공원 정상의 탑이다.
정상에는 일본이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하여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하기 위해 현해탄 해전의 기함이었던 미카사 전함의 마스트를 본 딴 전승 기념탑이 있었다. 1945년에 광복 이후 이 전승 기념탑이 남아 있는 것은 한국의 치욕이라는 여론에 따라 철거하고 1967년 9월 20일 우리의 해군 군함을 상징하는 콘크리트조 구층탑을 새로 건립하고 ‘진해탑’이라고 명명하였다.
진해탑鎭海塔 박정희 대통령 글씨.
창원시립진해박물관 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1층에는 시청각 교육과 박물관 관련 시민 강좌를 열 수 있는 세미나실, 유물을 보관하는 수장고, 사무실 등이 있다. 2층에는 토기·도자기·농기구 등이 전시된 역사 및 민속 자료실이 있는데, 진해 지역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용원 유적.웅천유적.구산성지의 유물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또한 금관가야 수롱왕의 비인 허황옥의 도래, 우리나라를 처음 밟은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의 상륙 모습 등을 실제와 같이 재현한 디오라마 및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사용한 중완구 등 총통 등을 전시하고 있다. 3층부터 8층까지는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오르내릴 수 있으며, 밖을 향해 개방된 각층에서는 아름다운 진해 시가지와 진해항을 바라볼 수 있다.
망주석 깊게 음각된 조선석朝鮮石 각자만 보고도 가슴이 뛴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꽤 공을 기울인 작품이다. 분명 대가집 민묘에 쌍으로 자리했을 망주석이다.
근접하여 명문을 확인하였다. 조선석 명치사십삼년팔월이십구일(朝鮮石 明治四十三年八月二十九日)
명치 43년 8월 29일은 일본이 대한제국 강제 합병을 공식 선포한 1910년 국치일(國恥日)이다. 우리나라 망주석에 국취일을 새긴 까닭은 무엇일까?
현장 안내문에서 발췌한 글이다. 이 망주석은 1910년(추정) 진해에서 일본군이 군사시설 정비과정에서 발굴(?)한 것을 일본 가고시마현에 있는 정한론(征韓論)의 주창자인 사이고다카모리 무덤으로 이전하였다가 다시 난슈신사에서 보관 관리하던 중 조선도공의 후손인 도예가 심수관 선생,가고시마현 야마구치 오사무 위원의 노력과 주일한국문화원,가고시마현의 협조로 2009년 12월 24일 기증형식을 통하여 환수하였다
제기럴 왜이리 기분이 찜찜하고 더러운 느낌인지!!!!!.
진해탑 내부의 입입금지 立入禁止 표석 1906년 10월 한성부윤 박의동을 위원장으로 한 진해만 군항지 조사위원과 일본측 위원이 마산 이사청에서 회동해 진해만 일대의 땅 점탈 절차에 대한 협의를 마쳤다.
회동직후 다시 도만이개에 상륙한 일본해군은 무력으로 주민들의 출입을 봉쇄하고 군항 경역의 입입금지구역에 대한 측량을 강행하였고, 측량이 끝난 곳에는 입입금짚 ㅛ석을 세워 조선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측면 해 구호 海 九號 명문으로 미루어 여러 곳에 세웠음을 암시한다.
부끄럽게도 일제강점기의 진해항의 침탈에 대한 과거사를 처음 접했다. 난 아직 멀었다!
2018.10.14 디지털창원문화대전을 참조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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