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경주와 더불어 답사객의 메카이며, 여행객의 1순위 여행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답사 문화가 정착하기 전인 30여년 전에 인연을 맺고 이후 몇 차례 순례하였지만 마지막 답사가 사하촌에 연지가 조성되기 전이 었다. 오늘 부석사를 찾은 까닭은 예전에는 비관심 분야이어서 스쳐 지난 아니 존재도 몰랐던 동,서부도전을 들리기 위해서다. 부석사는 삼국유사,삼국사기를 비롯 고서와 부석사에 유존하는 묵서,원융국사비 등을 통해 창건과, 중수가 비교적 정확하게 전한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676년 문무왕재위시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였으며, 이교도 집단의 반발이 있었으나 선묘낭자의 기지로 물리쳤다는 창건설화가 전한다. 이후 경덕왕(742~765 재위) 때 대가람의 위용을 갖추었으며, 석탑,석등 등의 현존 유물은 9세기 후반인 경문왕 때 조성된 불사로 추정한다. 한편, 898년에는 태봉의 궁예가 부석사의 신라왕 벽화를 훼손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이후, 부석사는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병화와 화재로 중수와 중건을 거듭하였다. 특히 부석사 동쪽에 유존하는 원융국사바문에 따르면 국사가 부석사에 주석하였던 1041년~1053년 간에 당우를 중창하고 대장경을 발간하였다. 또한 고려시대 유물인 봉황산부석사개연기, 조사당 중수기.에도 많은 불사의 기록이 전한다. 조선시대에도 1723년 아미타불 개금을 비롯한 중수가 지속되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석사 배치도(출처/유네스코 등록을 위한 한국의 전통산사 홈) 산지가람의 지형 특성을 활용하여 대석단을 쌓고, 현재으 배치는 천왕문, 범종루, 무량수전,자인당, 동서 선원 구역,동.서부도전으로 크게 구획하였다. 세계문화유산 국내학술대회(2015.09.04)에서 "부석사의 불교문화유산과 가치"라는 주제로 발표한 부산대 양은경교수는 부석사 가람배치와 가람구성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대별하였다. -.산지형 가람이다. -.회랑이 생략되었다. -.건축물들이 종축선에 위치한 대칭배치가 아니다. -.대석단이 가파른 경사를 이룬다 -.무량수전의 좌향이 자오선상에서 비슷한 각도를 이룬다. -.창건 당시에는 탑이 없었다. -.무량수전은 남향,본존불은 동향하고 있다. 또한, 예전 가람배치와 관련하여 우리 카페에서도 설왕설래하였던 김봉렬교수의 글을 리마인드하기 위해 가져 왔다. 가람의 장면...김봉렬<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건축적 공간은 내부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사지를 깍아서 석축을 쌓으면 바닥의 수평면과 석축의 수직면이 생긴다. 수평면과 수직면이 일정한 비례로 조화를 이루면 일정한 공간적 느낌이 생기고, 이를 건축적으로는 외부공간이라 부른다. 특히 한국건축은 좁은 내부공간보다는 시원한 외부공간을 중요한 요소로 여겨왔다. 흔히 우리가 마당이라고 부르는 뜰이 대표적인 외부공간이다. 마당은 건물들의 벽면 사이로 만들어지는 외부공간이지만, 부석사의 경우는 웅장한 석단들로 만들어지는 특별한 외부공간들이다. 소수의 건물들 밖에는 없지만 가람 전체가 꽉찬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이 석단들이 만드는 외부공간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부석사 건축의 주인공은 건물이 아니라 바로 석단들이다.
부석사의 가람배치를 화엄과 정토사상으로 각각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며, 부석사 홈페이지 글을 가져왔다. 1. 부석사 구조의 신앙적 배경은 정토신앙인가, 화엄사상인가? 다수의 불교학자 및 김봉렬 등이 첫 번째 설을, 이원교·배병선 등이 두 번째 설을 지지하고 있다.
화엄사상에 입각한 설은 의상 조사가 직접 창건한 사찰로서 그가 펼쳤던 화엄 사상과 건축 공간 사이에 연관이 있을 거라는 주장이다. 우선 부석사가 위치한 태백산 주변의 산 이름-도솔산, 비로봉, 연화봉-에서 화엄경의 이상향을 이르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부석사의 전체 가람 구조는 화엄경의 34품, 8회, 10지의 각 단계에 따라 공간들이 만들어져 있다고 본다. 그리고 부석사의 주불전은 무량수전으로 독존의 아미타여래를 동향으로 모시고 탑을 세우지 않았다. 화엄경 맨 마지막 장에는 화엄경의 주인공인 보현보살이 비로자나불과 함께 아미타여래를 찬양하고 극락 세계에 귀의할 것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다. 아미타여래는 서방의 극락세계를 관장하고 있기 때문에 무량수전의 아미타여래를 서쪽에 모셔 동향하도록 하였음은 철저히 교리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2. 부석사의 석단은 과연 몇 단인가? 3. 부석사의 진입 과정중 안양루 아래부분과 윗부분의 축이 꺽여져 극적인 풍경을 이루고 있는 이유는? 4. 안양루 앞에는 대적광전이 있었다? 말하자면, 산문을 거쳐 장대한 계단과 누각 밑을 지나 정점에 오르면 법당에 이르러 일단 멈춘 흐름이 다시 뒤쪽의 안양루로 유도되어 무량수전에 다다르게 되는, 두 번의 클라이막스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이 전체를 두 영역으로 해석해 보면, 전체 석단이 다시 두 개의 대석단으로 구분되는 이유도 분명해진다. 평면적으로 굴절된 축과 함께 단면적으로 조성된 대석단이 아래 위 두 절을 입체적으로 중첩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러한 구성은 하나의 효과를 위해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형의 체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교리적 내용도 상징화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일주문 이른 아침,바삐 움직이는 사하촌 가판대 할머니들과 달리 부석사로 향하는 길은 나만의 공간이다. 몇번의 답사때에도 느껴보지 못한 여유롭고 한적한 길이건만, 관광객이 드물 때 더 많은 장면을 담을려는 욕심이 발길을 재촉한다.
1977년 불사이전의 일주문은 현재 천왕문 자리었다고 한다.
노란은행잎, 빨간 사과사과가 어울리는 만추에 버금가는 초여름의 진입로.
부석사 중수 공덕비 관광, 등산 오시는 분들 께서는 탑,석등, 부도, 비석 위에 제발 돌 좀 올리지 마세요.
당간지주. 내외부에 특별한 장식문양이 없으며, 상단부분은 모죽임 하였다. 측면에는 세줄 선을 양각하였고. 안쪽 상부에는 간구를 마련하였다. 간대 방형의 부재 상부에 복련을 새기고 원형 당간 홈을 내었다.
상부의 간구
통일신라 9세기 작품으로 전한다.
당간지주.천왕문 진입로 천왕문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두번째 통과의례를 주관하는 천왕 1980년대에 일주문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동방 지국천.남방 증장천
서방 광목펀.북방 다문천
회전문廻轉門 대석단 위에 가로로 길게 세운 건물로 2013년 복원되었다. (전)부석사성보박물관 학예사이었으며, 현재 송관사성보박물관 학예사로 근무중인 김태형님(개인적으로는 페친)은 미디어 붓다에 연재한 "부석사 이야기"에 회전문에 관한 이야기가 게재되어 있다. "먼저 기록으로 남은 조선후기의 부석사 가람배치를 보면 먼저 임진왜란 직후에 쓰인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이 남긴 『계암일록(溪巖日錄)』을 보면 1615년 7월 부석사는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취원루, 동쪽에는 전각(응향각)이 있었고 중앙에는 안양루와 그 아래 계단 법당이 있었고 그 아래에 범종각이 있었다. 범종각 아래에는 사천왕상이 봉안된 회전문, 그 아래는 문수와 보현보살의 탱화(벽화)가 있는 조계문과 그 옆에 흥복료가 있으며 그 아래에 일주문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무량수전 동북쪽에 조사당이 있으며 서쪽으로 수십 보를 가면 영산전과 작은 암자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계암일록』보다 후대에 기록된 『재향지(梓鄕誌)』에 따르면, 금당(金堂: 무량수전) 서쪽에 취원루(聚遠樓)가 있으며 취원루 북쪽에 장향대(藏香臺)가 있고, 금당 동쪽에 상승당(上僧堂)이 있고, 금당 뜰에 광명대(光明臺: 현재 국보 제17호 석등)가 있고, 그 앞에 안양문(安養門)이 있다. 문 앞에 법당(法堂)이 있는데, 법당의 왼쪽은 선당(禪堂)이고 오른쪽은 승당(僧堂)이다. 그 앞에 종각(鍾閣: 범종각)이 있다. 종각 아래에 또 대여섯 곳의 당실(堂室)이 있는데, 회전문(廻轉門)ㆍ조계문(曹溪門)이 있다. 또 그 아래 수십 보쯤에 일주문(一柱門)이 있고, 그 아래 1리쯤에 영지(影池)가 있다. 절의 누각이 모두 이 연못 속에 비친다. 조전(祖殿: 조사당) 서쪽에 영산전(靈山殿)이 있고, 또 그 서쪽에 은신암(隱神菴)이 있다. 그 아래 골짜기에 극락암(極樂菴)이 있다. 조전 동쪽 골짜기에 동전(東殿: 약사전)이 있고, 동전 뒤에 국사비(國師碑: 원융국사비)가 있다."
회전문 좌측 석단
회전문 우측석단
회전문에서 범종루 진입 구역
동.서 삼츨석탑 동부전 뒤족이 본래 위치며 1966년 자인당의 비로자나불 2기와 함께 옮겨 왔다고 한다.
동삼층석탑 2층기단의 삼층석탑으로 9세기 석탑으로 전한다.
지대석 하층기단 저석,중석이 일석, 혼합식으로 결구하였다. 양우주와 1주 탱주를 모각하였고, 갑석의 물매는 희미하며, 상부에 각호각 3단 괴임을 조출하였다.
상층기단 4매석으로 치석한 중석은 엇물림으로 결구하였고,양우주와 1주 탱주를 모각하였다. 약간의 물매가 있으며, 하부에는 부연 상부에는 2단 괴임을 조출하였다.
탑신 1매석이며, 양우주를 새겼다. 초층탑신에 비해 상층부의 체감률이 급격하다. 3층 탑신은 후보물로 추측된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가 급하며, 처마 전각의 반전은 경쾌하다. 상단에는 1단 괴임을 조출하였고, 하단에는 절수구를 두었으며, 층급받침은 전층 4단이다. 상륜 노반,복발,보주가 남아 있다
서삼층석탑 1966년 이건하면서 익산 왕궁리 5층탑에서 가져온 석존사리 5과가 분안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상륜부의 남아 있는 부재를 제외하고는 큰차이가 없으며, 동시대에 조성된 탑으로 추정된다.
하층기단
상층기단
탑신.옥개석
상륜부
지장전. 동부도전으로 향하는 길목이며, 부도전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관음전 선원을 경유 서부도전으로 향하는 길목이며 선원부터 출입금지 지역이다.
식사용정(食沙龍井) 종무소 뒤편 에 위치한다. 식사용정에 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매체에 김태형님의 글에 실려 있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도 선묘낭자 설화는 언급이 없고 다만 ‘부석 동쪽에 선묘정(善妙井)이 있고, 서쪽에는 식사용정(食沙龍井)이 있어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만 하였다. 아는 사람들은 알고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는 선묘낭자 관련 유적이 바로 ‘식사용정’과 ‘선묘정’이다.
食沙有井 龍神是宅. 식사라는 우물이 있으니 바로 용신이 머무는 집이다.
선묘정(善妙井) 미디어붓가에 실린 김태형님의 글이다. 식사용정과 함께 선묘의 설화가 담긴 우물이 바로 선묘정이다. 식사용정과는 달리 우윳빛이 아닌 맑은 물로 『청량산유록』에는 ‘왼쪽에는 선비정(仙妃井)이 있는데 한 선녀가 물을 길어 의상에게 아침저녁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선비로 이름을 지었다. 매번 입춘에 물이 차고 빠지는 것으로 풍년과 흉년을 점친다고 한다.
鳥啼花落減芳年(조제화락감방년) 새 울고 꽃이 지니 꽃다운 나이는 줄어들고
13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 두 우물이 마르지 않고 부석사의 법맥과 함께 하고 있다.
회전문 낮은 축단위 동서 삼층탑. 계단으로 올라서면 좌측 취현당. 우측 응향각, 범종루 계던 옆 괘불지주가 있다.
괘불지주 많은 사람들이 범종루 앞쪽에 금당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제기하는 괘불지주 실제로 겸재의 부석사도에는 금당이 있다.
취헌암과 석등부재 본래는 조사당 동쪽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으며,조선시대 사명대사의 수도처로 알려져 있다. 근자에 보수하였으나 옛부재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응향각
장경각
범종루 대석축단과 무량수전을 구획하는 중앙에 위치. 무량수전을 가로 막지 않고 측면으로 자리잡고 있다. 참배객의 시선으로는 분명 2층 루대의 팔작지붕이지만 누하를 통과하여 뒤돌아서면 맞배지붕이다. 범종각이 정면을 향하고 있으면 무겁고 답답했을 분위기를 방향과, 지붕으로 해결한 목수의 안목이 부러울 뿐이다.
덤벙주초, 누하주 계자난간과 궁창
2층 루대의 법고.목어, 운판 범종은 아래편 별도 전각에 있다.
맞배지붕, 마당과 평행으로 연결되는 마루 공간활용과 탁트인 시각적인 측면만을 고려한 가구이었을까?
문득 범종루를 세로로 배치한 까닭이 석축으로 끊긴 부석사의 맥을 잇기 위한 풍수의 비보책으로 생각되는 것은 왜인지...
(계속)
2018.0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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