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주시

영주...봉황산 부석사(1)

임병기(선과) 2018. 6. 28.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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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경주와 더불어 답사객의 메카이며, 여행객의 1순위 여행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답사 문화가 정착하기 전인 30여년 전에 인연을 맺고 이후 몇 차례 순례하였지만  마지막 답사가 사하촌에 연지가 조성되기 전이 었다. 오늘 부석사를 찾은 까닭은 예전에는 비관심 분야이어서 스쳐 지난 아니 존재도 몰랐던 동,서부도전을 들리기 위해서다.


부석사는 삼국유사,삼국사기를 비롯 고서와 부석사에 유존하는 묵서,원융국사비 등을 통해 창건과, 중수가 비교적 정확하게 전한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676년 문무왕재위시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였으며, 이교도 집단의 반발이 있었으나 선묘낭자의 기지로 물리쳤다는 창건설화가 전한다.


이후 경덕왕(742~765 재위)

때 대가람의 위용을 갖추었으며, 석탑,석등 등의 현존 유물은 9세기 후반인 경문왕 때 조성된 불사로 추정한다.

한편, 898년에는 태봉의 궁예가 부석사의 신라왕 벽화를 훼손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이후, 부석사는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병화와 화재로 중수와 중건을 거듭하였다.

특히 부석사 동쪽에 유존하는 원융국사바문에 따르면 국사가 부석사에 주석하였던 1041년~1053년 간에 당우를 중창하고 대장경을 발간하였다. 또한 고려시대 유물인 봉황산부석사개연기, 조사당 중수기.에도 많은 불사의 기록이 전한다. 조선시대에도 1723년 아미타불 개금을 비롯한 중수가 지속되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석사 배치도(출처/유네스코 등록을 위한  한국의 전통산사 홈)


산지가람의 지형 특성을 활용하여 대석단을 쌓고, 현재으 배치는 천왕문, 범종루, 무량수전,자인당, 동서 선원 구역,동.서부도전으로 크게 구획하였다.


세계문화유산 국내학술대회(2015.09.04)에서 "부석사의 불교문화유산과 가치"라는 주제로 발표한 부산대 양은경교수는 부석사 가람배치와 가람구성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대별하였다.


-.산지형 가람이다.

-.회랑이 생략되었다.

-.건축물들이 종축선에 위치한 대칭배치가 아니다.

-.대석단이 가파른 경사를 이룬다

-.무량수전의 좌향이  자오선상에서 비슷한 각도를 이룬다.

-.창건 당시에는 탑이 없었다.

-.무량수전은 남향,본존불은 동향하고 있다.


또한, 예전 가람배치와 관련하여 우리 카페에서도 설왕설래하였던 김봉렬교수의 글을 리마인드하기 위해 가져 왔다.


가람의 장면...김봉렬<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국립 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 최순우 선생은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명수필로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극찬한 바 있다. 건축 전문가들에게도 가장 뛰어난 사찰건축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영주의 부석사를 추천한다. 부석사에는 고려시대 목조 건물인 무량수전이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로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 다음으로 오래된 국보급 문화재며, 빼어난 형태적 비례와 정교한 축조기술로도 대단한 가치를 갖는 건물이다. 그러나 건축가들의 찬사는 무량수전 때문 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무량수전 보다 더 거대한 건축이 있기 때문이다.

부석사는 수만평에 이르는 광대한 대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건물로는 천왕문과 범종루, 안양루와 무량수전, 그리고 뒷산 숲속의 조사당과 응진전이 숨겨져 있을 뿐이다. 최근 요사채들과 성보전들이 신축되었지만 규모도 작고 한쪽에 자리잡아 그다지 주목할 대상은 못된다.

소백산 지맥의 한면을 차지할 만큼 광활한 대지에 불과 4동의 건물만이 서있다면, 마치 큰 호수에 가랑배 두세척이 떠 있는 것 같이, 보통의 솜씨로는 휑하고 스산한 가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절에 올라가면 모든 외부공간들은 꽉차 있다고 느끼고 만다. 왜일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의상대사는 소백산 깊숙한 곳에 부석사의 기틀을 닦고 화엄학을 전교하기 시작했다. 삼국으로 정립되어 600여년을 지속해왔던 한반도의 나라들이 드디어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 나라의 백성들은 문화적 차이와 적대감으로 완전한 사회적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 의상이 전교한 화엄학은 분열됐던 사회의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의상의 현실적 사상은 부석사의 가람구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 가람은 깊고 급한 경사지를 십여개의 거대한 계단식 석단들로 바꾸고 그 위에 건물들을 앉혔다. 전문가가 아니면 지나치기 쉽지만, 그 석단들의 적절한 높이와 웅장함이 부석사 가람의 주인 역할을 한다.


건축적 공간은 내부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사지를 깍아서 석축을 쌓으면 바닥의 수평면과 석축의 수직면이 생긴다. 수평면과 수직면이 일정한 비례로 조화를 이루면 일정한 공간적 느낌이 생기고, 이를 건축적으로는 외부공간이라 부른다. 특히 한국건축은 좁은 내부공간보다는 시원한 외부공간을 중요한 요소로 여겨왔다. 흔히 우리가 마당이라고 부르는 뜰이 대표적인 외부공간이다. 마당은 건물들의 벽면 사이로 만들어지는 외부공간이지만, 부석사의 경우는 웅장한 석단들로 만들어지는 특별한 외부공간들이다. 소수의 건물들 밖에는 없지만 가람 전체가 꽉찬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이 석단들이 만드는 외부공간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부석사 건축의 주인공은 건물이 아니라 바로 석단들이다.

그러나 무작정 석단들을 쌓았다면 지금과 같은 공간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신개발지의 택지 개발 현장과 같이 오히려 더욱 삭막한 장소를 만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람의 건축가들은 석단의 위치와 높이를 철저하게 원래의 지형에 맞추어 쌓고 다듬었다.
십여개 석단의 높이들은 서로 다르고, 석단이 위치하는 간격도 다르다. 높은 단 하나를 오르면 다시 낮은 단들이 나타나고 다시 높아지는 등, 매우 리드미컬하게 걸음을 조절한다.

가람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산술적 거리는 매우 길고 고저차도 심하지만, 부석사를 방문하는 그 누구도 힘들어하지 않는다. 율동적으로 배치되고 세워진 석단들 때문이다. 석단들은 바로 자연 지형의 생김새에 따라 세워진 땅의 건축이라 할 수 있다.

십여개의 석단의 정점에는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놓여진다. 하나의 장엄한 소나타와 같이 율동적인 오름의 정점에 위치한 두 건물의 아름다움도 대단하지만, 일단 안양루에 오르던지 무량수전의 기둥에 기대서 지나온 행로를 돌아봐야 한다. 이 장면이 바로 의상이 무량수전을 바로 이 자리에 앉힌 궁극적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는 눈 앞에는 구름 아래로 첩첩한 산들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곡선들을 겹쳐가며 대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 이쩌면 이처럼 장대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대할 수 있을까? 이 거대한 자연의 풍경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그처럼 수많은 석단을 쌓아가며 이 위치까지 올라오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대자연의 선물을 품에 안기 위함일 것이다.

소백산맥의 수많은 산줄기와 능선들이 무량수전을 향해 경배하고 있지 않은가. 누가 말했듯이 부석사는 가장 커다란 정원을 가진 가람이 됐다. 땅의 생김새에 충실하게 건축을 할 줄 알았고, 자연을 앞 뜰과 같이 이용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던 의상스님과 그 후예 스님들께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부석사의 가람배치를 화엄과 정토사상으로 각각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며, 부석사 홈페이지 글을 가져왔다.


1. 부석사 구조의 신앙적 배경은 정토신앙인가, 화엄사상인가?
부석사의 독특한 구성 방법을 해석하는 견해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정토신앙(淨土信仰)의 체계에 의거하여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삼고, 삼배구품(三輩九品)의 교리에 따라 전체 영역을 9개의 단으로 구성했다는 설이고,두 번째는 화엄경 입법계품의 십지론을 근거로 10개의 단으로 구성했다는 설이다.


다수의 불교학자 및 김봉렬 등이 첫 번째 설을, 이원교·배병선 등이 두 번째 설을 지지하고 있다.


정토신앙에 근거한 설은 부석사에 화엄 사상에 관계된 유물이 없고, 시기적으로도 화엄종이 체계를 잡기(9세기) 훨씬 전에 창건되었으므로 당시 일반화되었던 정토신앙을 근거로 삼았으리라는 시각이다. 석단도 회전문부터 무량수전까지의 9개의 단을 회전문(터)-범종각-안양루라는 결절점들에 의해 3-3-3의 구성으로 본다. 이것이 무량수경에서 말하는 삼배구품설의 구조와 대응되며, 9품왕생의 최고 단계인 상품상생의 경우는 무량수전의 내부를 뜻한다. 내부에 들어가면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는 아미타여래를 만나게 되어 진정한 극락왕생의 염원을 이루게 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화엄사상에 입각한 설은 의상 조사가 직접 창건한 사찰로서 그가 펼쳤던 화엄 사상과 건축 공간 사이에 연관이 있을 거라는 주장이다. 우선 부석사가 위치한 태백산 주변의 산 이름-도솔산, 비로봉, 연화봉-에서 화엄경의 이상향을 이르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부석사의 전체 가람 구조는 화엄경의 34품, 8회, 10지의 각 단계에 따라 공간들이 만들어져 있다고 본다. 그리고 부석사의 주불전은 무량수전으로 독존의 아미타여래를 동향으로 모시고 탑을 세우지 않았다. 화엄경 맨 마지막 장에는 화엄경의 주인공인 보현보살이 비로자나불과 함께 아미타여래를 찬양하고 극락 세계에 귀의할 것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다. 아미타여래는 서방의 극락세계를 관장하고 있기 때문에 무량수전의 아미타여래를 서쪽에 모셔 동향하도록 하였음은 철저히 교리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2. 부석사의 석단은 과연 몇 단인가?
이와 같이 정토신앙과 화엄사상 근거론의 쟁점은 부석사 전체를 이루고 있는 석단의 구성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현재의 천왕문부터 무량수전 기단까지의 석단의 수는 보기에 따라 9단에서 12단까지 셈할 수 있다. 여기서 천왕문은 원래 일주문 터였던 것이 잘못 중건된 것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그러므로 천왕문이 위치한 석단은 제외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회전문 터 앞의 좁은 석단을 셈하느냐 일종의 계단참으로 보고 제외하느냐에 따라 9단이냐 10단이냐가 결정된다.


3. 부석사의 진입 과정중 안양루 아래부분과 윗부분의 축이 꺽여져 극적인 풍경을 이루고 있는 이유는?
천왕문 위부터 범종각까지의 축과 무량수전과 안양루를 연결하는 축은 30도 정도 어긋나 있다. 이에 대한 해석으로 범종루 밑에서 볼 때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중첩되는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견해가 있어왔으나 논리적이지는 못하다. 최근 최종현씨(우리공간 연구소)가 건물마다 고유한 안대(案帶:바라보는 산 또는 봉우리)를 가진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이원교 씨의 논문에서 이 학설이 뒷받침되고 있다. 즉 범종각 위에서 보는 안대는 도솔봉이며 무량수전의 안대는 동쪽으로 돌출된 작은 봉우리로, 무량수전과 그 안산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는 미타정토를 상징하며, 나머지 축과 도솔봉과의 관계는 미륵정토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4. 안양루 앞에는 대적광전이 있었다?
여기서 김봉렬 씨는 또다른 해석을 덧붙인다. 안양루 대석단 아래, 범종각과 직선상에 놓이는 곳에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적광전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론이다. <순흥읍지>에는 안양루 아래 법당이 있다고 했고, 겸재 정선의 '교남명승첩'에도 법당이 뚜렷이 그려져 있다고 하며, 법당 안에 놓이는 괘불대의 흔적도 남아있다. 그같은 법당이 있었다면 부석사는 법당을 중심으로 삼는 아래절과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하는 위절의 두 영역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구조를 이루게 된다.


말하자면, 산문을 거쳐 장대한 계단과 누각 밑을 지나 정점에 오르면 법당에 이르러 일단 멈춘 흐름이 다시 뒤쪽의 안양루로 유도되어 무량수전에 다다르게 되는, 두 번의 클라이막스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이 전체를 두 영역으로 해석해 보면, 전체 석단이 다시 두 개의 대석단으로 구분되는 이유도 분명해진다. 평면적으로 굴절된 축과 함께 단면적으로 조성된 대석단이 아래 위 두 절을 입체적으로 중첩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러한 구성은 하나의 효과를 위해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형의 체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교리적 내용도 상징화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일주문

이른 아침,바삐 움직이는 사하촌 가판대 할머니들과 달리 부석사로 향하는 길은 나만의 공간이다.

몇번의 답사때에도 느껴보지 못한 여유롭고 한적한 길이건만, 관광객이 드물 때 더 많은 장면을 담을려는 욕심이 발길을 재촉한다.


 

1977년 불사이전의 일주문은 현재 천왕문 자리었다고 한다.

 

 

노란은행잎, 빨간 사과사과가 어울리는 만추에 버금가는 초여름의 진입로.


 

부석사 중수 공덕비

관광, 등산 오시는 분들 께서는 탑,석등, 부도, 비석 위에 제발 돌 좀 올리지 마세요.


 

당간지주.

내외부에 특별한 장식문양이 없으며, 상단부분은 모죽임 하였다.

측면에는 세줄 선을 양각하였고. 안쪽 상부에는 간구를 마련하였다.



간대

방형의 부재 상부에 복련을 새기고 원형 당간 홈을 내었다.

 


상부의 간구

 


통일신라 9세기 작품으로 전한다.

 


당간지주.천왕문 진입로



천왕문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두번째 통과의례를 주관하는 천왕

1980년대에 일주문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동방 지국천.남방 증장천

 


서방 광목펀.북방 다문천

 


회전문廻轉門

대석단 위에 가로로 길게 세운 건물로  2013년 복원되었다.


(전)부석사성보박물관 학예사이었으며, 현재 송관사성보박물관 학예사로 근무중인 김태형님(개인적으로는 페친)은 미디어 붓다에 연재한 "부석사 이야기"에 회전문에 관한 이야기가 게재되어 있다.


"먼저 기록으로 남은 조선후기의 부석사 가람배치를 보면 먼저 임진왜란 직후에 쓰인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이 남긴 『계암일록(溪巖日錄)』을 보면 1615년 7월 부석사는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취원루, 동쪽에는 전각(응향각)이 있었고 중앙에는 안양루와 그 아래 계단 법당이 있었고 그 아래에 범종각이 있었다. 범종각 아래에는 사천왕상이 봉안된 회전문, 그 아래는 문수와 보현보살의 탱화(벽화)가 있는 조계문과 그 옆에 흥복료가 있으며 그 아래에 일주문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무량수전 동북쪽에 조사당이 있으며 서쪽으로 수십 보를 가면 영산전과 작은 암자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계암일록』보다 후대에 기록된 『재향지(梓鄕誌)』에 따르면, 금당(金堂: 무량수전) 서쪽에 취원루(聚遠樓)가 있으며 취원루 북쪽에 장향대(藏香臺)가 있고, 금당 동쪽에 상승당(上僧堂)이 있고, 금당 뜰에 광명대(光明臺: 현재 국보 제17호 석등)가 있고, 그 앞에 안양문(安養門)이 있다. 문 앞에 법당(法堂)이 있는데, 법당의 왼쪽은 선당(禪堂)이고 오른쪽은 승당(僧堂)이다. 그 앞에 종각(鍾閣: 범종각)이 있다. 종각 아래에 또 대여섯 곳의 당실(堂室)이 있는데, 회전문(廻轉門)ㆍ조계문(曹溪門)이 있다. 또 그 아래 수십 보쯤에 일주문(一柱門)이 있고, 그 아래 1리쯤에 영지(影池)가 있다. 절의 누각이 모두 이 연못 속에 비친다. 조전(祖殿: 조사당) 서쪽에 영산전(靈山殿)이 있고, 또 그 서쪽에 은신암(隱神菴)이 있다. 그 아래 골짜기에 극락암(極樂菴)이 있다. 조전 동쪽 골짜기에 동전(東殿: 약사전)이 있고, 동전 뒤에 국사비(國師碑: 원융국사비)가 있다."

 


회전문 좌측 석단

 


회전문 우측석단

 


회전문에서 범종루 진입 구역

 


동.서 삼츨석탑

동부전 뒤족이 본래 위치며 1966년 자인당의 비로자나불 2기와 함께 옮겨 왔다고 한다. 

 


동삼층석탑

2층기단의 삼층석탑으로 9세기 석탑으로 전한다.

 

 


지대석


하층기단

저석,중석이 일석, 혼합식으로 결구하였다.

양우주와 1주 탱주를 모각하였고, 갑석의 물매는 희미하며, 상부에 각호각 3단 괴임을 조출하였다.

 


상층기단

4매석으로 치석한 중석은 엇물림으로 결구하였고,양우주와 1주 탱주를 모각하였다.

약간의 물매가 있으며, 하부에는 부연 상부에는 2단 괴임을 조출하였다.

 


탑신

1매석이며, 양우주를 새겼다.

초층탑신에 비해 상층부의 체감률이 급격하다.

3층 탑신은 후보물로 추측된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가 급하며, 처마 전각의 반전은 경쾌하다.

상단에는 1단 괴임을 조출하였고, 하단에는 절수구를 두었으며, 층급받침은 전층 4단이다.


상륜

노반,복발,보주가 남아 있다

 

 

 


서삼층석탑

1966년 이건하면서 익산 왕궁리 5층탑에서 가져온 석존사리 5과가 분안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상륜부의 남아 있는 부재를 제외하고는 큰차이가 없으며, 동시대에 조성된 탑으로 추정된다.

 

  


하층기단

 


상층기단

 


탑신.옥개석

 


상륜부

 

 

 



지장전.

동부도전으로 향하는 길목이며, 부도전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관음전

선원을 경유 서부도전으로 향하는 길목이며 선원부터 출입금지 지역이다.

 


식사용정(食沙龍井)

종무소 뒤편 에 위치한다.


식사용정에 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매체에 김태형님의 글에 실려 있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도 선묘낭자 설화는 언급이 없고 다만 ‘부석 동쪽에 선묘정(善妙井)이 있고, 서쪽에는 식사용정(食沙龍井)이 있어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만 하였다.


아는 사람들은 알고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는 선묘낭자 관련 유적이 바로 ‘식사용정’과 ‘선묘정’이다.
우선 그 위치부터 확인해 보면 식사용정은 현재 부석사 종무소 건물 사이에 있고. 선묘정은 지장전 아래에 있다.


식사용정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나타나 있지만 오래 전부터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유명하다. 이와 관련한 기록이 조선중기 인물인 박선장(朴善長, 1555~1616)이 지은 ‘식사정기우제문(食沙井祈雨祭文)’이 있다.

 

食沙有井 龍神是宅. 식사라는 우물이 있으니 바로 용신이 머무는 집이다.
興雲作雨 素稱澤物.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려 평소 만물을 윤택하게 하네.
嗟余守土 政多失節. 애석하다, 나라를 지키매 정사에 많은 실정이 있으니
値此旱魃 不日不月. 이렇게 가뭄이 생긴 지 몇 날 몇 달인가.
原濕暵乾 川澤枯竭. 물이 말라버리고 시내와 연못도 고갈되어
秧種未播 牟麥燋黃. 모내기도 못하였으니 보리도 누렇게 탔네.
東作旣愆 西成敢望。봄농사를 망쳤으니 어찌 가을 추수를 기대하랴.
田畯束手 號泣于途. 전준(농사를 관장하는 신)도 속수무책 통곡소리 끊이질 않네.
伊今之災 咎實在吾. 지금 이 재앙은 모두 나의 잘못이니
哀我民生 何罪何辜. 가여운 우리백성에게  무슨 죄와 허물이 있겠습니까. 
玆余自責 虔告才忱. 이제 스스로를 책망하며 정성을 드리오니
井渫不效 龍獨何心. 우물을 치고도 영험이 없다면 용이시여 장차 무슨 마음을 내겠습니까.
庶幾一起 遄注甘霖  풍족하게 단비를 내려주옵소서.


『수선선생문집(水西先生文集)』
 
또한 박종의 『청량산유록』에는 ‘앞에는 식사정(食沙井)이 있는데, 깊이는 4, 5길이다. 위에는 작은 모래 언덕이 있는데 절을 지을 때에 신룡의 이적이 있었다. 의상이 비구로 하여금 경주(慶州)의 유사(流沙)를 취하여 와 한 곳에 모아 언덕을 이루어 용의 먹이로 삼았다’고 전하는데 식사용정은 지금은 잘 정비하여 보존되고 있다. 

 

 

선묘정(善妙井)


미디어붓가에 실린 김태형님의 글이다.

식사용정과 함께 선묘의 설화가 담긴 우물이 바로 선묘정이다. 식사용정과는 달리 우윳빛이 아닌 맑은 물로 『청량산유록』에는 ‘왼쪽에는 선비정(仙妃井)이 있는데 한 선녀가 물을 길어 의상에게 아침저녁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선비로 이름을 지었다. 매번 입춘에 물이 차고 빠지는 것으로 풍년과 흉년을 점친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때 문인인 박효수(朴孝修, ?~1377)는 부석사의 선묘정의 물을 마시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鳥啼花落減芳年(조제화락감방년)   새 울고 꽃이 지니 꽃다운 나이는 줄어들고
客路光陰志忽然(객로광음지홀연)   나그네 길 짧은 세월에 뜻은 홀연히 사라지네.
何月試茶龍井水(하월시다용정수)   어느 달에 용정수로 차를 다려 마실까?
滿軒松月共夤緣(만헌송월공인연)   추녀 끝 가득한 솔과 달은 함께 엉켜 있네.

 

13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 두 우물이 마르지 않고 부석사의 법맥과 함께 하고 있다.



 

회전문

낮은 축단위 동서 삼층탑.

계단으로 올라서면 좌측 취현당. 우측 응향각, 범종루 계던 옆 괘불지주가 있다.

 


괘불지주

많은 사람들이 범종루 앞쪽에 금당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제기하는 괘불지주

실제로 겸재의 부석사도에는 금당이 있다.

  


취헌암과 석등부재

본래는 조사당 동쪽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으며,조선시대 사명대사의 수도처로 알려져 있다.

근자에 보수하였으나 옛부재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응향각

 

 

 

장경각

 


범종루


대석축단과 무량수전을 구획하는 중앙에 위치.

무량수전을 가로 막지 않고 측면으로 자리잡고 있다.

참배객의 시선으로는 분명 2층 루대의 팔작지붕이지만 누하를 통과하여 뒤돌아서면 맞배지붕이다.

범종각이 정면을 향하고 있으면  무겁고 답답했을 분위기를 방향과, 지붕으로 해결한 목수의 안목이 부러울 뿐이다.

 

 

덤벙주초, 누하주

계자난간과 궁창

 

 

2층 루대의 법고.목어, 운판

범종은 아래편 별도 전각에 있다.

 

 

맞배지붕, 마당과 평행으로 연결되는 마루

공간활용과 탁트인 시각적인 측면만을 고려한 가구이었을까?

 

문득

범종루를 세로로 배치한 까닭이

석축으로 끊긴 부석사의 맥을 잇기 위한 풍수의 비보책으로 생각되는 것은 왜인지...

 

(계속)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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