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주시

영주...봉황산 부석사(2)

임병기(선과) 2018. 6. 29.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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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루

범종루를 지나온 진입 동선이 사알짝 꺽여 대석단 계단을 통해 안양루로 유도한다.


안양 安養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서방극락정토이다.


안양루를 누하진입하면 무량수전 중정이다.

사진 촬영은 뒤로하고 무량수전 부처님께 먼저 예를 올리고 땀을 훔쳐내었다.


 

부석사(浮石寺) 편액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에 남긴 글씨라고 한다.


예전에 문화유산속에 숨은 뒷얘기 게시판에 올렸던 영남일보 김봉규기자의 연재 기사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에서 발췌하였다.


"1956년 1월19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지난 16일 하오 대통령 전용차로 서울역을 출발한 이 대통령 부처는 17일 상오 9시에 경북 영주군에 있는 부석사에 도착, 동사(同寺) 김주지의 안내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조사당 벽화, 석탑, 범종각, 안양루 등을 시찰한 후 동사의 ‘부석사(浮石寺)’를 휘필하고 십칠일 하오 7시20분 서울역에 도착 경무대로 기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석사 현판 자리에 걸려 있던 안양문은 이승만 대통령의 부석사 글씨로 인해  아래로 밀려났다.

안양문이라면 분명 이층 누대거 조성되기전 단층 전각에 걸렸던 글씨일텐데.

 

실제로, 부석사 무량수전 측면에 2층 루대이었던 취원루가 있었으며, 부석사를 순례한 많은 시인, 묵객의 유산록에 글이 전한다. 이를 근거로 하면 안양문 현판에 대한 연구가 더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무량수전 無量壽殿


인구에 회자되는 혜곡 최순우님의 명문을 두고 미사여구로 치장하더라도  나의 글은 우수마발이며 사족에 불과할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아직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의 의미를, 사무치는 그리움의 느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무량수전배흘림기둥에기대서...혜곡 최순우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안양문, 응향각들이 마치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 주는 본보기라 할 수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향해 마련된 듯싶어 진다. 이 대자연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 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리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하략)



측면,후면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역사적으로 인정되기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1372년에 진각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깔고 단청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와 보수하였다.".(오류는 수정, 부석사 홈페이지)


 

무량수전 현판

대부분 사람들이 주지하듯이 1361년 홍건적이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같은 해에 안동으로 피난가던 공민왕이 남긴 글씨이다.


공민왕의 글씨로 단정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 비밀은 현판뒤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전편에서 인용했던 미디어붓다의 김태형님의 연재글  '부석사 이아야기'에 실려 있다.


“옛날 신라 의봉 원년(676)에 부석사를 창건하였는데 금당의 액자 글씨는 공민왕이 쓴 것이다. 경오년(1690)에 왕족인 낭선군이 부석사에 와서 그 액자를 건 뜻을 쓰고 신미년(1691) 여름에 이 절 화승 영필이 마음먹고 액자 테두리를 다시 만들었다(粵在新羅儀鳳元年創建浮石寺, 金堂題字, 恭愍王之親筆也, 當此庚午之時, 國族朗宣君到于浮石寺, 題于符板之意, 命其書鎭云, 到于辛未孟夏間, 寺畵僧瑛珌慨然傾心四雪角改造也)”.

 

 

부석(浮石)에 새겨진 선원록봉안사낭원군(璿源錄奉安使朗原君) 명문

 

선원록봉안사 璿源錄奉安使

낭원군 朗原君

게유 동 癸酉 冬


더불어,미디어붓다 기사 중 낭선군에 관한 내용을 발췌하였다.

 

"낭선군[1637(인조15)~1693(숙종19)]은 옛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 서첩을 만든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의 편찬자인 선조(宣祖)의 손자인 이우(李俁)이다. 낭선군이 부석사를 온 것은 다름 아닌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동행한 인물이 바로 그의 동생인 낭원군 이간[朗原君 李偘(인조18년(1640)∼숙종25년(1699)]이다.

 

낭선군은 그렇다 치더라도 낭원군이 부석사에 왔음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모든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다. 무량수전 서쪽 ‘부석(浮石)’ 정면에 ‘선원록봉안사낭원군(璿源錄奉安使朗原君)’이라는 명문이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1681년 완간된 <선원록>을 1690년 태백산사고에 봉안하기 위해 각화사로 향하던 낭선군, 낭원군 형제가 부석사에 들러 무량수전 현판을 보고 공민왕이 친필임을 고증하였던 것이다."

 

 

기단

 

 

기단 명문

충원 적화면 석수 김애선 忠原 赤花面 石手 金愛先

 

충원은 어디인지, 적화면은 어딘지?

석수는 당당하게 실명을 남겼건만, 진즉에 어디 출신이지 알 수 엇다.


 

넉살문 창호.

들어열개문인 줄 오늘 알았다.

뿐만 아니라 중앙 어칸과,바로 옆 좌우 협칸의 출입문에는 머름대가 없다는 것도 이제 인식했으니...


 

배흘림 기둥


 

안쏠림을 찍었는데 공포만...


 

활주

 

 

소조아미타여래좌상

 

나발, 육계가 높고, 중간계주가 표현되었다.

삼도,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항마촉지 수인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경북 군위 삼존석불(제2석굴암)의 본존불은 항마촉지수인이며, 좌우에 대세지, 관음을 협시보살로 두고 있어 아미타 삼존으로 알려져있다.존명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 통일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존명은 전문가 들의 몫으로 두고 원융국사비문에 새겨진 명문만 옮겨온다(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국사는 왕의 황옥거(黃屋車) 뒤에 두고 혁혁(赫赫)히 떠나면서 진룡(眞龍)이 활동하던 것을 모두 그치고, 홍진(紅塵)을 나와 창창(蒼蒼)히 늙은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마치 일곡(逸鵠)의 쾌거(快擧)와 같이 소요자재한 마음으로 부석사에 이르렀다. 화엄정토(華嚴淨土)의 사상을 주창하여 본사(本師)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비대(媲對)하였으니 영취상(靈鷲山)으로써 칠보정토(七寶淨土)를 삼아 항상 안주(安住)하시는 보신불(報身佛)로 여겼다.


이 절은 의상조사께서 중국인 서화(西華)에 유학하여 화엄(華嚴)의 법주(法炷)를 지엄(智儼)으로부터 전해 받고 귀국하여 창건한 사찰이다. 본당(本堂)인 무량수전(無量壽殿)에는 오직 아미타불의 불상만 봉안하고 좌우보처(左右補處)도 없으며 또한 전전(殿前)에 영탑(影塔)도 없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의상(義相)스님이 대답하기를, “법사(法師)이신 지엄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승(一乘)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열반에 들지 아니하고 시방정토(十方淨土)로써 체(體)를 삼아 생멸상(生滅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 이르기를,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로부터 관정(灌頂)과 수기(授記)를 받은 이가 법계(法界)에 충만하여 그들이 모두 보처(補處)와 보궐(補闕)이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지 않으신 까닭에 궐시(闕時)가 없으므로 좌우보처상을 모시지 않았으며 영탑(影塔)을 세우지 아니한 것은 화엄(華嚴) 일승(一乘)의 깊은 종지(宗旨)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엄 스님은 이 화엄 종취(華嚴 宗趣)를 의상에게 전해 주었다. 의상이 전수를 받은 후 원융국사에까지 전승(傳乘)되었다. 그러므로 국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절에 주석(住錫)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916년 무량수전 해체수리 때에 발견된 봉황산부석사개연기(鳳凰山浮石寺改椽記)에 의하면 1358년  왜구에 의해 불타고, 1372년 진각국사가 수전과 조사당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때에 소조불도 분명 훼손 되지 않았을까? 결론적으로 소조아미타불은 전화, 개금 등으로 인해 본래 모습을 잃었음으로 수인이 존명을 확인하는 절대 가치가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이다.

 

(불상 사진은 상주하는 보살님의 허락을 받고  촬영하였다)

 

  


안양루安養樓

 


안양루 安養樓

소남(小南) 김종호(1901~85)가 갑신년(1944년) 가을에 남긴 글씨이다.

소남선생은 영주출신으로  일제 강점기때 총독이 조선의 명필 5명을 초청한 적이 있는데,  그 5명 중 한 사람으로 초대를 받았다.소남은 그 이후 5대 국필(國筆)로 인정받았으며, 50대 이후에는 석당(石堂)이라는 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부석사...김병연(1807~1863) 

(안양루에 현판이 있다)

 

평생미가답명구 平生未暇踏名區 평생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수금등안양루 白首今登安養樓 백발이 다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강산사화동남열 江山似畵東南列 그림 같은 풍광은 동남으로 펼쳐져 있고
천지여평일야부 天地如萍日夜浮 천지는 부평같이 밤낮으로 떠 있구나
풍진만사총총마 風塵萬事悤悤馬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우주일신범범부 宇宙一身泛泛鳧  우주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백년기득간승경 百年幾得看勝景  인간백세에 몇 번이나 이런 경관 보겠는가
세월무정노장부 歲月無情老丈夫  세월은 무정하여 나는 벌써 늙었네

 

 

 

 

 

석등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팔각원당형 석등.국보 17호

 

 

배례석

일석으로 조성된 지대석 상부에 2단 괴임을 두었고 전,후면에는 4구, 측면에는 2구 안상을 새겼다.

상부에는 연화문 1구가 조식되어 있다.

 

 

지대석

4매의 방향 부재로 치석된 지대석. 상부에 2단 괴임을 두었다.

 

하대석

방형 하단석은 저석 중석,갑석이 일석이며 중속에는 면마다 2구의 안상을 새겼고, 상부에는 2단 팔각 괴임을 조출하였다.

하대석 상단은 복련으로 조성하였으며, 귀꽃을 돌출시켰다.

 

그런데,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1개 귀꽃은 돌출형이 아니라, 선각에 가깝다.

실수?

아니면 상징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일까?

 

상부에는 받침과 괴임이 일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팔각 간주석

 

 

상대석

8엽 앙련과 간엽을 새기고 갑석으로 마무리하였다.

 

화사석

팔각으로, 4개 화창에는 문을 달았던 홈이 남아 있으며,  나머지 네 면에는 연화좌위에 보살입상을 모셨다.

 

보살상은 주악상일까? 공양상일까?

 

 

 

 

 

 

옥개석 하부

절수구와 층급 받침을 새겼다.

 

 

옥개석.상륜

낙수면 물매가 깊고, 처마 전각의 반전도 보인다.

상부에는 복련을 조식하였으며, 괴임위에 보주가 있다.

 

 

 

선묘각

부석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선묘낭자를 기린 전각이다.

 

부석사에는 선묘와 관련된 유적이 전편(1)에서 언급한, 식사용정, 선묘정, 부석, 선묘각. 무량수전 지하 석룡이 남아 있다.

그런데 김태형 학예사에 글에 의하면 실제로 선묘낭자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고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중국의  『송고승전』과 일본의『화엄연기』등에서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의상대사를 인도하는 장면

 

 

그림이 좀 그렇다.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이 시주했다는 영정은 박물관으로 갔나?

 

 

좌측 벽화

거석(巨石)을 허공에 날려 권종이부(權宗異部)들을 내쫓았다는 장면

부석이 7일 동안 허공에 떠있었다고 한다.

어? 창건시에 안양루가 있었나?

 

 

 

부석

선묘낭자 설화에 등장하는 바위

 

 

삼성각

주석 아래에 위치

 

 

삼층석탑

무량수전 동쪽에 위치

원융국사 비문에는 탑을 세우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대에 세운 탑 아니면 옮겨온 탑일텐데, 탑의 양식은 원융국사 이전 9세기 탑이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 이르기를,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로부터 관정(灌頂)과 수기(授記)를 받은 이가 법계(法界)에 충만하여 그들이 모두 보처(補處)와 보궐(補闕)이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지 않으신 까닭에 궐시(闕時)가 없으므로 좌우보처상을 모시지 않았으며 영탑(影塔)을 세우지 아니한 것은 화엄(華嚴) 일승(一乘)의 깊은 종지(宗旨)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태형 학예사는 부석사에서 화엄을 공부하고 구산선문의 개산주가 된 동리산문 적인선사 혜철(惠哲, 785~861),희양산문 지증대사 도헌(道憲, 824~882),사자산문의 징효대사 절중(折中, 826~900)의 부도가 유존하는 것으로 미루어 의상스님 부보탑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다.(이럴 경우에는 비문에 등장하지 않았을까?)

 

 

지대석은 결실

 

하층기단

중석과, 저석이 일석이며, 양우주와 2주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갑석에는 약간의 물매가 있으며, 상부에 2단 괴임을 두었다.

 

상층기단

중석

엇물림으로 결구,탱주 1기와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중석 탱주 측면에 면석이 덧붙여져 있다.

이러한 양식은 백제계석탑 양식으로 알고 있다.

가까운 거리인 영양 서부리(영양군청) 석탑에서도 작례를 찾을 수 있다.

삼국 통일 후 200여년이 지난 싯점에 조성된 탑이므로 문화의 동질화가 많이 진행되었다는 반증 아닐까?

 

갑석

하부에 부연을 새기고 상부에 2단 괴임을 조출하였다.

 

 

탑신

1개 돌이며,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

층급받침은 전층 5단, 절수구는 생략 되었고

낙수면 물매는 깊고, 상부에 2단 괴임을 두었으며, 처마가 얇고 상부 전각에는 반전이보인다.

  

 

 

석등

상대석,화사석, 상륜이 결실되었다.

무량전 앞 부도 보다는 퇴행된 장식성으로 미루어 후대임을 짐작케 한다.

 

 

참고로, 미디어 붓다에 연재된 김태형 학예사의 글에 "부석사 경내의 성보문화재를 기록한 '부석사고물대장(浮石寺古物臺狀. 1938년 6월 10일 작성)' 필사본에 이 석탑 앞에 있는 석등을 일러 '선종표석(禪宗票石)'이라 하여 그 연번이 79번으로 되어 있고 그 다음이 여래탑(如來塔)으로 연번 80번에 해당한다."는 내용이 있어 눈길을 끈다.

 

 

원융대사 비각

 


원융국사비浮石寺圓融國師碑

( : 15, 964~ 7, 1053) . () () 1054( 8) 다.

(부석사 답사시에 일독을 권하며 전문을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에서 옮겨 왔다)

 

시원융국사비명(諡圓融國師碑銘)(篆題)
▨▨대부(▨▨大夫) 상서(尙書) 예부(禮部)시랑(侍郞) 지제고(知制誥)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고청(高聽)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유림랑(儒林郞) 상서(尙書) 도관낭중(都官郞中)이고 비금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임호(林顥)는 왕명(王命)에 의하여 비문을 쓰다.

태세(太歲)가 갑오(甲午)에 있는 해, 선병(璿柄)묘(卯)를 가리키는 달에,신(臣)이 송막(松漠)사신으로 갔다가 廻(결락)國, 자수(紫水)로 서(書)하여 가로되, 고 원융국사(故圓融國師)는 세계의 진량(津梁)이며 인천(人天)의 안목(眼目)이셨는데 지금 서거(逝去)하였다. 무봉탑(無縫塔)뚜껑을 얹고, 황견유부(黃絹幼婦)인 명문(名文)을 지어 완염(琬琰)에 새기고자 하였다. 사(寫) (결락) 그 방유(芳蕤)한 비문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신(臣)이 구슬로 엮은 발 앞에 나아가 석엽(石葉)로하(爐下)에서 절하고 사양하여 고하기를, “성조(聖朝)께서는 문장이 비단결 같고 동원하는 문사(文詞)도 풍부하여 마치 윤금(潤金)과 같이 절묘한 문장력(文章力)을 따를 사람이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폐하(陛下)께서 친(親)히 절묘호사(絶妙好辭)인 뛰어난 비문(碑文)을 지으시고, 신(臣)에게 내리신 명(命)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임호(林顥)가 주청(奏請)한 표문(表文) 말미(末尾)에 비서(批書)하고 칙명(勅命)하기를,“경(卿)에게 부탁한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고(李翶)약산(藥山)에게 도(道)를 묻고 약산 스님을 학형(鶴形)과 같다고 칭송하였고, 손작(孫綽)은 지둔(支遁) 스님을 친견하고 그의 응실(鷹室)에 흠복(欽伏)하였으니, 스님의 사람됨을 자세히 알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신(臣)이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문인(門人)들이 제공(提供)한 행적(行跡)의 실록을 살펴보니 국사께서 이 세상에 응화(應化)한 특수한 행적이 매우 자세히 적혀 있었다. 신(臣)은 다만 그 중에서 중요한 부분 대략(大略)만 따서 기록했을 뿐이다.


대저 모군(毛群)의 무리들 중에는 반드시 기린이 서수(瑞獸)이고, 많은 우족(羽族)들에는 봉새가 성조(聖鳥)이다. 만약 기린이 나타나면 두 개의 뿔을 가진 짐승들은 야수(野藪)에로 모이고, 봉황이 내려오면 여러 개의 날개를 가진 새들은원오(園梧)에 가득하니, 이는 곧 소·말·산까치·종달새 등이다. 만약 기린과 봉새가 없으면 어찌 그들을 서수(瑞獸)와 성조(聖鳥)라 할 수 있겠는가? 그 까닭인 즉 보통의 모우(毛羽)와 다른 것은 인(仁)에 응(應)하고 덕(德)을 보이니, 오랜만에 한번씩 나타나기 때문이다. 국사의 출세시기(出世時期)는 나계(螺髻)의 자비가 은몰(隱沒)하고 이소(犛蘇)의 가르침이 해이해진말세(末世)에 해당하는 지라, 국사와 같은 인물(人物)은 백이나 천년이 지난 후라야 한번씩 드물게 출생(出生)하여 불법(佛法)을 호지(護持)하며 시든 각화(覺花)를 다시 무성하게
하고, 고갈된 법해(法海)로 하여금 거듭 폭원(幅員)의 광막(曠邈)에 체웠으니, 원수방족(圓首方足)들의 모임이 상서롭고 또한 성스러우니 그를 사람 중의 인봉(麟鳳)이라 말하지 않겠는가!


스님의 휘는 결응(決凝)이요, 자는 혜일(慧日)이며 속성은 김씨(金氏)니, 그의 선조(先祖)는 명주(溟州) 사람이다. 대왕부(大王父)의 휘는 영길(英吉)이니 선행을 닦은 과보(果報)로 얻은 바이며, 화려한 호족(豪族)이요, 대대(代代)로 의관(衣冠)을 정제(正制)한 양반이었다. 금벽(金壁)을 주조하여 사방으로 튼튼히 둘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금공(金公)이라 불렀으니 마치 한(漢)나라 때 석분(石奮) 만석군(萬石君)과 같았다. 왕부(王父)의 휘는 선희(善熙)이니, 관직(官職)은 장보(章保)기연(器璉)·굉홍(宏洪) 등을 역임하여 그 명성이 사방(四方)에 떨쳤다. 아버지의 휘는 광률(光律)이니 금곡경(金穀卿)을 역임하였다.

 

충직하여 항상 직간(直諫)을 올려 임금으로 하여금 더욱 선정(善政)을 베풀도록 최선을 다하였으며, 새로운 일을 일으켜 공을 세워서 당세(當世)에 큰 혜택을 끼쳤으며, 송(宋)나라에 새해 인사로 보내는 세사(歲使를 인솔하고 갔다가 안성(安城)에 상주(常住)하고 돌아오지 아니하였으니, 그곳이 곧 명주(溟州)부해방(負海邦)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감잉(感孕)하되 그 빙도반목(氷桃磻木)곡용부래(曲龍浮萊)정수(精粹)의 꽃이며 영령(英靈)의 기백이라 하겠다. 만약 그러치 않으면 어느 시대에 괴위(瑰偉)하고 걸절(傑絶)한 사람이 태어날 수 있겠는가!


어머니는 방씨(房氏)이니, 강릉군부인(江陵郡夫人)이며, 내의령(內議令)강명(康明)딸로써 시집가기 전에 친정에서 베짜는 법, 예의범절 등 가정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고가(考家)에 있을 때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항상 남방 환희세상(歡喜世界)의 교주(敎主)이신 보승여래불상(寶勝如來佛像)을 봉안하고 손에는 주단(炷檀)향로를 들었으니 마음은 상쾌하기가 마치 감제(甘薺)와 같았다. 스님을 분만할 때가 거의 다가와서 사택(私宅)에 도량(道場)을 개설하고 스님들을 청하여 경을 강하도록 하였다. 마침 한(漢)나라로부터 고려에 와서 건봉사(乾聖寺)우거(寓居)하고 있던 스님도 강석(講席)에 참석하여 청법하다가 잠깐 조는 동안 비몽사몽간누더기를 입고 육환장을 짚은 스님이 나타나서, “이 집에 장차 산기가 임박하였는데 어찌 대문을 열어놓지 않았는가.”하므로, 스님이 깜짝 놀라 꿈을 깨어 절에 돌아가 보니, 이날 인시 초(寅時 初)에 국사께서 탄생하였으니 대송(大宋) 건덕(乾德) 2년 갑자(甲子) 7월 20일 갑오(甲午)였다. 12살 때 용흥사(龍興寺)에 나아가 천지화상(天只和尙)의 사제 악수좌(萼首座)인 광굉(廣宏)을 은사로 하여 불전(佛殿) 앞에서 무명초(無名草)인 머리를 깎고, 논둑에서 농사일을 할 때 입었던 속복(俗服)을 먹물로 염색한 승복(僧服)으로 갈아입고 스님이 되었다. 어느날 수좌(首座)가 혼허(魂栩) 중 꿈에 법라(法螺)를 불고 바라를 치면서 설라국사(羅國師)결언(決言)을 맞이하여 예배하고 난 후 자세히 보니 바로 우리 원융국사(圓融國師)였다. 드디어 국사를 상징하여 이름을 지었다.

 

개보(開寶) 8년 흥복사(興福寺) 관단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국사께서는 기년(綺年)의 나이에 세속을 떠나 스님이 되어 결고(經誥)를 연마하여 정통하므로써 유오하고 미묘한 뜻을 감옹력(鑒翁力)하게 해석하며, 까다롭고 난삽(難澁)한 반결(盤結)회유하였다. 한가지를 들으면 천 가지를 알아서 푸른 지혜가 마치 두터운 얼음처럼 투철하였다. 영원(靈源)인 본심(本心)자리는 담적하여 일체 반연의 조짐이 끊어지고서야 바야흐로 나에게로 흘러오면 곧 옥과 같이 맑은 작용을 암기(暗記)하며, 본각(本覺)의 그 자리는 멀고 고요하여 길이 여러 갈래로 나의 앞에 나타났으나 나는 그 양(羊)이 달아난 길을 잃지 아니하였다. 28세 때 승과(僧科)를 보는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선발되었는데, 대덕(大德)을 거쳐 대사(大師)의 법계를 내린 분은 목종(穆宗) 임금이시고 수좌(首座)를 가증(加贈)한 이는 성고(聖考)이며 승통(僧統)으로 추대한 이는 정종(靖宗) 임금이시니, 열성조(列聖朝)의 여러 임금께서 지극한 신심(信心)으로 존경하였으므로 융숭한 대우(待遇)를 받았다.

 

성고(聖考)인 덕종(德宗)께서 궁궐 동쪽에 있는 묘지사(妙智寺)를 국사에게 헌납하였다. 이 절은 시끄러운 세속(世俗)과는 멀지 아니하나 속진(俗塵)이 날아오지 않는 곳이며, 푸른 산 봉우리비단과 같은 고운 구름으로 덮혀 있다. 사방을 바라보면 마치 오랜 장마가 개인 것과 같이 맑고 깨끗하여 아름다운 새모양 등 괴이(恠異)한 그림을 펼쳐놓은 듯하였다. 산과 계곡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마치 고요한 밤에 튕기는 현악(絃樂)과 같으니, 실로 헌황씨(軒皇氏)가 광성자(廣成子)에게 도(道)를 물었던 공동산(崆峒山)과 같은 승경(勝景)이었다. 그러므로 왕은 특별히 청하여 스님을 이 절에 주석하도록 하였다.


중희(重熙) 십재(十載)에 정종(靖宗) 임금이 왕사(王師)로 책봉하고자 중추지주사(中樞知奏事) 병부시랑(兵部侍郞)인 왕총지(王寵之)중사(中使)의 자격으로 임금이 재가한 고(誥)를 가지고 세 번이나 갔으나, 국사께서는 겸산(兼山)처럼 굳은 의지로 거듭 사양하였는데, 왕의 청이 더욱 확고하였으므로 부득이 취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6월에 개성(開城) 남쪽에 행차(幸次)하여 현종(顯宗)의 아버지인 안종(安宗)의 영정을 대정사(大精舍)에 봉안하였으니, 그 절이 바로 봉은사(奉恩寺)이다. 구의(摳衣)의 예를 행하였는데, 이 날 가랑비계속 내려 옷을 적셨다. 우중(雨中)에 오는 국사를 근심하여 성상과 몇 조소(皁素) 등이 멀리까지 나가서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결락) 상당(象堂)으로 맞이하고 작미로(鵲尾爐)를 들고 기도하면서 발원하되, 저의 제자들이 앞으로 미륵부처님의 용화회상(龍華會上)을 만나 마치 약왕보살이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 부처님 앞에서 소신연비(燒身燃臂)하고 마정수기(摩頂授記)를 받음과 같이 되기를 빌었다. 오늘 청정한 대중을 보니 향기로운 연기는 멀리 퍼지고, 여러 날 짐승과 수중(水中)의 어족(魚族)들까지도 마치 잠을 자듯 움직이지 않고 조용하였다.


 

지금의 임금님께서는 그 신분(身分)이 가치(珂齒)로써 벽정(璧庭)으로 말미암아 왕위에 올랐으니 거북의 수명과 같이 성수만세(聖壽萬歲)하기를 빌었으며, 태평태자(泰平天子)가 문석(文石)의 상서로움에 응합(應合)되어 국운이 번창하고 편안함을 이룩하였다. 더욱이 임금께서 불교의 무상심심(無上甚深)한 묘법(妙法)을 깊이 숭상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구세보살(救世普薩)당래(當來)에 해탈하실 미륵부처님만나는 때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직군(稷君)에 명하여 법도(法度)를 강설케 하므로써 덕을 베풀었으며, 또한 왕이 겸허한 자세로 목민(牧民)하였다. 임금께서 앙궁(鴦宮)에 행행(行幸)하여 절을 올리고 국사(國師)로 모셨으니, 마치 지적(知積)대통지승여래(大通智勝如來)를 받들고 약왕보살뇌음정각(雷音正覺)을 친견한 것과 같았다.

 

누조(累朝)에 걸쳐 여러 임금이 국사를 우대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국사께서 어려서 아직 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겨우 형언(形言)하는 2, 3살 때, 성선(聖善)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면서 외조부(外祖父)의 집으로 가자고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어머니가 하는 수 없이 아이의 뜻을 따라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그 가택(家宅)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全燒)되고 말았다. 이를 본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호(加護)라고 하였으니, 법화경(法華經) 비유품(譬喩品)에 장자(長者)가 양록(羊鹿)인 권거(權車)로써 유혹하여 화염에 싸인 자녀(子女)들을 화택(火宅)으로부터 구출한 것과 같은 예라고 하겠다.

 

동츤(童齓)의 어린 나이 어느 날 밤 꿈에 귀산사(龜山寺)로 가는 중로(中路)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의 품 속에 두개의 거울이 있는데 하나는 해이고 다른 하나는 달이다.”라고 했다. 국사가 이 말을 듣고 가슴을 헤치니 이상한 광명(光明)이 홀연히 흘러나와서 주변 산야(山野)를 비추었다. 국사의 자(字)가 혜일(慧日)인 것은 대개 그 상서(祥瑞)를 기록한 것이다. 어느 날 숭복사(崇善寺)로부터 궁중에서 경을 강설하기 위해 내정(內庭)으로 가다가 부아산(負兒山) 서쪽에 있는 덕찰원(德刹院)에 들렀더니 그곳의 어떤 스님이 국사에게 고하기를, “어제 밤 꿈에 자씨불(慈氏佛)이 이르시기를, ‘내일 나의 벗이 이곳을 지나갈 터이니, 너는 마땅히 지극한 마음으로 봉대(奉待)하라’고 하였는데, 오늘 여기에 투숙하는 이가 오직 스님뿐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스님은 필연코 미륵 삼실(三悉)의 경지와 같은 셈이다. 경연(京輦)에 이르러 일친(昵親)동관(冬官) 시랑(侍郞)과 강언제(姜彦第) 시랑(侍郞)은 한밤중에 서서 국사의 독경하는 소리가 유양(瀏喨)하여 매우 우아함을 들었다.시랑(侍郞)이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곧 스님이 코를 고는 소리였다. 다시 전에 듣던 곳으로 돌아가 들었으나 역시 독경하는 소리와 같았다. 이에 미루어 본다면 국사는 자나깨나 항상 화엄삼매(華嚴三昧)중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계미세(癸未歲)에 정종(靖宗) 임금께서 국사를 문덕전(文德殿)으로 영접하여 단비가 내리도록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서 잡화경(雜花經)을 강설하였는데, 경(經)을 설하려고 책을 펴자마자 오색 구름이 허공을 덮었고 기문(綺紋)이 하늘로 뻗치면서 소나기가 쏟아지기도 하였다. 이상의 몇가지는 대충 열거한 것이고, 이와 같은 일이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 국사의 눈동자는 마치 용의 검푸른 눈동자와 같았고, 눈의 정기(精氣)는 번개불과 같이 빛났으며, 걸음은 상섭(象步)와 같이 안상(安詳)하였다. 거룩하고 괴수(壞秀)한 모습은 마치 연꽃이 푸른 산을 맑게 개인 들판을 진압하는 것과 같았고, 온후하고 청화(淸和)한 음성은 마치 선우(仙竽)가 고요히 천풍(天風)을 두들기는 것과 다르지 아니하였다.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하나도 환포(幻泡)와 같지 않음이 없다.그러나 국사께서는 이러한 환포(幻泡) 중에서 진여(眞如)의 경지를 터득하였다. 따라서 일체의 유상(有想)도 모두가 전도(顚倒)이다. 그렇지만 국사는 이 전도된 중에서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성(涅槃城)에 도달해 있었다.


스님을 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친근감을 느끼며, 법문을 듣기 위해 모여든 대중이 마치 아름다운 구슬이 즐비하게 늘어서듯, 또한 보배 구슬이 주렁주렁 매달린 숲과 같은 진풍경이었으니, 보는 이들로 하여금 모골(毛骨)이 송연할 정도로 엄숙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사를 친견하는 사람은 누구나 도미(道味)와 취미(趣味)를 느껴서 연산(連山)십익(十翼)들이 모두 마음의 티끌을 말끔히 씻었다. 그 중에는 조한(藻翰)을 잡으면 하양(河陽)춘수(春樹)와 같은 문장(文章)이 나타나며, 중신(重臣)인 주낭(珠囊)들과 겸하여 조말(爪末)의 천진으로 돌아왔다.

 

말년(末年)에 상재(桑梓)나무가 심어져 있는 고향에 절을 짓고, 옥돌로 얽은 것과 같은 푸른 삼림(森林)으로 둘러싸인 법당(法堂)벽에는 불·보살(佛·菩薩)을 그렸으며,  만월(滿月)과 같이 거룩하신 불상이 연꽃으로 조각된 좌대 위에 엄연(儼然)하게 앉아 계셨다. 임금께서 절 이름을 화엄안국사(華嚴安國寺)라고 하였다.


중희(重熙) 10년에 문인(門人)들에게 이르기를, “절 주변의 천석(泉石)은 가히 혼몽(昏蒙)한 번뇌를 씻을 만하고 칡넝쿨에 얽인 송나(松蘿)는 몸과 세상을 던져 버릴만한 곳이니, 나는 여기에서 시작하고 또한 여기에서 종신(終身)하리라.”하시고, 구산(舊山)인 부석사(浮石寺)로 돌아가게 허락을 빌었다. 임금께서 생각하기를, “백운(白雲)을 못으로 고정시키고 노끈으로 얽어매어 한 곳에 머물게 할 수 없거니와, 어찌 큰덩어리의 보배 구슬을 황지(隍池)에 방치할 수 있으랴!” 하고 스님의 간청을 받아들인 후 홰란(噦鸞) 타고 멀리까지 나가서 석별의 아쉬움을 참으면서 전송하였다.

 

아울러 함(函)에 가득 채운 진신(珍賮)융성한 총뢰(寵賂)를 드리고, 내사사인(內史舍人) 임종일(任從一)좌가승정(左街僧正) 득생(得生)에게 명하여 호송하여 구산(舊山)까지 무사히 돌아가게 하였다. 국사는 왕의 황옥거(黃屋車) 뒤에 두고 혁혁(赫赫)히 떠나면서 진룡(眞龍)이 활동하던 것을 모두 그치고 홍진(紅塵)을 나와 창창(蒼蒼)히 늙은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마치 일곡(逸鵠)의 쾌거(快擧)와 같이 소요자재한 마음으로 부석사에 이르렀다. 화엄정토(華嚴淨土)의 사상을 주창하여 본사(本師)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비대(媲對)하였으니 영취상(靈鷲山)으로써 칠보정토(七寶淨土)를 삼아 항상 안주(安住)하시는 보신불(報身佛)로 여겼다.

 


이 절은 의상조사께서 중국인 서화(西華)에 유학하여 화엄(華嚴)의 법주(法炷)를 지엄(智儼)으로부터 전해 받고 귀국하여 창건한 사찰이다. 본당(本堂)인 무량수전(無量壽殿)에는 오직 아미타불의 불상만 봉안하고 좌우보처(左右補處)도 없으며 또한 전전(殿前)에 영탑(影塔)도 없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의상(義相)스님이 대답하기를, “법사(法師)이신 지엄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승(一乘)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열반에 들지 아니하고 시방정토(十方淨土)로써 체(體)를 삼아 생멸상(生滅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 이르기를,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로부터 관정(灌頂)과 수기(授記)를 받은 이가 법계(法界)에 충만하여 그들이 모두 보처(補處)와 보궐(補闕)이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지 않으신 까닭에 궐시(闕時)가 없으므로 좌우보처상을 모시지 않았으며 영탑(影塔)을 세우지 아니한 것은 화엄(華嚴) 일승(一乘)의 깊은 종지(宗旨)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엄 스님은 이 화엄 종취(華嚴 宗趣)를 의상에게 전해 주었다. 의상이 전수를 받은 후 원융국사에까지 전승(傳乘)되었다. 그러므로 국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절에 주석(住錫)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공(林公)의 이름은 악(嶽)이니, 이미 자하(紫霞)를 역임하고, 마음은 주자(朱子)의 사상을 따랐고 가난한 초당(草堂)에 살면서도 안빈낙도(安貧樂道) 하였다. 국사는 명월(明月)이 이미 오백(五白)을 지난 것과 같이 이미 연로(年老)하였다. 계사년(癸巳年)에 문도들에게 이르기를, “형기(形氣)는 마침내 뱀이 허물을 벗듯 변선(變嬗)으로 돌아가는 것, 소요향(逍遙鄕)열반처가 어느 곳에도 없다. 나도 반드시 앞으로 더 이상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없을 터이니, 이미 이전에 인사(印寫)한 대장경 일부(一部)를 정중한 봉안의식을 거쳐 안국사(安國寺)에 진장(鎭藏)토록 하라.”하고, 문인 강간(綱幹)을 보내어 “화엄법회를 한 번 개설(開設)토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그 날 저녁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곧 4월 17일이었다.

 

이 날 두 마리의 청룡(靑龍)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한 마리는 시포역(柴浦驛)에서 다른 한 마리는 부석사 남쪽 계간(溪澗)으로부터 올라갔다. 문도들이 비가 오듯 눈물을 흘리면서 구지(釦墀)에 부음(訃音)을 전달하였다. 황상(皇上)께서 결(訣) 패일(佩日) (결락) 옥새(玉璽)를 찍은 왕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시호를 원융(圓融)이라 올리고 특이한 물건들을 보내어 부의(賻儀)하고 겸하여 부승록(副僧錄) 혜영(惠英) 등을 보내서 장례를 감호(監護)하도록 하였으니, 5월 4일에 부석사 동쪽 산등에 장사를 지냈다. 국사께서 살아 있을 때는 산림(山林)으로 문을 삼아사부대중(四部大衆)이 운집하였으나 열반하신 후에는 그 적막함이 마치 대문을 닫은 것과 같았다.

 


오호라! 담복화(薝蔔花)의 향기는 사라지고 온 법계(法界)에 비린내가 진동하며 보리수 나무는 부러졌으니 우리들은 앞으로 누구의 음덕(蔭德)을 받을 것인가? 스님의 세수는 90세요, 승랍은 78세였다. 문인 중에 수좌(首座)위(位)에 있는 스님은 광증(廣證)이요, 삼중대사(三重大師)는 구관(口觀)·증해(證海)·수난(秀蘭)·작현(作賢)·원창(元昶) 등이며 대사(大師)는 관옥(觀玉)·간성(看成)·해원(海元)·연윤(聯胤) 등 1,438인이니, 그 중에 혹자는 국사의 골수(骨髓)를 얻었고 혹자는 스님의 골(骨)을 이어받아 모두 강학(强學)이며 금언옥조(金言玉調)와 같은 문장(文章)을 토출(吐出)하였다. 새가 하늘을 날으나 어찌 그 허공의 끝을 헤아릴 수 있으랴! 양쪽 앞발로 땅을 치면서 기어가는 귀부(龜趺)와 용(龍)머리모양의 관석(冠石)이 내가 지은 이 비문에 대하여 보잘것 없는 작품이라고 여길 것이다.

 

삼가명을 읊어 이르기를,네발가진 짐승 중엔 일각(一角)이 제일(第一),날아다니는 새들에겐 구포(九包)으뜸.일의일발(一衣一鉢) 납자(衲子)들의 모임중에는 부석사(浮石寺)의 원융국사(圓融國師) 제일(第一)이시다.


유학하여 깨달은 후 귀국하셔서 해동불교(海東佛敎) 굳게 지켜 홍포(弘布)하시니 마군들은 손을 들고 항복하였고 리 스님 인개(忍鎧)로써 천양(闡揚)했도다.


(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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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중생들을 인도하시니 말세중(末世中)에 한 부처님 출세(出世)하셨네.
列 (결락) 牀 양조대(兩朝代)에 주청(奏請)하여 귀사(歸寺)하시다.


몽중(夢中)에서 수기(授記)받아 국사(國師)가 됐고 코곤소리 독경처럼 들리었으며 말못하는 어린시절 화재를 피해

(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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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토록 썩지않게 돌에 새기다.


▨▨실 수비원(▨▨室 守碑院)중대사(重大師)인 홍수(洪首)·현긴(賢緊), 대사(大師)인 대종(代宗).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2】(1995)〕

 

비문 마지막 문장에 수비원守碑院이 눈길을 끈다.

그렇다면, 탑비와 더불어 부도를 관리했던 전각과 스님이 상주했다는 이야기 아닌가?  

  

 

의상대사 행적비

근자에 세운 비석이다.

부석사에는 의상대사의 행적비인 '부석사본비浮石寺本碑'가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행방을 알 수 없다.
 

 

비각 앞으로 펼쳐진 전망

 

(계속)

 

201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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