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주시

영주...흑석사

임병기(선과) 2018. 4. 5. 07:28
728x90

 

 

 

흑석사.

마애불 앞 전각, 요사(?)를 새롭게 불사한 것 같다.

옛답사기를 찾아보았더니 마지막(2005.08.27)으로 다녀 온지가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렇게 흘렀나?

당시에는 사진을 찍지 않아 문화재청 사진으로 대신하였으며, 겁도 없이 엉터리 설說도 많이 풀고 다녔다.

하지만 그대로 두련다.

이력을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옛 글(2005.08.27)

영주읍내에서 봉화 방향으로 길을 옮겨 이른바 의상 대사가 부석사 창건전 세운 것으로 알려진 5부석 (초암사,비로사,성혈사,축서사,흑석사)의 하나로 알려진 흑석사에 도착했다. "흑석사는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어 폐찰로 내려오다가 8.15광복 후 소백산 일대 소개령에 의하여 순흥 초암사에 계시던 김상호 스님에 의하여 초암사 재목을 옮겨와 중창된 것이다".

 

흑석사란 이름의 유래는 절 가까운 마을 이름을 흑석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전해 지는데, 마을 뒷편 산자락에 검은 빛깔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흑석사의 첫느낌은 무척 빈 듯한 느낌인데도, 아늑함을 동시에 주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진입 공간이 우측 산자락의 석조여래좌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장치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석조여래가 본래부터 이자리에 계셨다는 전제하에 성립되는 가설이다. 

 

독서 삼매에 빠져 흘깃 눈 한번 마주치는 스님에게 인사를 드린 후 극락전에  앉아 계시는 아미타 목조 불상을 바라 보았다.

전란을 피해 법천사,초암사를 거쳐 이곳에 모셔진 아마타불의 복장에서 법신 사리와 유물에 의해 조선 세조 4년(1458)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목조 불상이다.복장유물에서 명확한 기년이 확인되었고, 다수의 전적과 복장물이 함께 출토되었다. "불상은 계란형의 좁고 살이 빠진 상호에 전체 불신표현도 아담하고 다소 세장한감이 있어 고려 후기의 화려하고 우아한 불상과는 차이를 보인다. 머리는 나발이 뚜렷하고 중간계주와 정상계주가 있으며 수인은 아미타중생인을 하였다."

"옷주름은 신체 표현에 비해서는 높고 큰 편이나 유연하고, 세장한 신체에 동감을 주고 있다. 상체에 비해 하체는 좀더 살이 오른 편이다. 승각기는 수평의 띠처럼 끊어지게 처리되었고 그 아래로 매듭이 처져내렸다. 왼쪽 팔굽에도 Ω형의 겹친 표현이 있으나 고려후기의 불상이 새롭게 변한 새로운 양식의 불상이라 할 수 있다."

 

극락전 앞에는 불상의 대좌가 분명한 석조부재에 석탑 몸돌과 옥개석을 올려 놓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차라리 더 좋을텐데 양복위에 두루마기를 걸친 것과 뭐가 다르랴?

 

범종각 전각 뒤에 버려진(?) 광배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결코 화려하고 장대한 석불이 아니라도 석불좌상을 모셨으면 한다.

 

확인된 복장물은 『아미타삼존복장기』등 7종, 불상조성권선문, 『불설대보부모사중경목판본』『백지묵서불조삼경합부』『금니묘법연화경권이변상도』『감지은니묘법연화경』3권 등의 전적과 보자기, 번 등의 직물류, 복장용의 사리, 칠약, 오곡 등이다. 불상 좌우에 협시상을 새로 봉안하고 목불상의 광배와 대좌도 후보하였다."

 

 

몇개의 계단을 올라서면 꽃미남, 청년 부처님이 산아래를 향해 미소를 머금고 계신다. 약간의 손상을 입은 코를 제외하고는 완벽(?)해보이며, 삼도가 뚜렸하나 삼국통일 후 당당한 어깨에 비해 힘이 줄어든 항마촉지의 오른손, 왼손에는 약합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불로 보인다.

 

자연 암반이 보개처럼 자리하고, 대좌가 없는 석조여래 뒤에는 광배 대신 기막힌 삼존불이 새겨져 있는데, 본존불은 가슴 이하, 협시불은 목이하를 생략해버려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물론 본존 약사여래불을 고려한 배치로도 보이기도 하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산아래 스님은 여전히 독서삼매에 젖어 있고, 미련한 답사객은 땀에 젖어 누구를 향한, 무엇을 바라는 것조차 모르는 채 절을 했다.

 

2005.08.27

 

 

극락보전 삼존불

 

 

흑석사 목조아미타좌상

유근자 교수님의 글을 가져왔다.

 

불교신문(2017.02.15).동국대 유근자 교수

 

조선의 왕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왕은 제4대 세종(1397~1450)이며 가장 연민을 느끼게 하는 왕은 세종의 손자인 제6대 단종(1441~1457)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종의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였던 세조(1417~1468)는 억불숭유 정책 속에서도 불교에 호의적인 입장을 취했던 대표적인 왕이었지만, 불교의 자비와는 거리가 먼 행동으로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된 인물이다. 

 

조선 초 단종과 세조 그리고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 이유(李瑜, 1426~1457)와 깊은 관련이 있는 불상이 바로 세조 4년(1458년) 조성된 국보 282호 영주 흑석사 목조 아미타불상이다. 영주 흑석사 아미타불상은 단종과, 세종의 여섯째 왕자이며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됐다. 단종은 1455년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1456년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된 후, 1457년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다. 같은 해 9월에는 금성대군이 유배지인 경상도 순흥(현재의 영주)에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10월에 금성대군과 함께 처형됐다. 

 

단종과 함께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은 어머니 소헌왕후(1395~1446)가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할아버지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1468)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그리고 형인 문종의 부탁으로 조카인 단종을 지키려다 1456년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되었고, 이곳서 영흥부사 이보흠과 단종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실패해 1457년 10월에 처형당했다. 

 

지난해 10월 불교중앙박물관에서는 ‘꿈꾸는 즐거움 극락’이라는 특별전이 열렸는데 이 때 대표 유물로 ‘영주 흑석사 목조 아미타불상과 복장 유물’이 있었다. 조계사불교대학 수강생들과 함께 이 전시회를 보러 갔는데 흑석사 아미타불상이 전시장 입구에 진열되어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이 불상 앞에서 합을 하고 난 분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우리나라 부처님 같지 않아요.” 

“그러면 어느 나라 부처님 같은가요?” 

“글쎄요. 중국 부처님 같아요.”

 

흑석사 아미타불상은 전문 지식이 없는 불자들의 눈에도 중국 불상으로 보일만큼 우리나라 불상과는 얼굴 모습이 많이 다르다. 이런 불상의 얼굴은 당시 명나라와의 교류로 나타난 중국풍이 반영된 것으로, 가장 선진적인 중국 문물의 수입처는 당시 왕실이었으니 왕실에서 발원한 불상에 도입된 것이다.

 

그동안 필자는 조선시대 불상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기 분석 작업을 하면서 가장 주목한 것은 불상을 조성한 목적이었다. 조선 초기 불상의 대표작인 흑석사 아미타불상은 다른 불상에 비해 불상 조성에 시주를 권하는 권선문(勸善文)과 불상 조성 후 작성한 복장기(腹藏記)가 남아 있어 불상 조성의 전후 사정을 알 수 있는 불상이다. 

 

불복장기는 옅은 청색으로 물들인 명주(140cm)와 그 뒷면에 이어 붙인 같은 폭의 한지(230cm)로 연결되어 있는데 의빈 권씨를 비롯한 태종의 후궁들과 효령대군과 세종의 사위 안맹담을 비롯한 왕실 종친, 제작에 참여한 장인과 스님 등 275명의 시주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1457년 2월 권선문이 작성되었고, 1458년 10월에 복장기가 완성됐으니 불상 조성 연도는 1458년이다. 왜 권선문과 불상 조성 연도가 다를까? 세조 때인데 왜 태종의 후궁들 및 아들과 손자, 세종의 딸과 사위가 시주자로 등장할까? 1457년이라는 해를 주목해 자세히 살펴보면 단종과 금성대군의 죽음과 시주자들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흑석사 아미타불상의 권선문이 기록된 것은 ‘천순원년이월(天順元年二月, 1457년)’로 되어 있지만 ‘천순원년’이 쓰여진 종이는 덧붙여져 있기 때문에, ‘천순 2년’을 ‘천순원년’으로 수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흑석사 아미타불상이 완성된 것은 1458년 10월이었고 이때는 단종과 금성대군의 1주기가 되는 때였다. 따라서 이 아미타불상은 단종과 금성대군을 비롯한 단종 복위 사건으로 1457년 10월에 희생된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을 가능케 하는 것은 권선문과 복장기에 등장하는 시주자들 중 왕실 관련 인물들이 있는데, 이들은 단종 및 금성대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단종과 관련된 사람들은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 이보(李補, 1396~1486)와 그의 아들 의성군 이채(李菜, 1411~1493), 그리고 별도의 천에 기록된 세종의 딸인 정의공주(1415~1477)와 그의 남편 연창위 안맹담(1414~1462)이다. 

 

효령대군과 그의 아들 이채가 흑석사 아미타불상 조성에 참여한 이유는 효령대군의 부인인 예성부부인 해주 정씨(1394~1470)의 조카인 정종(鄭悰, ?~1461) 때문이다. 정종은 문종의 딸이자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1436~1473)의 남편으로,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금성대군과 연루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다. 세종의 사위인 안맹담은 세조가 단종 주변의 김종서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 계유정란의 공신이지만 ‘요공(了空)’이라는 법명을 가진 불교신자였고, 정의공주는 ‘묘화(妙和)’라는 법명을 가진 신자로서 조카인 단종과 동생인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왕실의 시주자들 가운데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1468), 명빈 김씨(?~1479), 신빈 신씨(?~1435) 등은 단종보다는 금성대군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가운데 의빈 권씨가 흑석사 아미타불상 조성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신빈 신씨는 1435년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유인 신씨(孺人 申氏)’로 기록되어 있다. 의빈 권씨와 태종 사이에는 정혜옹주(?~1424)가 있었지만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혜옹주 사후에 태어난 금성대군은 어머니 소헌왕후를 대신해 세종의 권유로 의빈 권씨가 보살폈기 때문에 그녀를 어머니처럼 여겼다. 신빈 신씨는 1422년(세종 4)에 태종이 죽자 의빈 권씨와 함께 스님이 되었고 이 때문에 그녀를 의빈 권씨가 시주자 명단에 올린 것으로 보인다. 

 

(중략)

 

초암사는 금성대군이 유배된 곳인 경상도 순흥(지금의 영주)에 위치하고 있고, 금성대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제단인 금성단(金城壇)이 있는 곳이며, 의빈 권씨는 금성대군을 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해 근처 사찰에 봉안했을 것이다. 이 불상은 초암사에서 흑석사로 이동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흑석사 아미타불상은 황준량의 시에 등장하는 그 불상으로 여겨진다. 

 

흑석사 아미타삼존불상은 아미타불·관세음보살·지장보살로 구성되었다고 권선문과 복장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배치와 달리 대세지보살 대신에 지장보살이 선택된 것은, 단종과 금성대군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로는 조선 초 대표적인 영가천도재인 수륙재를 지내던 사찰이며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건축된 강진 무위사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아미타불상을 조성한 장인들은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조각승들이 아니라 왕실 소속 장인들로 추정된다. 화원(員) 이중선과 이흥손, 금박 담당은 이송산, 각수는 황소봉, 소목 담당은 양일봉 등 분야별 장인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불상을 조성하거나 불화를 그리는 장인들을 화원이라 불렀는데, 흑석사 아미타불상 조성에 주도적으로 역할을 한 화원은 ‘이중선’이다. 그는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이여(李璵, 1425~1444)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56년(세조 2)에 왕실 발원으로 조성한 견성암 약사삼존불 조성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인물로 여겨진다. 

 

흑석사 아미타불상의 머리 정상과 중앙에 장식된 원통형의 계주(珠), 유난히 뾰족한 육계(肉), 좁은 어깨와 긴 허리를 강조한 상체, 팔과 배 주변의 옷주름 등은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왕조 교체라는 시대적 상황과 함께 중국에서 새롭게 유입되기 시작한 명나라 불상의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또한 지면 관계상 다루지 못한 흑석사 아미타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경전과 직물 등은 15세기 서지사 및 복식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불교중앙박물관. 꿈 꾸는 즐거움 극락 展(2016.11.04)

 

 

 

 

극락전 앞 석조부재

불상대좌와 석탑부재를 쌓아 놓았다

 

옛답사기에는 광배조각도 기록하고 있으나 놓치고 사진에 담지 못했다.

 

 

방형 지대석

팔각 하대석 하대는 2매부재로 저석과 중석 갑석이 일석이며,중석에는 안상을 새겼다.

하대석 상대에는 복련이 조식되어 있고 중대석 괴임이 조츨되어 있다.

중대석은 팔각으로 특별한 문양은 없다

 

 

석불대좌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은 결실된 상태이다.

 

 

석불 중대석위에 석탑 탑신 하나, 옥개석 2개,파손된 보주를 상륜부에 올려 놓았다.

탑신에는 양우주가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초층 탑신으로 추정된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급하고, 절수구는 생략되었으며, 층급받침은 4단이다.

상부에는 2단 탑신괴임을 마련하였다.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초기에 조성된 석불과 석탑 부재로 보인다.

혹, 석불대좌는 광배편과 더불어  마애불앞 석조 약사여래좌상의 부재는 아니었을까? 

 

 

석조여래좌상. 마애삼존입상

 

 

석조여래좌상

주변에서 발견되어 모셨다고 전하며,코,손.귀에 보수한 흔적이 남아 있다.

 

나발, 육계, 방형의 살찐 상호.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거 법의는 통견, 항마촉지 수인, 약합을 들고 있다.

약합은 후대에 후보 여부는 불분명하다.

 

길상좌의 무릎은 신체에 비해 낮고, 옷주름이 무릎사이로 부채꼴로 흘러 내렸다.

다소 위축된 어깨와 가슴표현, 낮은 하반신 등으로 미루어 9세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한다.

 

 

본존불과 삼산관을 쓰고 있는 협시보살

무엇 때문에  하반신을 조성하지 않았을까?

 

 

본존불은 육계가 높고

삼도를 새겼으며, 귀는 길어 어깨에 닿았다.

 

협시보살은 상호를 달리 표현하였다.

 

 

 

 

 

 

십년이 훌쩍 지난 그 시절

탐방객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독서삼매에 몰입해 있던 스님은 어디 계실까?

 

봄날에는 아지랑이 처럼 피어나는 그런저런 옛 인연들을 만나 보고 싶다.

 

3018.03.16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