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정水月亭 도사리 135-1. 매화마을로 잘 알려진 섬진마을 섬진나루에 자리한 정자 수월정은 광양 출신으로 선조 임금 때인 1598년 나주목사를 지낸 정설(鄭渫)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정자 옆 유허비는 1971년 정설의 후손들이 수월정 옛터에 세웠으며, 지금의 수월정은 1999년 광양시에서 새로 지었다고 한다. 수월정기水月亭記 士大夫之進不得有爲於斯世。棄位而巷處者。必謀明山麗水之濱。池館苑囿之樂。一以爲淸閑寂寞之娛。一以抒憂時戀闕之懷。六一翁之於穎上。杜祁國之於睢陽。皆是已。前牧使光州鄭侯。年五十而棄於時。遂求先大夫玉川先生之別業於光陽。距先廬十里許而居之。選勝爲亭。以水月爲名焉。余觀夫南方之山。巍然高者以千數。而白雲爲最奇。南方之水。可行舟者以十數。而蟾江爲最大。以白雲之東麓爲屋山。而以蟾江之上流置屋下。則勝絶有不暇論也。而況天下之三神山。方丈居其一。煙火食人之生世間。聞方丈之名者亦罕矣。其於起居飮食。早夜相對者。何如哉。左嶺右湖。控引島蠻。商舡之所走集。市賈之所輻湊。岳陽朝嵐。鶴洞暮煙。躑躅成山。火雲成峯。霜落而千林紅。氷塞而長河白。千態萬狀。畢集於几席之下。則此水月之所以選勝也。兵火十年。文物一空。而水月則依舊也。世降俗末。人心不古。而水月則猶前也。市道日巧。一錢俱湧。而水月則無價也。棄枯集菀。門雀可羅。而水月則不遐也。逝者如斯而未嘗往也。盈虛者如彼而卒莫消長也。浮光躍金。靜影沈壁。水得月而益淸。月得水而益白。直與侯之胸采。上下乎同符。則此水月之所以得名也。余雖不獲登公之亭。而幸嘗竊誦公之歌。見公之書。已得水月之大槩。而若公之心則余固知之。於是乎書。 "사대부가 벼슬길로 나가 세상에서 더 이상 쓰임이 없으면 자신의 지위를 버리고 시골에서 묻히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이름난 산과 아름다운 물이 있는 곳을 골라서 집을 짓고 자연의 즐거움을 누린다. 세월 따라 가는 것은 모두 이와 같으나 수월은 간적이 없고 차면 비워지는 것이 저와 같으니 수월은 끝내 사라지거나 자라남이 없다. 달빛에 물결은 금빛으로 일렁이고 고요한 달그림자는 푸른 물결에 잠긴다. 물은 달을 얻어 더욱 맑아지고, 달은 물을 얻어 더욱 희여 진다. 이는 바로 정 현감의 가슴이 맑고 투명한 것과 같으니 수월이라고 이름 지은 까닭이다. 옛자료에는 "송강 정철은 수월정기(水月亭記)라는 가사를 지어 칭송했고, 수은 강항(姜沆)은 수월정 삼십영(水月亭 三十詠)이라는 시조를 지어 수월정과 섬진강 경치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현재는 수월정기도 강항이 지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섬진진터 다압면 도사리 섬진마을에 위치하였던 섬진진은 하동과 연결되는 가장 큰 규모의 군사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뿐만 아니라 진상면에는 섬거역이 있었고, 다압면 신원리 원동에는 섬진원이 있어 섬진나루는 전라도와 경사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문헌상 섬진진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호남진지湖南鎭地에 의하면 '처음 섬진에 군사를 배치한 사람은 이충무공으로 섬진의 건너쪽인 두치豆恥(置)에 조방군助防軍을 두어 이곳을 지키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희양지曦陽誌에 "임진왜란 후인 1603년 통영에서 이곳을 도청都廳을 설치하고 군사를 뽑기 시작하였으며, 정식으로 수군진을 삼은 것은 1705년으로 이곳에 종8품의 별장을 두었다"고 하였다. 별장의 직급을 언제 높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지도서에는 종6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섬진진에는 성이 축조되지는 않았으나 희양지曦陽誌에 서해관"誓海館"이란 집무청 및 창고 6채와 아사衙舍 등 8채의 집이 있으며, 병선으로는 방선 2척防船 2隻, 사후선 2척伺候船 2隻이 있었다. 또한 당시의 주둔군은 359명이었으며, 진鎭 주변에는 민가 88호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 당시 진은 폐쇄되고 없었으므로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고 진이 폐쇄되기 이전인 1895년 이전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현재 진지鎭址의 유적상황을 살펴보면 수월정유허비 주위에 별장들의 공적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비의 좌대 4기가 남아 있다. 또한 아사衙舍와 내아內衙, 진창과 작청, 군기, 장청, 성황당 터와 배를 묶는데 사용하였다는 선돌바위가 있다...출처/위키백과(한문 음차는 나의 해석으로 틀릴 수도 있음) 섬진진터에 좌대가 4기 남아 있으며, 본래는 17기가 있었다고 한다. 좌대는 수군 별장의 공적비 좌대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등 위에 비신을 세웠던 장방형 홈이 있으나 시멘트로 막아버렸다. 일반적으로 비석의 좌대는 귀부라 칭하며 거북이 상으로 조성하지만 섬진진터 좌대는 투박하고 간결하게 묘사한 두꺼비상이다.
왜 귀부가 아니라 두꺼비 좌대를 조성하였을까? 섬진마을에 구전되는 "섬진강" 이름의 유래가 된 두꺼비 전설 때문으로 생각된다.
강항의 수월정삼십영 水月亭三十詠 제10영 서산낙조 西山落照 미양렴렴백운간 微陽瀲瀲白雲間 흰 구름 사이로 뉘엿뉘엿 지는 해가 (개인적인 의역 입니다) 2017.1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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