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상남도/하동군

하동...지리산 사리암지 부도

by 임병기(선과) 2017. 11. 3.
728x90
728x90

 

 

 

아~~~~~~~ 사리암지!!!!!

지금까지 짧지 않은 답사 경험중 가장 많은 도전끝에 만난 님이시다.

 

2016년 지리 99카페에서 부도가 남아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신흥사지 부도, 의신사지 부도를 뵌 다음 단천마을을 경유하면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었다.

웬걸. 단천마을 경로당 할머니들께서 이구동성으로 폭우로 길이 끊어져 접근 불가하며,쇠점터 부근 진입 계곡을 알려 주셨다.

 

몸이 피곤하여 당장은 포기하고 몇달 후, 할머니들이 알려주신 계곡으로 접근하여 무려 4시간 이상을 뒤졌으나 결과적으로 엉뚱한 계곡으로 진입하여 뵙지 못했다.

 

세번째, 우리카페 오분향님의 글을 보고 통화 후 정확하게 계곡으로 들어갔으나 사리암지 100미터 전 물골재(공식명칭은 아닌 것 같다)에서 사리암재로 바로 넘어 가지 않고 우측 능선을 타는 바람에 죽도록 고생만 했었다.

 

네번째, 겁도 없이(비지정 탐방로이다) 국립공원 부스를 찾아가 위치를 파악하고 사정사정하며, 우리카페 소개 후 휘파람 불며 등반을 하였으나 전혀 엉뚱한 능선을 타는 바람에 소득없이 거의 탈진 상태로 하산 하였다.

 

그리고

오늘, 사리암재를 경유한 프로 산꾼들의 산행기를 유심히 읽고 우리카페 오분향님과 통화 끝에 물골재 고개 넘으면 사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리암지에서도 헤매이긴 하였지만 무려 4전 5기 끝에 뵌 사리암지 부도다.

 

답사를 원하시는 분에게는 디테일하게 동선을 설명해주겠지만, 비지정 탐방로이어서 소개하지 못 함을 이해바란다.

 

 

이렇게 사리암지에 집착한 까닭이 무엇일까?

 

욕심, 욕심 때문이다.

지리산 자락 구례,남원, 함양,산청,하동의 모든  부도를 답사 하겠다는 과욕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는, 이번 남도 답사에서 그간 뵙지 못했던 지리산 자락의 부도를 모두 뵈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사리암지.

창건과 폐사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가장 최근 자료인 디지털하동 문화대전에는 대성골에 사리암이라는 마을이 있었다는 내용만 보이며, 폐사지는 물론 부도에 관한 언급은 없다.

 

지리산을 모르기에 자신은 없지만 현재 유존 하는 사지중에 가장 큰 규모의 축대, 경작지가 남아 있는 사지의 한 곳으로 생각된다.

 

 

지리산에 관한 자료가 가장 많은 "지리 99카페"에는 사리암지와 관련된 글이 몇 편 있다.

 

가객님의 글이다.

 

사리암터는 현 단천골의 지류인 물골의 하류에 위치한 폐사지로서 지형도에 사리암으로 표기가 되어져 있는 곳이다.
마을 이름의 변경과 함께 절터의 모습까지 완연한 주거지로 탈바꿈을 한 보리암과는 달리, 사리암은 절집의 자리에 길길이 자란 왕대나무가 차지하고 있어 어느 곳이 본당인지도 확인조차 어렵지만 주춧돌이 보이고 돌층계의 흔적이 남아있다.


수 천 여 평의 너른 지대에 정교하게 쌓은 축대들이며 오래된 기와와 자기 파편들도 수두룩하게보이고 부도 1기도 서 있다.
사이사이 고임돌을 끼워서 쌓은 축대들의 흔적은 지금까지 보아온 지리산 폐사지의 축대들 중 가장 거대하고 견고한 모습으로 여러곳 남아있다. 석종형의 부도는 20여 년 전 처음 사리암을 찾았을 때는 분명히 왕대밭 상류 작은 시누대숲 옆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근세에 손을 타서 지금은 무덤가로 옮겨져 있으며, 안타깝게도 부도의 주인이 누군가인지 짐작도 못할 만큼 각자의 자국만 남아있을 정도로 표면이 말끔하게 세척을 당한듯하다.

한편 사리암터에는 지금부터 30년 전 까지만도 두가구의 민가가 화전을 일구고 살았었다고 한다.

여느 절집들이 전하는 불교관련 설화와는 달리 두 절집이 도둑의 소굴이었다고 전하는 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보리암과 사리암의 단편적인 역사를 짚어본다.

15세기 초반 지리산에 본거지를 정하고서 주변 관가는 물론 양가의 재물약취를 일삼으면서 활동을 한 도둑의 괴수는 전남 무안사람으로 어부출신의 장영기(張永己)라는 자이다. 따르는 무리가 일백이 넘었던 장영기 는 장건(壯健)하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지리산 화개골 보리암터에 초옥(草屋) 20여 간을 지어, 낮에는 집에 모이게 하고 밤이면 모든 도적을 여러 곳으로 나누어 보내어, 불을 지르고 재물을 겁탈하기도 했다.

또한 도둑들은 백주에도 거리낌 없이 길 가는 사람을 만나면 즉석에서 죽이고 재물을 탈취하니 사람들이 그의 도당이 오는 것을 보면 집안 재물을 모두 주어서라도 죽음을 모면하기를 바랐다. 이렇게 해서 모은 그의 의물(儀物)이 재상(宰相)과 비등하였고, 꾀가 많고 행동이 하도 재빨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가 없었으며, 구례. 하동 등 인근의 관군(官軍)이 합심을 하여서 뒤를 쫓아도 번번이 실패를 하였다.

이에 당시 경상 절도사 이극균은 대군의 관군을 이끌고 장영기 일당의 소탕을 위해 도적의 산채를 급습을 하니 도둑들은 어둠을 틈타 이미 도주를 한 후 이었고 19채의 산막과 제단까지 갖추어진 보리암터에는 그들이 버리고 간 말이 14필이고 말안장과 견장들이 찢기고 불에 타고 있었다. 이후 관군에게 쫓긴 장영기 일당은 보리암터에서 60리 떨어진 지리산 속 더 깊숙한 골짜기인 사리암(沙里庵)옛 터전으로 거처를 옮겨서 둔치(屯치. 진)를 친다.

이어서 임금이 바뀌어 성종 대에 이르러서도 장영기의 횡행은 수그러들 줄 모르고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조정에서는 일찍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도원수 都元帥 허종(許琮) 을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임명하여 파견을 한다.
허종이 경상절도사 이극균과 합세하여 보병들을 이끌고 도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 사리암터의 봉우리들을 포위하자 장영기는 그의 아내로 하여금 갈고(羯鼓.장구)를 치게 하고, 모든 도둑으로 하여금 봉우리의 아래로 내려가서 관군을 치게 하니 허종(許琮) 또 한 한 도의 병마(兵馬)를 다스리면서도 겁을 먹고 능히 제압하지 못하고, 장영기 를 범과 같이 두려워하여 도둑들의 세력만 더 커지게 만들어서 허종이 이끄는 경군(京軍)을 괴롭히기에 이른다. 나중에 장영기는 결국 허종의 지략으로 지리산에서 쫓기어 장흥의 바다까지 몰리었다가 허종과 장흥부사 김순신(金舜臣)이 합세하여 지휘하는 관군에게 잡히어서 처형을 당한다.

지리산도적 장영기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제하고도 조선의 역량 있는 고서들인 서거정의 ‘속동문선’. 송시열의 ‘송자대전’. 이긍익의 ‘연려실기술’등에도 기록이 되어있으며,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도 등장을 한다.

김종직은 지리산 산행도중 창불대에 올라서 화개골을 가리키면서, “일찍이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湖南)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영기는 구서(狗鼠)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李公) 같은 지용(智勇)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로 공(功)이 돌아갔으니, 탄식할 일이다.”고 기록을 했다. 

 

 

30여년 전 까지 화전민이 거주하였으며, 관군의 진입으로 초토화되었음을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

그런 서글픈 역사를 품은 사리암지이다.

부도도 현 위치로 옮겨 왔으며 당호도 새겨져 있었던 것 같다..

 

 

사리암지 부도.

 

인연, 어렵게 만난 인연이 부끄러운 듯

대가집 별채 아기씨처럼 나무 그늘에 자태를 숨기고 맞이한다.

 

나 역시

눈도 마주치지 못 하고 성큼 다가가

그냥, 마냥, 아무 생각없이, 깊게 끌어 안고 얼굴을 맞대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볼을 타고 흘러 내리고, 찬 화강암 탑신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뭐지?

아직까지 이런 경험이 없었기에 주체 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한참 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민묘 뒤편.

자연석을 배례석으로 옮겨 온 민초들의 정성이 가슴으로 다가 온다.

멋부리지 않고 대좌 상부를 깊게 파내고 탑신과 보주가 일석으로 조성하였다.

 

탑신을 둘러보아도 당호는 육안으로 확인 불가했다.

 

조선후기에 조성된 석종형 부도이다.

 

 

 

탑신 상부

바람에 연잎이 슬쩍 들려져 있다.

불경스럽게도 마르린 먼로가 스쳐가고...

 

연주문을 두른 후 앙련위에 보주를 올렸다.

 

 

대좌

 

 

탑신

 

 

 

 

봄날

진달래가 지천이고 접동새가 우는 날이 었다면

쉽게 내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2017.10.21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