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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하동군

하동...청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by 임병기(선과) 2017.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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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심사. 악양면 정서리 570

하루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악양들판을 지나 청심사로 향하는 길.

내비양은 친절하게도 감나무 과수원으로 안내하여 사람의 혼줄을 빼놓고 만다.

과수원입구에 작은 이정표를 발견 못한 내탓이겠지.

그리고도 다시 좌측 이정표를 무시하고 길이 끝나는 지점까지 직진하여 되돌아 나오고...

 

청심사는 청심다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 같다.

불사를 계획하고 있지만 현재는 인법당에 여래상을 모시고 운영중이었다.

참고로 사전 허락을 받고 불상을 뵈어야한다.

 

 

목조여래좌상.조선후기

호분을 입혀 개금한 불상 이었으나 현재는 박락되어 옻칠이 드러난 모습이다.

귀여운(?) 소년 모습의 상호는 불신에 비해 크며, 흙으로 별도로 조성한 나발,중간 계주,장상계주를 두었다.

방형의 상호는 턱부분에서 둥글게 마감하였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고, 결가부좌, 별조로 조성하여 끼운 양손은 아미타 수인을 결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수평의 승각기가 보이며, 다리 앞에는 넓은 두 개의 옷 주름을 중심으로 양측이 대칭되게 새겼다.

아쉽게도 복장유물이 전하지 않는다.

 

디지털 하동문화대전를 비롯하여 여러 자료에는 화승 색난계열의 금어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색난色難.조선후기 조각승

1640년경 ~ 18세기 전반(1730년 이후)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전라남도 고흥군 점안면 팔영산 능가사에 거주하면서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의 사찰에 목조삼존불좌상과 나한상,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을 제작하였다. 통정대부()와 가선대부()의 공명첩을 받았다. 그의 계보는 일기, 하천 등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에 가장 중요한 조각승 계보를 이루고 있다.

 

색난은 생몰년이나 조각승()이 된 배경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불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과 사적기 등의 문헌기록을 통하여 활동 시기와 지역, 불상 양식, 조각승의 계보를 밝힐 수 있다.

 

색난이 만든 불상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1680년에 전라남도 화순 영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광주 덕림사 봉안)이다. 그는 이 불상을 만들 때 수화승()이었으므로 최소한 1670년대부터 불상 제작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684년에 전라남도 강진 정수사 나한전과 1685년에 전라남도 고흥 능가사 응진전 목조석가삼존상과 나한상 등을 조성하였는데, 특히 능가사 응진전 불상을 제작할 때 ‘가섭대시주() 통정겸금어색난()’으로 언급되어 불상 제작에 시주자로 참여하고, 정삼품() 문관의 품계에 해당하는 통정대부()의 공명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678년에 경상남도 김해 은하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을, 1689년에 일본 교토 고려미술관과 서울 한국불교박물관에 소장된 목조불감을 만들었다.색난은 1693년에 전라남도 구례 천은사 응진전 목조석가삼존상과 나한상을, 1694년에 전라남도 화순 쌍봉사 대웅전과 극락보전 불상을 제작하고, 1698년에 고흥 능가사 범종 주조에 시주자로 참여하면서 전라남도 해남 성도암 목조보살좌상(제주도 관음사 봉안)을 개금하였다.

 

또한 그는 1700년에 해남 성도암에 나한상을, 1703년에 구례 화엄사 각황전 불상 가운데 석가모니()와 관음보살()을, 1707년에 고흥 능가사 불상을 만들면서 『선문염송설화()』 간행에 대시주자로 참여하고, 1709년에 고흥 금탑사 보살좌상(고흥 송광암 봉안)과 목조삼존불좌상(광주 덕림사에 봉안되었다가 1980년에 화재로 소실)을 조성하였다. 그는 1711년에 고흥 능가사 대웅전 기와()와 1730년에 전라남도 곡성 관음사 대은암 범종(곡성 서산사 소장) 제작에 시주자로 참여하였다.

 

색난은 1703년에 만든 구례 화엄사 각황전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팔영산사문()으로 언급되어 고흥 능가사에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750년에 건립된 고흥 능가사사적비() 후면에 가선() 색난으로 언급되어 1709년 이후에 종이품() 문무관의 품계에 해당하는 공명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발원문과 사적기 등을 중심으로 색난을 생애를 살펴보면, 색난은 1640년을 전후하여 태어나서 1660년대 불상 제작의 수련기와 보조화승으로 거친 후, 1680년부터 불상 제작의 수화승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화순 영봉사, 고흥 능가사, 강진 정수사, 김해 은하사, 구례 천은사, 화순 쌍봉사, 해남 성도암과 대흥사, 구례 화엄사, 영암 도갑사, 하동 쌍계사, 고흥 금탑사 등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의 많은 사찰에 불상을 제작하였고, 1698년에 고흥 능가사 범종, 1707년에 『선문염송설화』 간행, 1711년에 고흥 능가사 대웅전 기와, 1730년에 곡성 관음사 대은암 범종 제작에 시주자로 참여하여 사찰 불사에 경제적으로 많은 후원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각승 색난의 계보는 색난(, , 1680∼1730: 조각승 활동 시기, 이하 조각승들도 활동시기 명시함) → 충옥(, , 1668∼1703), 초변(, 1680∼1706), 일기(, 1698∼1720) → 하천(, 1703∼1730), 석준(, 1706∼1727), 종혜(, 1724∼1730)로 이어진다. 색난은 고흥 능가사에 거주하였기에 조계산을 위주로 활동한 부휴문도()에 속하는 스님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색난 [色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청심사 답사시에는 진입시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길도 좁지만 내비를 맹신하지 말고 길가에 작게 표시한 이정표를 살펴야 하며,스님의 허락을 받고 인법당 참배를 해야한다.

기회가 된다면

"18세기 조각승 상정 연구" 논문 집필자인 우리카페 '흔들리는 별님'과 동행하면 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2017.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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