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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하동군

하동...묵계사 팔각원당형 부도(승탑) 부재

by 임병기(선과) 2021.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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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시천에서 민병태 선생, 이영규 선생, 그리고 이름을 잊은 모연구소의 박사와 늦은 점심 식사 후  헤어질 무렵 민선생이 묵계사에 석탑 부재가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않나요?

 

불러도 불러도

절집은 적막강산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분위기가 좋았는데, 흉흉한 세태 때문인지 지금은 불안합니다.

 

묵계사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에 실려있지만, 청학동 지역도 묵계리어서 선비들의 유산록에 지리산의 최고 경관에 위치한다는 묵계사와 제가 찾은 절집이 같은 묵계사라는 확신은 없습니다.

 

"묵계사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東國輿地志』에 지리산 묵계동에 있다고 한다.➊ 현재 하동군 청암면 묵계 리 ‘원묵계’마을 위쪽에 새로 지어진 묵계사가 있으나, 이 사찰이 원래 터에 건립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묵계사는 창건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李陸이 쓴 「遊智 異山錄」에 ‘지리산 최고 경치에 있다.’고 하였으며, 金馹孫이 쓴 「頭流紀行錄」에는 ‘묵계사가 두류산(지리산 異稱)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고 하는데, 친히 와 보니 전에 듣던 말과는 차이가 있다. 다만 사찰 건물은 밝고 아름답게 금으로 꾸민 것도 있고, 청홍색 비단을 섞어서 불상 가사도 만들었으며, 거주하는 승려가 20인 정도이다.’라고 하였다. 또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안양사 앞 냇물을 따라서 북쪽으로 가면 계곡 사이가 매우 험하고 좁은데, 40여 리 를 지나 물의 근원까지 이르면 지역이 조금 트이고 토지도 또한 비옥하며 편평하다. 절이 지리산에서 가장 훌륭 한 곳에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成汝信이 편찬한 『晉陽誌』에도 동일하게 보이므로 조선 전기까지 사찰이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➋

 

그러나 柳馨遠이 작성한 『동국여지지』에는 ‘지금은 없다.’고 하므로 사찰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폐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외에도 사찰은 조선후기 『輿地圖書』와 『梵宇攷』, 「晉州牧邑誌」(1832), 「晉陽誌」(1871), 『慶尙南道 晉州郡邑誌』(1899) 등에 기록되었고, 《東輿圖》에 표시되었다. 이 가운데 『輿地圖書』와 『梵宇攷』, 「晉州牧邑誌」에는 “今廢”라고 기록되었으나 이후 기록에는 존속 여부에 관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폐사 시점을 알 수 없다"

 

부도 부재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는 물론 소개된 글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대석(?)

하대석

중대석 굄

중대석  망실

상대석  망실

탑신석 망실

옥개석

상륜부 망실

 

제간 판단한 부재 조합입니다.

 

부도의 지대석일까요?

오랜 기간 땅속에 매몰되어 상층 부재와 암색이 다르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팔각 하대석

상부에 각호 2단 굄이 조출되었으며 돋을대를 새겼습니다.

중앙의 부재는 별석의 팔각 중대석 굄으로 추정되며, 팔각 중대석, 상대석, 원당형 탑신석은 망실되었습니다.

 

별석의 중대석 굄

 

팔각 옥개석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내림마루가 있으며, 귀꽃을 피었습니다.

상부에는 상륜부 굄을 조출하였고, 별석 상륜부 망실, 둥근 석재는 부도재가 아닙니다

 

옥개석 귀꽃

 

옥개석 하부

절수구, 양각 추녀, 깊게 팔각의 1단 층급 받침을 마련하여 망실된 탑신석이 팔각 원당형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묵계사  부도

비록 중대석. 상대석, 탑신석, 별석의 상륜부가 망실되고, 옥개석 귀꽃을 비롯 훼손되었지만 원형 추정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리산 자락에 분포한 통일 신라 하대, 고려 초에 조성된 부도를 잇는 이른 시기의 팔각 원당형 부도로 추정됩니다. 지리산 자락 부도 순례 기회가 되면 청학동과 지근 거리에 위치한 묵계사의 부도로 추정되는 부재도 동선에 포함시키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21.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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