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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하동군

하동...오대사지 부도

by 임병기(선과) 2016.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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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3일차

지난 여름에 이어 이번 답사에도 탐문에 실패한 단천마을 사리암지 부도로 인해 피로감이 극도로 밀려와 오대사지는 몇 번 망설임 끝에 찾았다. 왜냐하면 사지에 있었던 부도는 백궁선원에 옮겨져 있으며, 선원은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어 뵐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외로 거의 입구 까지 차량진입이 가능했으며, 중간중간 지리산 둘레길 순례객들을 만나 쉽게 찾았다.

 

 

오대사지

 

권적(1094-1147)이 1137년에 지은 수정사기에 오대사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지리산(智異山)에 오대(五臺)라는 허물어진 절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지리산은 우리 나라의 큰 산인데 높고 깊으며 넓고 커서 천하에 견줄 만한 것 없고 오대사는 또 산 남쪽에 있는데 그곳은 산이 솟아올랐다 내려앉았다 한 것이다섯 겹이나 되어 은은히 대(臺)를 포개어 놓은 것 같기 때문에 그 뜻으로 절 이름을 지은 것이다.

1천 봉우리가 둘러싸 옹호하며 모든 골짜기는 한 곳으로 모여들어 신선이나 성인이 꼭 그 안에 숨어 있는 듯하여 보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눈이 아찔해지고 마음이 도취된다.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일찍이 남쪽으로 다니다가 그곳에 이르러 머뭇거리며 두루 구경하고 이르기를, “여기는 큰 법이 머무를 곳이다.” 하였다 한다. 대사가 이 말을 듣고 용감히 갔으며, 가서는 희망하던 곳을 얻어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터를 딱았다.

해인사(海印寺)의 주지(住持) 승통(僧統)인 익승(翼乘)과 공배사(功倍寺)의 주지
(住持) 승록(僧錄) 영석(瑩碩)이 크게 사재를 희사하여 그 경비를 원조하였고, 종실과 승상 이하 벼슬아치와  명망있는 이들, 선원(禪錄)과 강원(講院)의 명망 높은 중으로부터 일반 신도로서 사(社)에 들어오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무려 3천 명이나 되었다. 중 담웅(曇雄)과 지웅(至雄)은 기부할 사람을 모집하고, 순현(順賢)은 직접 공인(工人)을 데리고 연장을 잡고 일을 서둘러서 모두 건물 86간을 지었다.

불당과 거처방이 깨끗이 정돈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초연(超然)히 정토(淨士)에서
사는 듯한 감상이 생기게 하였다. 좌수(座首)인 법연(法延)은 무량수불(無量壽佛)주상(鑄像) 한 분을 받들어 모시고, 승통(僧統)인 익승(翼乘)은 석탑(石塔) 한 자리를 세우고, 선사(禪師) 영성(永誠)은 인쇄한 대장경을 모시었다. 모든 생활 필수품과 공부하기에 필요한 기구가 극히 작은 것까지 다 준비되었다. 늙은 이는 편히 거처할 곳이 있고 병자는 요양할 곳이 있게 되었다. "

 

즉, 허물어진 오대사터에 수정사를 지었으며, 사찰에는 불상.석탑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탁영이 쓴 두류기행록에 의하면 불상은 인종때 주조한 철불이었다.또한 원문 "번당교라幡幢交羅", 해석문에는 "깃발이 마주보고 있었다"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미루어 당간지주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탁영 김일손.두류기행록(1489년 4월 14일 ~ 28일)

4월16일

西行十里. 涉一巨川. 乃薩川之下流也. 由川而南. 斜轉而西. 約行二十里. 皆頭流之麓也. 野闊山低. 淸川白石. 皆可樂也. 折而東向. 行澗谷. 澗水淸. 石斷斷然. 又折而北行. 九涉一澗. 又東折而行. 渡一板橋. 樹木蓊鬱. 仰不見天. 路漸高. 行六七里. 有二鴨脚樹對立. 大百圍高參天. 入門有古碣石. 額曰五臺山水陸精社記. 讀之殊覺好文. 卒業則乃高麗權學士適. 趙宋紹興年中撰也. 寺有樓觀甚偉. 間架甚多. 幡幢交羅. 有古佛. 僧言高麗仁宗所鑄. 仁宗所御鐵如意. 亦在云. 日暮雨濕. 遂止宿.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큰 시내를 건넜는데, 바로 살천(薩川, * 시천면)의 하류였다. 살천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돌아 서쪽으로 20리 가량 지났는데, 모두 두륜산의 기슭이었다. 들은 넓고 산은 나지막하였으며 맑은 시내와 하얀 돌이 모두 볼 만하였다.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향했다. 시내를 따라가는데 냇물은 맑고 돌은 자른 듯이 모나 있었다. 또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시냇물을 아홉 번이나 건넜고, 다시 동쪽으로 꺾어들어 판교(板橋)를 건넜다. 수목이 빽빽이 들어차서 하늘이 보이질 않았다. 길은 점점 높아졌다. 6, 7리를 가니 압각수(鴨脚樹) 두 그루가 마주보고 서 있었다. 크기는 백 아람이나 되고, 높이는 하늘에 닿을 듯하였다.  

 

문에 들어서니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그 머리에 오대산수륙정사기(五臺山水陸精社記)라고 씌어 있었다. 읽으면서 좋은 글임을 새삼 깨달았다. 다 읽어보니 고려 때 학사(學士) 권적(權適)이 송나라 소흥(紹興) 연간에 지은 것이었다. 절의 누각은 아주 장대하고 방이 매우 많았으며, 깃발은 마주보고 있었다. 오래된 불상이 있었는데,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 불상은 고려 인종이 주조한 것입니다. 인종이 쓰던 쇠로 만든 여의(如意, 법회나 설법 때 법사가 손에 드는 물건)도 남아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날은 저물고 비도 내려 절에서 묵기로 했다

 

 

(전)오대사지 부도

 

대좌는 결실되었고

탑신과 보주가 하나의 부재이다.

탑신 하부에 위치한 당호는 훼손되어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었다.

 

 

남명 선생은 오대사 스님과 교류를 한 듯 하다.

 

증오대사승贈五臺寺僧

산아래 외로운 마을 풀 덮인 문에 
날이 막 어두워질 때 중이 찾아왔구나
시름 겨운 마음 이야기하고 나서 잠못 이루는데
달빛은 앞 시내에 가득하고 밤은 이슥했도다

 

 

 

 

절집은 사라지고, 선인들의 자취는 찾을 수 없더라도

우리는

이 길을 가야한다.

 

먼 훗날을 위해서...

 

 

201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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