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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고창군

고창...대원군척화비

by 임병기(선과) 2017.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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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모기관에 논문 응모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척화비에 대한 조사 연구"라는 주제의 글이었다.

처음부터 채택의 욕심보다는 아직 확실한 자료가 없는 척화비 현황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땡이었다.

 

어느 누구가 그러더군

 

-무슨 논문에 앞선 연구자의 글이 없나요?

(연구한 사람이 있었는가?)

-인용과 각주를 활용하지 않앗다.

(내가 발로 뛰어 쓴 글인데...)

-맺음말을 그렇게 길게 엉뚱하게 결하는 논문이 어디 있나요?

(서론과 비슷하게 간단하게 맺어야 한다고 했다)

 

좌우당간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 흥미로웠던 척화비의 하나가 고창 척화비었으며, 우리나라의 모든 척화비 관련 글(교과서 포함)을 수정해야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전면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계아만년자손 (戒我萬年子孫) 우리들 후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작 신미립 (丙寅作 辛未立)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그런데 뒷면을 보자.

 

 

상지9년임신오월 일 행현감이동석 봉교 립(上之九年壬申五月 日行縣監李東奭 奉敎 立) 명문이 새겨져 있다. 1871년에 내려진 교서를 받들어 다음해인 상지9년上之九年(고종 즉위 9년) 임신년(1872) 5월 현감 이동석이 척화비를 세웠다는 내용으로 건립시기와 주체가 새겨진 척화비이다.  

 

지금까지 모든 척화비가 1871년 신미(辛未)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고창척화비 후면에서 1872년 임신(壬申)년에 세웠다는 명문이 확인되어 모든 척화비가 전국에 일제히 1871년에 세워졌다는 것은 오류이다.

 

 

척화비 바로 옆 안내문에도 1871년으로 설명하고 있다.

어디부터 잘못 된 것일까?

 

 

 

우리나라의 척화비에 관한 글을 옛님 서재에 올려두겠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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