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고성군

고성...금강산 화암사

임병기(선과) 2017. 8. 24.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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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화암사

금강산. 이름만으로도 가슴 설레인다.

현대아산에서 개발한 금강산 관광 원년에 배편으로 다녀온 금강산을 다시 등정할 기회가 올까?

 

 

일주문에 편액은 화암사 禾巖寺

그이전에 새겼을  바위의 각자는 화엄사 華嚴寺

 

홈페이지에 그 연유를 밝히고 있다.

옛날 신라의 승려 진표율사(眞表律師)께서 친히 스스로 창건하시어 화엄(華嚴)이라 편액 하셨다. 화엄이라 한 것은 율사 당시에 법회청중(法會聽衆)과 더불어 화엄대교(華嚴大敎)를 강론하여 인천(人天)의 여체(餘滯)를 씻어내셨다. 그러므로 인하여 제액(題額)하셨으니 속세에서는 화암(禾岩)이라 칭하였다.

 

화암(禾岩)이라고 한 것은 남쪽에 한 덩이의 바위가 있는데 크기가 만곡(萬斛)의 이슬이 쌓이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명실(名實)의 객[賓]이요, 실명(實名)의 주(主)라는 것이니, 이름은 실제가 아닌 이름이 없고, 객[賓]은 주(主)가 아닌 객이 없으며, 객을 없애고 주를 쫓는 것이니 화엄(華嚴)으로써 방을 붙였다. "

 

 

부도전

근대에 봉안된 부도와 조선후기 부도를 모셨다.

 

 

화암사

"금강산 팔만구암자의 첫번째로 꼽히는화암사는 신라혜공왕 5년(769년) 진표율사가 창건하였다. 구후이 사적은 전하지 않으며 인조 11년(1633) 택당 이식(1584~1647)선생이 간성군수로 있을 때 썼다는 간성지 화암사조에 의하면, 「천후산 미시파령(天吼山 彌時坡嶺=미시령) 밑에 화암(禾岩)이란 바위가 바른편에 있기 때문에 절 이름을 화암사라 했다. 이절은 산허리에 위치하고 있어 가까이는 영랑호, 멀리는 창해에 임해있고 양양, 간성의 모든 산과 평원심곡이 눈 아래 보이고 넓고 아름다운 경치는 절이 토해 놓은 것 같다. 절 뒤에는 반석과 폭포가 특수한 모양을 하고 있어 가히 볼만하다.

 

1622년(광해군 14)에 절이 불에 타버렸으며,  옛날에는 크고 우아한 문루가 있었는데 망가졌다. 문루에서 바라보는 창해에서 해 뜨는 모습은 강호를 찾는데 있어 이곳보다 나은 곳이 없건만 옛사람들을 찾아와 놀아보지 못했으며 지방사람들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고 또 관동지방에는 이름난 곳이 많아 과객들이 이곳까지 올 겨를이 없었으므로 절 이름이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간성군 남쪽 70리되는 곳에 있는 산으로서 석굴이 많고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나온다 하여 천후산이라 부른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양양과 간성 사이에 큰 바람이 많은 것도 이 까닭이라 한다. 뛰어난 성인대가 있는데 돌모양이 불상과 흡사해서 성인대라 하였다. 그 옆에 또 큰 바위가 있는데 마치 곡식을 쌓아둔 둥근 곳집같이 보인다하여 세속에서 화암(禾岩)이라 부른다.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서 적과 싸울 때 짚으로 만든 거적으로 이 바위를 둘러싸서 마치 벼가리 같이 보이게 하여 적을 물리쳤다 하여 화암(禾岩)이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화암사는 창건 이래 고종 원년까지 1096년간 화재가 5번이나 났는데 이것은 화암이란 이름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는 불을 의미하는 것이니 화자를 쓰지 않도록 하고 화자 대신 수자로 쓰자는 것이다.

 

풍수음양오행설에 의하면 수극화(水克火)로 물은 불을 이긴다 하여 물 수(水)자를 써야겠는데 수(水)자를 쓰자 하니 절 이름에 대한 역사적 의의가 없어진다 해서 수(水)대신 수(穗)자를 쓰면 음(音)은 수(水)와 같고 뜻은 화(禾)와 같으니 수암(穗岩)이라 했으나 또 화재가 생겨 1912년에 화암(禾岩)으로 다시 고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항간에서는 이 바위를 ‘수바위(穗岩)’로 부르게 되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수(穗)자는 좀 어려운 한자여서 아는 사람이 적고 바위 경치가 아름답다 해서 수바위(秀岩)라고 세속에서 쓰기도 한다.

 

1911년 건봉사의 말사가 되었고, 1915년 소실, 6.25 전쟁으로 폐허, 1986년 중창되는 등 화재와 중건을 거듭하다 1991년 세계잼버리대회때 불교국가 천 여 명이 대웅전에서 수계를 받아 유명해졌다. 동쪽으로는 발연사가 있고, 서쪽에는 장안사, 남쪽에는 화암사가 있어 금강산에 불국토를 이루려는 진표율사의 뜻이 담겨 있는 사찰이다.

 

화암사는 오랜 세월 동안 흙속에 묻힌 옥돌처럼 빛을 보지 못하다가 근래에 이르러 웅산 주지스님의 원력으로 많은 불사가 이루어져 새로 재건 단장되어 많은 불자들과 탐방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최북단 금강산 남쪽 첫 관문인 사찰로서, 2011년 4월 5일(음력 3월 3일 삼짇날)부터 온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한 야외 미륵대불 조성과 해맞이 공원조성 불사 1000일기도정진을 회향,  2014년 10월 25일 야외미륵부처님 점안법회를 봉행하였고, 현재 미륵원불(소원불) 1080불 조성불사 모연 중에 있다. 전국 불자들의 수희 동참과 함께 미륵부처님의 나투심으로 하루속히 통일이 이루어지고 이 나라가 미륵부처님의 무량한 가피와 복덕으로 불국 안락정토가 구현(具顯)되기를 간절히 발원하고 있다."...화암사 홈페이지

 

 

범종루

 

 

문루.

멀리 양양(?) 바닷가가 조망된다.

 

 

수바위

왕관모양으로 우람하게 자리한 이 수바위는 화암사 창건자인 진표율사를 비롯한 역대스님들이 수도장으로 사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바위 윗면에는 웅덩이가 있으며 물이 항상 고여 있어 가뭄을 당하면 웅덩이 물을 떠서 주위에 뿌리고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왔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수바위 이름의 '수'자를 수(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바위의 생김이 뛰어나 빼어날 수(秀)자로 보는 사람이 많다. .

 

 

수바위 전설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은 시주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화암에서 수도를 하던 두 스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조그만 구멍이 있으니 끼니때마다 지팡이로 세 번 흔들라고 했다. 잠에서 깨어난 스님들은 아침 일찍 수바위로 달려가 노인이 시킨 대로 했더니  두 사람분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 후 두 스님은 식량 걱정 없이 편안히 불도에 정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몇 년 후 한 객승이 찾아와 화암사 스님들은 시주를 받지 않고도 수바위에서 나오는 쌀로 걱정 없이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객승은 세 번 흔들어서 두 사람분의 쌀이 나온다면 여섯 번 흔들면 네 사람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다음날  수바위로 달려가 지팡이를 넣고 여섯 번 흔들었다. 객승의 욕심에 산신이 노하여 쌀이 나와야 할 구멍에서는 엉뚱하게도 피가 나왔고 그 후부터는 수바위에서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구전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수바위를 보고 왜군들이 볏짚으로 위장한 수바위에 놀라 군량미를 쌓아둔 것으로 착각하여 겁을 먹고 도망갔다고 한다.

 

 

근자에 봉안된 미륵대불은 친견치 아니하고 답사의 주목적인 부도전으로 향했다.

돌아와서 보니 당호가 새겨진 부도가 대부분이었으나 아쉽게도 현장에서 육안으로 구분 할 수 없었다.

 

 

당호를 새기지 않은 부도

방형지대석,하대석은 결실, 팔각원당형 중대석,연화문이 조식된 상대석, 원구형 탑신석,사모지붕형 옥개석,보주

특이하게도 상대석에 앙련과 복련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암질이 서로 다르며, 동일 부도재 여부도 불투명하다.


고성문화원 홈페이지에는 삼성각 근처(1995년 현재)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어 옮겨온 부도 같다.

(홈페이지에는 사진이 없으나 실린 내용을 토대로 부도전 사진을 역추적하였다)

 

 

기단부

상대석에 앙련과복련을 함께 표현한 유일한 작례?

 

 

옥개석와 상륜

 

 

 

당호를 새기지 않은 부도.

지대석은 본래 부재가 아니며 탑신과 보주를 일석으로 조성 하였다.

탑신 상부에 연화문을 새겼으며, 보주 하단, 보주 하단과 탑신 상부 화문 사이에도 복련이 표현되어 있다.


고성문화원 홈 자료(1995년)에는 삼성각 옆 부도로 표기 되어 있어 옮겨온 부도임을 알 수 있다.

(홈페이지에는 사진이 없으나 실린 내용을 토대로 부도전 사진을 역추적 하였다)

 

 

연화문과 보주

 

 

당호를 확인하지 못한 부도.

방형 지대석, 기단, 탑신,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대석 상면에 부등변 팔각 받침을 조출하였고, 팔각 기단 상면에는 복련이 조식되어 있다.

탑신은 원구형이며, 옥개석은 사모지붕 형태로 합각선이 두툼하여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이다.

 

 

당호를 새기지 않은 부도

방형 지대석 상면에  2단의 8각형 괴임을 조출하였다.

굄대의 상부에  2단의 팔각 하대석을 올리고, 상면에는 복련이 조식되어 있다.

팔각 중대석,상대석은 결실. 고복형 탑신, 옥개석, 상륜은 결실되었다.. 

 

상대석은 결실되었을까?

전체적으로 모호한 부재의 조합이다.

 

 

 

 

 

 

 

청암당(淸岩堂)부도

방형 지대석, 탑신과 보주가 일석으로 보주하부에 연주문을 둘렀다.

 

 

원봉당(圓峯堂)부도

방형 지대석, 탑신과 보주가 일석이다.

 

 

영담당(影潭堂) 부도

방형 지대석 상부에 음각선을 돌리고 삼각형의 화문을 조식하였다.

상무에 연화문을 두르고 보주를는 일석이다.

 

 

 

인봉당(印峯堂)부도

방형의 지대석, 탑신과 일석으로 조성된 보주가 있는데, 상면에 12엽의 삼각형 화문이 조식되어 있다.

 

 

당호를 새기지 않은 부도.

방형 지대석 상면에는 복련이 음각되어 있고, 앙련이 조식된 상대석,탑신 상부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별석으로 조성된 상륜부는 결실되었다.

 

 

월송당(月松堂) 부도

지대석, 대좌, 탑신석, 옥개석, 상륜을 놓았다.

원형 하대석의 하단에는  복련, 상면에는 앙련이 선각되어 있다. 

석종형 탑신,팔각 옥개석과 보주는 일석으로 조성되었다.

옥개석 낙수면 기울기가 급하며, 상부에 연화문을 조식하고 2단 괴임 위에 보주를 올렸다.

 

 

당호를 새기지 않은 부도.

방형 지대석 상면에는 2단으의 원형 받침을 조출하였고, 하단에는  복련이 조식되어 있으며, 상단에는 다시 1단의 낮은 받침을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상륜은 결실되었다..

 

 

당호를 확인하지 못한 부도

탑신과 보주가 일석인 종형 부도이다.

 

 

당호를 확인하지 못한 부도

방형지대석과, 대석이 일석이며, 종형 탑신과 보주는 일석이다.

 

 

화곡당(華谷堂)부도

둔중한 지대석, 종형 탑신과 보주는 일석이다.

 

 

춘담당(春潭堂) 비 ?

 

 

춘담대법사탑春潭大法師塔

방형 지대석위에 1단 괴임을 조출하고 탑신을 올렸다.

탑신 상부에 여의문(고사리문?)을 선각으로 조식하고 원형 괴임위에 보주를 일석으로 올렸다.

 

 

 

 

 

여유

여유가 없는 동선,

오랜시간 머물며 당호를 일일이 확인했으면 좋았을텐데...

 

2017.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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