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고성군

고성...금강산 건봉사

임병기(선과) 2010. 10. 11.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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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잠들기 전에 급거 동선에 포함시켜 전혀 계획에 없었던 답사이었다. 일천한 상식으로 들린 건봉사 이어서 주마간산식의 답사에 그쳐 아쉬움이 남는다. 건봉사를 제외한 고성의 우리 옛님들도 사전 정보가 없어 건너 뛰어야 했다. 건봉사 들머리의 부도전은 남쪽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규모로 사격을 보여주고 있다.

 

 

 

건봉사 일주문에서 약500m 정도 올라가면 길가 옆에 부도밭이 있다. 50기가 넘는 부도와 비 12기 정도가 안치되어 있다. 중앙에는 건봉사의 역사를 기록한 사적비 1기와 만일회연기(萬日會緣起)를 밝힌 비 2기, 고승의 생애 및 기념할 만한 사실을 적어 놓은 비8기, 군수의 선공비(善功碑) 2기가 있다. 이들 중 건봉사사적기는 높이 4.95m에 1906년에 건립한 것으로, 용두형의 귀부 위에 낮은 비좌를 새기고 그 속에 비신(碑身)을 꼽아 세웠다.

 

비신 위에 둔 역사다리꼴 이수의 네모곽 앞뒤면에는 쌍룡이 구름 속에서 노니는 모습을 화려하게 조각하였고 좌우면에는 정면에서 본 용의 얼굴을 새겨 놓았는데, 머리. 눈썹. 수염의 처리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수의 꼭대기의 앙화(仰花) 위에 꽃잎 모양의 보주(寶珠)를 놓고 보주 중앙에 범자 '옴'을 새겨 놓았다. 이와같은 이수는 어느 곳을 가 보아도 찾아 보기 힘든 특이한 형태이다. 그리고 사적기 보다 170년 일찍 만들어진 운파스님의 비는 1730년(영조6)에 건립 되었으며, 높이는 4.13m에 이른다. 귀부의 머리부분이 유난히 크다는 것과 보주에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또한 송암대사비는 의천스님의 생애를 기록한 것으로 1771년(영조47)에 건립하였다.

 

거칠게 다듬은 비대석 위에 오석(烏石)의 비신을 놓고, 비신을 덮는 연꽃 모양의 옥개석을 올려 놓았는데, 옥개석 중앙에 '옴차림'이라는 호신진언(護身眞言)을 범자로 새겨 놓았다. 그리고 만일회동시생사리탑(萬日會同時生舍利塔)은 1851년(철종5)에 개설한 만일회에 참여했던 승려 10여 분이 1854년부터 1856년까지 3년 동안 살아 있는 몸에서 치주(齒珠). 안주(眼珠) 등의 사리 26매(枚)를 내어 놓은 이적을 함께 모아 부도에 모신 것이다 만일회에 참여했던 재가신도들 중에서도 생사리를 얻은 사람들도 많았다그중 처사 김계화와 법해당 최씨의 생사리탑이 서쪽 부도군 속에 각각 위치해 있다

 

 

아침 이른 시간 문 닫힌 사명당의 승병 기념관이다. 기념관이 건봉사에 조성한 까닭은 무엇일까? 임진왜란 시에 사명당이 이곳에서  승병을 모집하여 금강산일대를 평정하고, 평양성전투에 까지 참여한 호국사찰임을 알리는 것 같다. 만해 한용운도 백담사에서 머물던 일제강점기에 민족학교인 건봉사 봉명학교에서 강연을 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승병기념관 옆에는 만해의 시 "사랑하는 까닭" 시비가 있다. 

 

사랑하는 까닭...만해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白髮)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 하는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美笑)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健康)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주검도 사랑 하는 까닭입니다.

 

 

不二 진리는 하나이다. 어떤 자료에는 1920년대 조성 시기를 고려해보면 내선 일체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한다.(실제로 우리 눈에 익지 않은 석조기둥이며 금강저도 처음 접한다). 하지만 건봉사의 지리적 여건을 감안하여 차라리 남북은 하나라고 한민족이라고 해석하고 싶다면 건방일까?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된 건봉사 절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불이문은 해탈문이라고도 하는데 불교에서는 번뇌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는 문이다. 건봉사터에 남아 있는 불이문은 1920년에 세운 것이다.

불이문은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얹었다. 각각의 기둥에는 금강저 문양을 새겨 놓았으며 앞면 처마 밑에는 ‘불이문(不二門)’현판이 걸려 있다.

 

 

석주의 금강저. 원래는 제석(帝釋)의 전광(電光:번개)에 붙였던 이름이었으나 점차 여러 신들이나 역사(力士)가 지니는 무기를 가리키게 되었다. 불교로 수용되면서 금강저는 그 단단함 때문에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고, 불교의식에서는 마음의 번뇌를 없애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뒤에 밀교에서는 금강령(金剛鈴)과 한 짝이 되어 의식법구로서 사용되기도 했다. 형태는 손잡이의 양쪽 끝에 뾰족한 창[杵]과 같은 것을 붙였으며 창의 수에 따라 독고저(獨杵)·3고저(三杵)·5고저(五杵)·9고저(九杵)로 나누어진다.

 

또한 형태가 특이한 것으로 탑저(塔杵)·보주저(寶珠杵)·구두용저(九頭龍杵)도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금강저는 3고저와 5고저가 가장 많으며 대부분 국립중앙박물관과 각 지방의 사원에 전해지고 있다. 경주 석굴암 원형실(圓形室)의 제석천이 들고 있는 5고저는 현존하는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의 중요한 금강저의 예이다. 그밖에 악마를 항복시켜 사악한 것을 몰아낸다는 벽사(邪)의 의미에서 만다라(曼茶羅)나 사경화(寫經畵) 등 불화의 테두리에 금강저 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길상 문양으로서 일반 금속이나 목공예품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해강 김규진의 글씨. 우리님들에게도 이제 익숙한 해강이다. 글씨를 쓸 붓이 없어 칡넝쿨의 섬유질로 묶어서 썼다고 한다.

 

 

한국전쟁 중에 불이문을 지켜주었다는 수령 500년의 팽나무로 고성군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였다.

 

 

능파교를 건너기전 출입 동선으로 축대가 보이는 지역은 폐허가 된 극락전 구역이다

 

 

틀림없는 솟대 모습이다. 산신각처럼 민간신앙이 사찰에 습합된 사례로 사찰 번영과 보호를 상징하며 정상의 오리는 저승을 오가는 메신저 뿐만 아니라 화기를 비보하는 물을 상징한 것으로 여겨진다. 불기2955년은 북방불기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적용중인 남방불기 2554년과는 차이가 있다.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답사매니아들은 쉽게 북방불기에서 1027(기원전 1027년은 부처님 탄생 년도이다)년을 빼면 서기가 된다. 그래서 건봉사 석주는 2955-1027=1928년에 조성된 것이며 석주에는 나무아미타불, 대방광불화엄경 글자가 한글로 새겨져 있다.

 

 

 

 범종각

 

 1920년대 전경

 

520년(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758년에 발진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스님등과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됩니다. 여기에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습니다. 787년에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서 극락에 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아미타 도량이 되었습니다. 고려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서봉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1358년에는 나옹스님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여 비로소 염불과 선, 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이 되었습니다.

1465년에는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 한명회, 신숙주, 조흥수, 등을 파견하여 노비, 미역밭과 염전을 하사하고 사방 십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이었으며, 1605년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약탈하여 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습니다.

1802년에는 용허 석민스님이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51년에는 벽오 유총스님이 제3회 염불만일회를 열었고, 1878년 4월 3일에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다음 해에 대웅전, 어실각, 사성전, 명부전, 범종각, 향로전, 보안원, 낙서암, 백화암, 청련암을 중건하였습니다.

1881년에는 만화 관준스님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치하였고, 1906년에는 신학문과 민족교육의 산실인 봉명학교도 설립하였습니다. 1908년 제4회 만일회를 회향한 뒤 금암 의훈스님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설하고 옛부터 있던 돌무더기의 소신대에 31인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1921년 인천포교당과 봉림학교를 세웠으며, 한암스님을 청하여 무차선회를 여는 등 우리나라 4대 사찰의 하나요 31본산의 하나로서 명망을 떨쳤던 곳입니다.

한국전쟁 때 완전히 폐허화 되었으나 중창불사를 통해 사격을 다져가고 있습니다.

 

 

낯선 모습의 돌기둥 2개와 양분된 2개의 방형 연못 의미가 뭘까? 여러자료를 검색했지만 심지어 건봉사 홈페이지에도 언급은 없었다. 진실 여부는 차치하고 유일하게 검색된 자료를  올리니 판단은 우리님들의 몫으로 남겨야겠다.

 

일제는 이렇게 일(日)자형으로 두 개의 연못을 조성하고 돌기둥을 세웠다 한다. 상징성은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석주에 새겨진 "용사활지(龍蛇活地) ,방생장계(放生場界)". 용과 뱀무리는 일본과 조선을 뜻하므로 이는 조선총독부에서 내선일체의 목적으로 1920년대에 조성했다고 한다. 진실여부 보다 왠지 수긍이 가는 까닭을 모르겠다.

 

 

 그런 그런 문양들이다. 글을 올리고 싶지 않다

 

 

용사활지 

  

 

 

소실된 극락전 영역의 독성각

 

 

극락전 영역 산신각.

 

 

축대

 

 

소실된 건봉사지, 멀리 나무뒤로 적멸보궁이 보인다.

 

출처...다음카페/수국사 거사림회

 

극락전 영역의 최상단에 위치한 건봉사 적멸보궁. 임진왜란 때 왜군이 약탈해 간 부처님 진신사리를 사명당 선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되찾아 와서 건봉사에 모셨다.

 

출처...다음카페/수국사 거사림회

 

진신사리탑

 

 능파교

 

고성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조금 더 높다.

조선 숙종 34년(1708)에 건립된 경내 불이문 옆의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에 의하면 이 다리가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1745)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山映樓)를 고쳐 쌓는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홍예의 축조는 양쪽 다리의 바닥부분에 두툼한 2단의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29개의 홍예석을 올려 놓았는데 상부 중심의 홍예 종석을 제외하면 좌우로 각기 14개의 홍예돌을 배열하였으며 밑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돌의 규격이 작다. 홍예돌은 통돌로 하지 않고 길이 3m에 2개의 석재를 이어서 사용하였는데, 일부 석재는 2.65m의 긴 석재도 있다.

홍예 좌우 교각의 면석은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10∼11층으로 쌓아 마감하였으며, 홍예석 외면과는 홍예의 원호에 맞추어 끼웠다. 다리의 상부는 홍예 중앙의 종석 위에 덧댄 장대석 없이 바로 상부바닥 구조인 경계선(난간석)이 올려졌다. 다리 상부의 경계석은 면석보다 10㎝ 가량 내밀어 설치되어, 홍예의 폭(3m)보다 20㎝ 가 더 크다. 경계석에 사용된 석재는 폭 40㎝, 높이 21㎝이며, 길이는 100∼320㎝로 일정하지 않다.

능파교의 날개벽은 남쪽(극락전쪽)이 장대석으로 견고하게 축조되어 있고 북쪽은 호형(弧形)을 이루고 있다. 암석 종류는 남쪽 하단에서부터 8개, 북측 하단에서부터 8개가 조립질 석영섬록암이고, 나머지 홍예석 전체는 우백질 흑운모화강암(조립질)이다. 고성 건봉사능파교는 단칸 홍예교로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비석을 구비하고 있어 홍예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1920년대 사진

 

위의 전각들은 사진 좌측 지역이다. 능파교 건너서 아래사진들은 우측 대웅전 영역에 위치한다.

 

 

 능파교 건너 댕웅전 영역

 

 

돌거북은 알고 있을까?

 

 

대웅전 영역에서 처음 만나는 10바라밀 석주. 본디의 의미만 알아보자. 자료는 다음에서 검색했다.십바라밀이란 정각(正覺)을 얻기 위한 열 가지 수행법을 말하는 것으로, 십바라밀을 정진수행하면 생사의 미해(迷海)에서 벗어나 열반의 언덕에 이를 수 있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대방광불화엄경〉 80권 본의 명법품(明法品) 내용을 보면, 정진혜보살의 물음을 받고 법혜보살이 방일하지 않는 열 가지 행법과 그 행법으로부터 이루는 열 가지 청정한 법을 말하고 있는데, 그 열 가지 행법이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방편.원(願).역(力).지(智) 등의 십바라밀이다.

 

십바라밀 정진도형의 내용은 1935년에 편찬된 〈석문의범(釋門儀範)〉의 정진도설(精進圖說) 조(條)에 해인도(海印圖)와 함께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해인도라는 것은 일명 법성도(法性圖)라고도 하는 것으로, 신라 무열왕 때에 의상조사가 당나라에 가서 지엄화상 밑에서 화엄경을 공부할 때, 스승이 원(圓)과 방형(方形)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72개의 법계상(法界相)을 그려 문도들에게 제시하자 의상조사가 72개의 뜻을 다시 요약한 게송을 일정한 도형 속에 채워 쓴 것을 말한다. 해인도는 인도(印道 : 글자가 연속적으로 쓰인 길)가 직각으로 꺾인 인각(印角)을 54개 가진 미로(迷路)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인도를 따라 30개 구(句). 총 210글자가 시작과 끝이 이어져 끊임없이 반복되도록 되어 있다.

 

이 해인도와 병행하여 십바라밀 정진도형이 도설(圖說)되어 있는데, 그 모양을 들여다보면 바라밀 석주의 것과 똑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바라밀 석주에서는 금강저의 모양이 제 모습 그대로 표현되어 있으나 정진도형에서는 ‘H’자 모양으로 간단하게 그려져 있고, 또한 가위가 네 잎을 가진 꽃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처럼 모양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의미까지 다른 것은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석주의 경우는 상징형의 실재 모양을 사실적 수법으로 그렸고, 도설의 경우는 탑돌이 할 때의 동선(動線)을 중심으로 그렸다는 점이 다르다.  

 

원(圓)은 보름달을 나타낸 것으로 보시바라밀을 상징한다. 재(財).법(法).무외(無畏)의 3종 보시로써 중생심을 따라 모두 만족케 하는 것이 마치 청정 허공에 광명월륜(光明月輪)이 치우침이 없이 원조(圓照)함과 같으므로 보시바라밀을 보름달에 비유한 것이다. 달의 이와 같은 상징적 의미와 관련된 것으로 수월보살, 만월보살 등 관음보살의 화현들이 있고, 같은 뜻을 표현한 말로 ‘월인천강(月印千江)’이 잘 알려져 있다.

 

신발[鞋經]은 인욕바라밀을 상징한다. 밖에서 들어오는 치욕을 견디어 참으면서 안으로 법성을 밝히는 것이 마치 신이 밖으로부터 찔리는 것을 방어하여 발을 안전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신발에 비유한 것이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모습의 구름은 선정바라밀을 상징한다. 마음을 깊은 한 곳에 모아서 일체의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이 마치 많은 구름이 드리워 대지의 열염(熱炎)을 식혀, 맑고 서늘하게 함과 같음으로 구름에 비유한 것이다.

 

작은 두 개의 원을 수평으로 둔 것은 두 개의 샘(泉)을 나타낸 것인데, 방편바라밀을 상징한다. 방편으로 중생을 성숙케 하여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 하는 것이 마치 근원이 하나인 샘을 두 개의 샘으로 나누어 동서(東西)에 두루 편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좌우쌍정(左右雙井)에 비유한 것이다.

 

두개의 동심원과 그 내부의 작은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이 도형은 집과 그것을 둘러싼 견고한 담을 나타낸 것으로 역(力)바라밀을 상징한다. 일체의 불국토에 정력(正力)으로 들어가 정등정각을 이루는 것이 마치 집과 담을 수리. 축성하여 밤낮으로 순시하여 외침을 막는 것과 같으므로 탁환이주(卓環二周)에 비유한 것이다.

 

 

 

 반원은 반달 또는 상현달을 나타낸 것으로 지계바라밀을 상징한다. 옳지 못한 일과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면서 정계(淨戒)를 점차 이루어 나가는 것이 마치 상현달이 어둠을 물리치고 밝음을 살아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지계바라밀을 상현달에 비유한 것이다.

 

 가위(剪刀)는 정진바라밀을 상징한다. 한 곳에 마음을 쏟아 수행하는 도중에 마음을 딴 데로 옮기지 않는 것이 마치 가위로써 물건을 자름에 유진무퇴(有進無退)함과 같으므로 가위에 비유한 것이다.

 

금강저는 지혜바라밀을 상징한다. 지혜의 공장(工匠)으로써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의 산을 뚫고 부수어 번뇌의 광맥을 발견하고 깨달음의 불로써 단련하여 자기 불성의 금보(金寶)를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 마치 금강저의 견고함과 날카로움과 밝음이 구족하여 앞으로 나아감에 장애가 없는 것과 같으므로 금강저에 비유한 것이다.

 

작은 두 개의 원을 아래위로 둔 것은 앞과 뒤의 샘을 나타낸 것으로 원(願)바라밀을 상징한다. 일체의 불찰(佛刹)과 일체 중생의 바다에 큰 서원(誓願)을 가지고 편입하여 보살행을 닦는 것이 마치 앞과 뒤의 두 개의 샘에서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음료를 각기 얻는 것과 같으므로 전후쌍정(前後雙井)에 비유한 것이다.

 

큰 원 안에 세 개의 작은 원을 그린 것은 달 속에 별이 들어 있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지(智)바라밀을 상징한다. 삼세의 일체법을 여래의 지혜로 두루 깨우치되, 가로막는 것도 없고 거리낌도 없는 것이 마치 달이 별 무리들 속에 있으면서도 멀고 가까운 곳을 다 비치는 것과 같으므로 성중원월(星中圓月)에 비유한 것이다.

 

 

금강산 건봉사? 금강산은 분명 북한지역에 있건만 왜일까? 우리선조들은 큰 산맥에 딸려 있는 봉우리를 총칭하여 산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따라서 건봉사가 위치한 건봉산도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의 최남단 향로봉의 남향에 자리하고 있어 금강산 건봉사로 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삼존불 위 보궁형 닫집

 삼존불

 

아무생각 없이 들렸던 건봉사. 많은 숙제를 안고 돌아왔습니다. 일천한 지식이 부끄럽기도 하고, 지금까지 겁없이 글을 올렸구나라는 후회감도 전신을 휘감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테고, 내가 경험한  시행착오와 전철을 다른 사람은 밟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래도 계속 할렵니다.  

2010.08.03 

 

 

 

 

자료는 문화재청,건봉사홈, 다음/검색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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