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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양양군

양양...오위장 정원기 철비

by 임병기(선과) 2017.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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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비각.

양양읍 조산리 485번지. 도로변 흥부네밥상 식당 향우측 뒤편에 위치한다.

 

 

보호각 앞

1972년 증손 정주화님이 세운 석비가 눈에 들어 온다.

가선대부 중추부사 겸 오위장 정원기불망비嘉善大夫 中樞府事 兼 五衛將鄭元基不忘碑

 

 

가선대부 오위장 정원기불망비嘉善大夫 五衛將鄭元基不忘碑

 

양양문화원 자료에는 철비 조성 내력을 디테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정원기(鄭元基)(1801~1863)

관향은 연일이며 자는 여경(汝經)이다. 강현면 석교리에서 생활하였으며 시문에 남달리 재능이 있고 풍류를 즐기었다. 철종 10년 기미 10월(1859년) 설악산 동쪽 동해안 일대에 불의의 대화재가 발생하여 양양부(襄陽府)에 551호. 통천군(通川郡) 472호, 간성군(杆城郡) 486호가 전소하니 수천 명의 이재민이 집을 잃고 거리에서 혹한에 떨고 있을 때 아들 우용(禹鎔)진사와 상의 곡식 천석과 거금 천량을 내놓아 불쌍한 이재민을 구휼하였다.  

 

이에 이재민들은 용기를 내어 농경을 시작했고 은혜를 입은 주민들이 이 사실을 조정에 상소하니 철종께서 ‘많은 재물을 거듭 베풀어 백성을 구휼하고 화재로 인한 나라의 재난을 극복하게 한 공로를 가상히 여겨 가선대부중추부사겸오위장(嘉善大夫中樞府事兼五衛將)의 관직을 특수(特授)하고 철종 11년 경신 12월(1860년)에 가선대부오위장정원기불망비(嘉善大夫五衛將鄭元基不忘碑)라 양각(陽刻) 주조(鑄造)한 철비(鐵碑)를 하사(下賜)하니’ 주민이 자진 동원하여 강현면 석교리에 비각을 건립하고 철비를 설치하여 기려왔다.

 

세월따라 비각도 낡아 허물어지니, 1972년 8월 1일 공의 증손 정주화(鄭周和)가 양양읍 조산리 마을 안 아늑한 곳에 비각을 새로 짓고 공의 불망비(철비)를 옮겨 설치하였다. 공의 부인은 정부인안성이씨(貞夫人安城李氏)다. 당시 강원감사(江原監司) 김시연(金始淵)의 상소에 의하여 위유사(慰諭使)로 이천부사(伊川府使) 남종순(南鍾順)을 임명하니 얼른 달려와서 이재민을 어루만져 위로했다

 

 

재시천화 再施千貨

창의구재 倡義 邱灾 

 

창생송혜 蒼生誦惠

동정포공 彤庭 褒功

 

2번에 걸쳐 재물을 베풀어.

재난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앞장섰다.

 

이에 주민들이 은혜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여

조정에서 포상을 내렸다.

 

* 한자 풀이는 개인적인 해석 입니다.

 

 

뒷면에는 조성시기가 양각되어 있으나 보호각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함풍 십년 경신 십이월 일 수 咸豊 十年 庚申 十二月 日 竪,1860년 12월에 세움.

 

 

비신 상부

사진에는 잡히지 않았지만 배가 그려져 있다.

자못 상징성이 궁금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글이 있다.

즉 2005년 대화재 시에 비각 뒤에서 불이 진화되었다는 내용으로 현재 비각 자리는  비보 느낌이 강하게 든다.

 

2005년 낙산사 동종이 녹아내렸던 양양 대화재 후 고경재 양양문화원장이 강원일보에 기고(2005년 4월 14일)한 글이다.

 

(상략)

"정원기 선생의 공덕비각은 조산초등학교 앞 7번 국도변 서쪽 딴봉(外峯) 동쪽 화살맥(火殺脈)이 밑에 자리하여 우리 고장 산불예방의 역사적 교훈을 일깨워 주는 표상이 되고 있다. 이번 화마도 135년전 정원기 정우용 부자의 이재민 구제에 곡식과 거금을 출연한 공덕을 하늘도 아는지 거세게 타오르던 불길은 비각 뒤에 맞닿아 있는 대밭에서 멈추고 말았다. (중략)

 

襄江之風과 火災의 史書 기록

1666년(현종7) 3월18일 돌풍이 불어 큰 불이 나서 삼척 민가 250호, 강릉 민가 127호, 양양민가 38호 등이 모조리 타버렸다.(왕조실록) 1710년(숙종 36) 4월23일 간성, 통천, 양양, 고성 등 네 고을에서 같은 날 큰 불이 났는데 민가 618호가 타고 사람과 마소가 타 죽었다. 임금이 전소된 집은 전세(田稅), 대동(大同) 및 각 신포(身布)를 면제하여 주었다.(왕조실록)

1804년(순조4) 3월12일 이달 3일 사나운 바람이 일어나 산불이 크게 번졌는데 삼척, 강릉, 양양, 간성, 고성에서 통천까지 동해안 여섯 고을에서 민가 2,600여호, 원우(院宇) 3곳, 사찰 6곳, 창고 1곳 각종 곡식 600섬, 배 12척, 염분(27파)이 불에 타고 타죽은 사람이 61명이었다고 보고하니 임금이 크게 놀라고 딱하게 여겨 따로 조세를 면제하여 구제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교리 홍석주를 불러 위유어사로 임명하여 이재민을 위로하라고 파견하였다.(왕조실록) 그리고 위에 기술한 1860년(철종11) 3월1일 영동의 천화(이겸렬 사초)등 기록을 보더라도 영동지방에서 발생한 강풍을 동반한 대화재(大火災)는 매년 음 3, 4월(양 4, 5월) 영동지방의 양양과 강릉을 중간축으로 하여 남북으로 번져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전해오는 양강지풍(襄江之風)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하략)

 

 

내가 느끼는 아쉬움.

모든 분들이 공감 할 것으로 믿는다.

우리나라의 철비(목록,사진)

http://cafe.daum.net/moonhawje/MebK/321?q=%EC%9A%B0%EB%A6%AC%EB%82%98%EB%9D%BC%EC%9D%98%20%EC%B2%A0%EB%B9%84(%EB%AA%A9%EB%A1%9D%EA%B3%BC%20%EC%82%AC%EC%A7%84)

 

2017.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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