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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고양시

고양...태고사 원증국사 부도.부도비

by 임병기(선과) 2017.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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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한다.

원래 1341년(충혜왕 복위 2) 보우가 중흥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동암이라는 개인의 수도처로 창건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태고암가 太古庵歌 등 훌륭한 작품을 지었으며, 그가 입적한 다음부터 태고사라고 불렀다.

그뒤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치면서 지속되었으나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된 것을 최근에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원증국사부도비각.

갑갑하다

헐고 벽과 창살을 낮게 세웠으면...

 

 

원증국사부도비圓證國師浮屠碑

직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귀부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올렸다.

 

 

귀부

 

 

 

 

원증국사 탑명圓證國師塔銘

글은 이색李嗇이 짓고, 글씨는 권주權鑄가 썼다. 

홍무(洪武 18년(1385년) 을축乙丑 9월 11일

문인門人 전송광사前松廣寺 주지住持 대선사大禪師 석굉釋宏이 비석을 세웠다.

 

원증국사 보우.1301(충렬왕 27)∼1382(우왕 8)

13세에 출가하여 회암사(檜巖寺)광지(廣智)의 제자가 되었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행하였다.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참구하였고,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한 뒤, 선(禪) 수행에 몰두하였다.1330년(충숙왕 17) 용문산 상원암(上院庵)에서 관음기도를 하고, 1333년(충숙왕 복위 2) 성서(城西) 감로암(甘露庵)에서 정진하였으며, 1337년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읽다가 모든 알음알이를 타파한 뒤, 송도(松都)의 전단원(栴檀園)에서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던 중, 1338년 1월 크게 깨달았다.

 

그 뒤 양근(楊根)의 초당에서 어버이를 봉양하며 1,700칙(則) 공안을 점검하였고, 1339년소요산 백운암(白雲庵)에서 「백운가」를 지었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중흥사(重興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창건하여 5년 동안 머물 때 「태고암가」 1편을 지었다.

 

1346년(충목왕 2) 원나라 연경(燕京) 대관사(大觀寺)에 머물 때, 궁중에서 『반야경(般若經)』을 강설하였다. 1347년 7월 호주(湖州) 천호암(天湖庵)에서 석옥(石屋)에게 도를 인정받고, 「태고암가」의 발문과 가사(袈裟)를 받았다. 1348년 귀국하여 중흥사에 있다가, 미원(迷源)의 소설산(小雪山)에서 4년 동안 깨달음 뒤의 수행을 하였다. 이 때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를 지었다.

 

1352년(공민왕 1) 궁중에서 설법하였으며 경룡사(敬龍寺)에 있었는데, 홍건적의 난을 피해 소설산으로 옮겼다. 1356년 왕의 청으로 봉은사(奉恩寺)에서 설법하였고, 그 해 4월 왕사(王師)로 책봉되어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1362년 왕은 그를 희양산 봉암사(鳳巖寺)에 있게 하였고, 1363년 가지산 보림사(寶林寺)로 옮기게 하였다.

 

그 때 왕에게 총애 받던 신돈(辛旽)을 경계하는 글을 올리고 전주 보광사(普光寺)에 가서 머물렀다. 1368년신돈의 참언(讒言)으로 속리산에 금고(禁錮)되었는데, 이듬해 3월 왕이 이를 뉘우치고 다시 소설산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1371년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한 뒤 영원사(營原寺)에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381년(우왕 7) 양산사(陽山寺)로 옮겼는데, 우왕은 다시 국사로 봉하였다.

1382년 소설산으로 돌아와서 12월 17일 입적하였다. 나이 82세, 법랍 69세였다.

 

시호는 원증(圓證)이다.

중흥사 동쪽 봉우리에 탑을 세워 탑호를 보월승공(寶月昇空)이라 하여 영골을 모셨으며, 사리는 양산사, 사나사(舍那寺), 청송사(靑松寺), 태고암에 분장하였다...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수

밑면에 1단 받침이 있고,  둘레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으며 위쪽에는 운룡이 새겨져있다.

 

 

다리

 

 

육각 귀갑문과 꼬리

 

 

부도전

 

 

태고종 중흥 종주. 법운대륜대선사 부도.


마치 뒤편에 위치한 원증국사부도를 현대화한 느낌이다

이 시대의 부도 패러다임의 한 쟝르에 보태고 싶다.

 

법운(1884~1979)

강"원 고성() 출생. 본관 밀양. 법호() 법운(). 대륜은 본명이다.

일찍이 출가, 1895년 유점사에서 득도하였다. 1898년 동선()에서 사미계를 받고 1900년 동안거()에 들어간 것을 시발로 47년간 수도에만 정진하였다. 1908년 유점사 내에 있는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하고, 서울 수송동()에 있는 각황사() 주지로 부임, 사간동()에 법륜사()를 세웠다. 1909∼1945년 각성사() 주지, 유점사 포교사(), 법륜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1945년 유점사 주지가 되었다.
 
1950년 이북 5도불교연합회 교무원장, 1956년 학교법인 동국학원() 이사 •조계종총무원() 총무부장에 취임하였다. 1960∼1970년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불교종단 분열로 1970∼1974년 태고종() 종정()을 지냈다. 총무원장으로 있으면서 종단분규의 수습을 위하여 힘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70년 분립이 결정적 단계에 이르자, 비구이면서도 태고종()편에서 한국불교태고종 종정()이 되어 양 종단의 균등한 발전을 도모하면서 종단의 통합을 위해 힘쓰다 죽었다. 사리탑은 북한산 태고사에, 탑비는 법륜사에 세워졌다. 그는 늘 선교겸수()를 강조하며, 한국불교의 대중화 •현대화를 통한 생활불교의 정착을 지향하였는데, 특히 청년운동에 관심이 커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두산백과사전

 

 

원증국사 부도

흔치 않은 유형의 부도이다.

하대석은 4각형으로 각 면에는 우주, 2개 탱주를 모각하였고, 상부에  8엽 복련을 돌리고 중앙에는 2단 굄을 조출하였다.

8각 중대석 모서리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면마다 4엽의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상대석에는 2단 받침이 있고, 옆면에는 8엽의 앙련과 궐문이 장식되어 있으며, 윗면에는 1단  원형 굄이 있다.

탑신은 석종형이며,  옥개석은 두텁고  밑면에는 1단 받침이 있으며 16엽 연꽃이 돌려져 있다.

팔각지붕의 낙수면은 기울기는 급하지 않고 모서리에는 귀꽃을 표현하였다.

상륜부는 고복형의 보륜, 팔각형의 보개, 복발, 화염보주를 올렸다.

원증국사탑비와 동시대인 1385년(우왕 11)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동행한 달넘새님은

원형 보륜은 2층 탑신, 그위에 옥개석,복발,화염보주로 설명하였다.

즉, 2중 탑신을 가진 부도라고 하였다.

비슷한 작례로는 예산 향천사.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 부도가 있다고 한다.

(나는 답사했어도 전혀 기억하지를 못하고 있었다)



기단부 

 


상대석과 탑신

 


단층 탑신의 초층옥개석.원형보륜.팔각보개.복발.화염보주

2중 탑신이라면 초층옥개석.2층 탑신.2층 옥개석.복발.화염보주

 

 

 


2중 탑신의 부도.2012년 3월

김제 금산사 부도전의 혜덕왕사부도(비석 향좌측 첫번째 부도)


 

2중 탑신의 부도

에천 향천사 의각스님 부도.2010년 4월



양평 사나사 원증국사 부도.2009년 3월


 

북한산

그나저나 이 코스를 다시 들려야한다.

와이?

답사 목록에 포함시켰으나 놓친 님들이 계시기 때문이다.

태고사의 석종형 부도 3기 처럼....


2017.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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