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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원주시

원주...치악산 구룡사

by 임병기(선과) 2017.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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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을 찾아보니

2006년 3월 주마간산식으로 들렸었다.

 

이후

여러번 원주 답사시에도 늘 동선에 벗어나 있었지만 우리카페 머루눈님께서 탑 매니아들에게도 알려지지않은 석탑을 소개하여 강산이 한 번 변하고 다시 인연 지었다.


구룡사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668년(문무왕 8)의상(義湘)이 창건하였으며,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다. 원래 지금의 절터 일대는 깊은 소(沼)로서, 거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의상이 절을 지으려 하자, 용들은 이를 막기 위해서 뇌성벽력과 함께 비를 내려 산을 물로 채웠다. 이에 의상이 부적(符籍) 한 장을 그려 연못에 넣자 갑자기 연못 물이 말라버리고, 그 중 용 한 마리는 눈이 멀었으며, 나머지 여덟 마리는 구룡사 앞산을 여덟 조각으로 갈라놓고 도망쳤다. 의상은 절을 창건한 뒤 이러한 연유를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 도선(道詵)·무학(無學)·휴정(休靜)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가 기울어지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계속 사세는 쇠퇴하였으므로,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로 불러 그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에서는 1706년(숙종 32) 중수되었다. 근래에서는 1966년종영(宗泳)이 보광루를 해체 복원하였으며, 1968년에는 심검당과 요사를, 1971년에는 삼성각을, 1975년에는 대웅전을 보수 단청하였다. 이 절의 당우로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광루(普光樓)·삼성각(三聖閣)·심검당(尋劍堂)·설선당(說禪堂)·적묵당(寂默堂)·천왕문(天王門)·종루(鍾樓)·일주문(一柱門)·국사단(局司壇)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수령 200년이 지난 은행나무

노랗게 물든 가을날 단풍 못지 않게 연록의 잎새가 눈과 마음을 맑게한다.


구룡사 은행나무...고진하

올망졸망한 흥부네 새끼들처럼
무수한 잔가지들을 하늘 가득 거느리고 있었다

그 잔가지들을 다 품을 수 없어 나는
한아름도 넘는 나무 밑동을 힘껏 끌어 안았다

그렇게, 사랑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어린 은행잎에 듣는 빗방울이 속삭여주었다


 

2층누각형의 사천왕문

거의 작례가 없는 전각이며 누하진입하여 대웅전 중정으로 이어진다.


사천왕문 뿐만 아니라 흔히 접할 수 없는 전각들이 배치되어 있다.


도리천님 공덕으로 차량으로 진입하였지만, 구룡사에는 일주문 대신 원통문이 사찰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사진에 담지 못했지만 사찰터를 관장하는 국사단은 영남지방 표충사.통도사.해인사. 제천 신륵사, 횡성 봉복사 등에 있으나 그리 많은 전각은 아니다. 

 

 

서방 광목천. 북방 다문천


 

동방 지국천. 남방 증장천


 

보광루

사천왕문을 누하진입하여 계단을 올라서면 마주하는 2층 누대 건물로, 1706년(숙종 32)에 구룡사 중창시에  세운 건물로 전한다.

지암 등 4명의 승려가 공사를 주도하였으며, 성호선사가 보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765년(영조 41)에 낡고 무너진 것을 고쳐 지었고, 1876년(고종13)에도 서봉화상이 도편수를 맡아 고쳐 지었다. 치악산구룡사 보광루중건상량문 병서雉岳山龜龍寺普光樓重建上樑文幷序에는 당시의 공사 내용이 기록되었는데, 병자년중창건이라고 하였다. 1980년에 단청을 보수한 뒤, 1988년과 2008년∼2009년에 부재 일부와 건물 전체를 해체 수리하였다.


 

 

대웅전 중정과는 일직선상에 있으며 2층 마루로 연결된다.


 

2003년?

화재로 소실되는 장면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현건물은 그 이후 중수 하였다.


 

 

삼존불

석가여래를 주존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를 협시불로 봉안하였다, 

 

 

괘불지주


 

범종각


 

관음전


 

삼성각


 

산신탱.칠성탱.독성탱을 모셨다.

 


3층석탑

풀숲속에 계시어 여름날에는 숨바꼭질하듯 숨어 계실 듯 하다.

머루눈님의 밝은 혜안으로 인연지을 수 있었다.

 


별석의 초층 탑신석

초층옥개석과 2층 탑신석, 2층 옥개석과 3층 탑신석은 하나의 부재이다.

이러한 작례는 경주 박물관으로 옮긴 경주경찰서에 있었던 석탑부재와 경주 남사리 석탑에서 시작되어 고려 초 중기 강원도 영서지방에서 크게 유행하며 트렌드로 자리잡게 된다.

 


희미하지만 탑신석에는 양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낙수면 물매는 깊다.

 


옥개석 층급은 4단(?)이다.

 


3층 탑신 상부에는 방형찰주공이 있으며 상륜은 망실 되었다,.

 


고려중기 이후 석탑으로 생각된다.

 


부도전

조선후기 석종형 부도 6기. 부도탑비 3기. 근자의 부도와 부도비 각 1기가 모셔져 있다.

 

 

지대석(본디부재 여부는 불문명)위에 팔각의 3단대좌를 올리고 종형 탑신을 모셨다.

옥개석은 사모지붕형이다


 

상파당보O대사영주O霜波堂寶O大師靈珠O.  1773년

두 조각 난 비를 접합하였다.

 


지대석위에 탑신과 보주를 일석으로 조성하였다,

부도의 주인공을 새긴 명문은 분명하지 않으며 보주를 크게 표현하였다.,

 


보주에 연잎을 새겼다.

 


항아리형 탑신상부에 원형의 큰 받침을 두고 보주를 올렸다,

 

 


명문이 있는듯 없는듯.

 

 

충허당OO대사지탑 忠虛堂OO大師之塔

 


탑신과 보주가 일석으로 보주에는 연잎과 줄기가 새겨져 있다,.

 


행원당O선탑 行願堂O先塔

 

 

 

세염당초운대사탑洗染堂楚雲大師塔.1735년

 


대좌 원형탑신 큼직한 보주가 일석이다,

부도의 주인공은 알려지지 않았다,

 


팔각대좌위에 길쪽한 팔각 탑신을 올리고 별석의 우진각 지붕의 옥개석을 두었다.

역시 명문은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구룡사 석탑을 소개해준 머루눈님

하루 종일 운전하며 원주의 속살을 알려주신 도리천님

멀리서 한걸음에 달려오신 달넘새님께 감사드립니다


문수사지 석불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폐사지의 옛님들이 다시 나투신 날 함께 하입시더예.


2017.05.09

ㅂ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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