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원주시

원주...석남사지 부도

임병기(선과) 2017. 5. 1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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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지.신림면 성남리751(절골길 59)

민가 뒤편에 위치한 사지로 석종형 부도 1기가 넘어져 있다.

창건과 폐사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삼국사기에 궁예와 관련하여 북원경 석남사 사명이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에 존속했던 사찰로 추정한다.

 

 

사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사지유적비가 서 있다.

 

 

조선후기 석종형 부도

하부에 사리공이 있으며 별도로 조성된 보주는 망실되었다.

 

 

청하대덕석종靑霞大德石鐘

부도를 석종으로 표현한 작례는 처음 접한다.

 

 

 

사리공

 

 

상부 평평한 치석술로 미루어 별석의 보주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도 기단석?

 

 

 

 

 

 

 

 

양길대장군 유적지비

민가 향좌측 도로변에서 개울 건너에 위치

 

양길梁吉

양길(良吉)이라고도 한다. 가계나 출생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진성여왕은 실정이 겹치고 재해가 잇달아 일어나 889년(진성여왕 3)에 국고가 비게 되자, 사자(使者)를 지방에 파견해 세금을 독촉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 초적(草賊)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 웅거해 반란을 일으킨 뒤 도적의 무리들은 공공연하게 신라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무리들 중 죽주(竹州 :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죽산)의 기훤(箕萱)과 북원(北原 : 지금의 강원도 원주)의 양길이 주요 세력이었다.

 

북원에 웅거한 양길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궁예(弓裔)가 그의 부하로 활동한 것으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892년 궁예는 기훤의 휘하에서 나와 양길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 이 때까지만 해도 양길이 세력을 크게 떨치지는 않았다.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光州)를 점령한 뒤 스스로 왕이라 칭한 견훤(甄萱)은 양길에게 비장(碑將)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견훤의 그러한 행동은 선전효과를 노린 것이지만 상대적으로 양길의 세력이 강하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이후 궁예의 투항 뒤 양길의 세력은 점차 커진다.

 

양길은 궁예를 우대해 모든 일을 위임했으며 군사를 나누어주어 동쪽으로 원정을 보냈다.

궁예는 군사를 거느리고 치악산석남사(石南寺)로부터 주천(酒泉 :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내성(奈城 : 지금의 강원도 영월)·울오(鬱烏 : 지금의 강원도 平昌)·어진(御珍 :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 등의 현을 점령했다. 894년에 명주(溟州 : 지금의 강원도 강릉)에 이르렀을 때 그 무리가 모두 3,500명이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8년조에는 궁예의 무리 600여 명이 명주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600명은 궁예가 양길로부터 빌린 병사 수이고, 그들이 명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3,500명으로 불어났을 것이다. 명주에 들어온 무리가 모두 양길의 직접적인 세력기반이 아니었을지라도, 그 뒤 양길은 사실상 강원도 일대에서 세력을 떨쳤다.

 

계속해서 궁예는 저족(猪足 : 지금의 강원도 인제)·생천(牲川 : 지금의 강원도 양구)·부약(天若 : 지금의 강원도 춘천)·금성(金城)·철원 등지를 점령, 군세(軍勢)를 불려나가 패서(浿西)의 적들이 항복해 왔다. 당시 점령한 지역들이 바로 양길의 세력권 내에 흡수되기보다는 궁예의 세력기반이 되었다.

 

이 때부터 궁예는 세력이 커지자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정하였다. 궁예는 양길의 휘하에서 벗어나 독립세력을 구축했고 송악군(松嶽郡 : 지금의 개성)으로부터 왕건(王建)의 투항을 받아 후삼국시대의 강력한 지배자로 등장했다.

이 때 양길은 북원에 국원(國原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 등 30여 성을 가진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궁예의 영토가 넓어지고 인구가 많아지자 양길은 그를 습격하려 했으나, 이 사실을 알아차린 궁예에게 오히려 습격당해 크게 패하였다.

 

그 뒤 양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양길의 세력권이 궁예의 수중으로 완전히 들어오게 된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900년(효공왕 4) 왕건이 궁예의 명령을 받아 광주(廣州)·충주·당성(唐城 : 지금의 경기도 남양)·청주·괴양(槐壤 :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 등을 평정한 뒤이다.

 

신라 하대가 되면서 지방호족이 대두하였다. 처음 지방호족은 중앙왕실의 권위를 인정, 중앙정부와도 어느 정도 연결을 가지면서 독립된 세력기반을 형성하였다.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그들은 중앙왕실의 권위를 점차 부정했고, 초적의 발호는 이와 같은 사태를 부채질하였다.양길의 등장은 초적세력을 규합해 신라 고대국가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양길은 붕괴되어 가는 고대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갈 경륜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양길은 초적 사이의 세력다툼에서도 패배하였다.

 

그가 궁예로 하여금 철원 등의 지역을 병합하게 했지만 실제 그 곳은 궁예의 세력기반이 되었고, 나중에 궁예는 이 지방에 웅거해 그에게 공공연한 적대행위를 자행하였다. 결국 양길은 견훤 및 신라조정과 적대관계라는 부담을 안고 북방의 궁예와 패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거세될 수밖에 없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치악산 봉우리가 아득하다.

석남사 승려, 양길장군, 궁예도 저 봉우리를 바라보았을텐데.

 

201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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