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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부여군

부여...부여박물관 유물

by 임병기(선과) 2017.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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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에 잡힌 몇몇 옛님

 

 

관음보살좌상

(안내문에는 불상으로 소개)

 

 

석조보살입상

 

 

석불입상

 

 

귀부

 

 

수조

탑신석을 가공

 

 

부도.탑신석

 

 

석등(?)

 

 

오층석탑

 부여 석목리 논절마을의 한 절터에서 박물관으로 옮긴 탑

 

 

 

석등대좌.석불대좌

석등대좌는 가탑리, 석불대좌는  석목리사지에서 옮겨 왔다.

 

 

동사리석탑(東寺里石塔)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에 있던 것을 1971년 부여읍 쌍북리로 옮겼다가 1993년에 다시 박물관으로 옮겨 세웠다

 

 

박물관석조여래입상(博物館石造如來立像)

부여읍 금성산의 천왕사로 알려진 절터 부근에서 1933년에 발견된 불상

 

 

귀부

보령 성주사터에서 나온 비석머리와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있던 것으로 추정

 

 

 

부여석조(扶餘石槽)

부여석조로 알려진 이 석조는 원래 있던 장소가 백제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으며, 백제인의 미감을 살린 형태나 세부 표현 기법으로 보아 백제 왕궁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아울러 석조 표면에 새겨진 글의 내용이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 1층 탑신에 새겨진 것과 같은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하였다는 것이어서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백제 귀족 사택지적이 세운 비석으로 관북리에서 발견되었다. 이 비석은 오른쪽에서 네번째 행까지 한 행에 14자씩 모두 56자만이 남아 있다. 비문 첫머리의 글자는 갑인甲寅으로 추정되는데 654년에 해당한다. 일본의 고대 역사를 기록한 책『일본서기』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이 등장한다. 그는 사택지적비에 등장하는 ‘내지성奈祗城의 사택지적砂宅智積’과 같은 인물로 여겨진다. 대좌평은 백제의 최고위 관직이었고, 사택砂宅 가문은 백제의 유력한 귀족이었다.

 

사택지적은 최고 귀족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654년, 절과 탑을 짓고 비석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비문에서는 세월의 덧없음에 대한 탄식과 불교에 의지하려는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사택지적비의 오른쪽 측면 상단에는 둥근 원 안에 봉황이 조각되어 있다. 머리를 들고 날개를 활짝 편 당당한 모습이다. 백제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에 봉황의 형상을 장식하였다. 사택지적비의 봉황 또 한 전형적인 백제의 봉황 무늬를 연상시키는 한편, 잘 알려지지 않은 고대 비석의 의장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甲寅年正月九日 갑인년 정월 9일
奈祇城砂宅智積 내지성의 사택지적은
慷身日之易往 날이 갈수록 몸이 쉽게 노쇠해지고
慨體月之難還 달이 갈수록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퍼하여
穿金以建珍堂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짓고
鑿玉以立寶塔 옥을 다듬어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巍巍慈容 높이 솟은 늠름한 모습은
吐神光以送雲 신령한 빛을 뿜어 구름을 보내는 듯 하고
峩峩悲貌 위엄 있고 비장한 용모는
含聖明以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얼굴무늬 토기

 

 

와당 

 

백제창왕명사리김百濟昌王銘舍利龕

능산리 사지는 능산리 고분군과 동나성 사이에 자리한 절터이다. 동나성은 사비 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羅城의 동쪽 부분이고,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왕들이 잠들어 있는 왕릉으로 추정된다. 능산리 절터에는 목탑과 금당金堂을 중심으로 중문中門, 강당講堂, 회랑回廊, 공방工房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백제 창왕명 사리감은 능산리 절터의 목탑 심초석心礎石 위에서 발견되었다. 명문이 감실 전면 좌우에 새겨져 있는데, 백제 창왕 13년(567)에 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한다는 내용이다.

 

창왕은 사비로 천도한 성왕의 아들로서 554년 왕위에 올랐다. 명문의 정해년은 서기 567년에 해당하며, 이때 목탑 심주心柱를 설치하기 위해 심초석을 세우고 사리감을 함께 묻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리감은 직육면체 화강석의 윗면 좌우 모서리를 깎아 둥글게 만들고 앞면에 사리공을 마련하였다. 사리공 입구 역시 윗쪽을 둥글게 다듬었고, 테두리를 따라 턱을 두었다. 사리공 안에서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능산리 절터는 왕릉인 능산리 고분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왕의 누이인 공주가 공양한 사리감이 절터에서 발견됨에 따라 이 절의 성격이 왕실의 원찰願刹, 특히 신라와의 전쟁에서 비참하게 전사한 성왕을 추모하고 왕릉을 관리하던 절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연통모양토기연가 煙筒形土器煙家

백제 사람들은 부뚜막이나 상하수도관 등 주거 생활과 밀접한 시설에도 흙을 구워 만든 토제품을 이용하였다.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긴 원통 모양의 토기는 아궁이에서 불을 땔 때 연기를 바깥으로 빼 주기 위해 설치한 연통이다. 연통 끝에 얹어진 보주 모양의 토제품은 연가라고 하는데 장식적인 효과를 위한 것이다.


연가는 사비 도읍기에 상류층의 주택 장식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부여와 익산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건물에 사용되었던 고급 부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는 한 마리 봉황이 향로 꼭대기에 앉아 있는 신령스러운 형상을 지니고 있다. 뚜껑은 부드러운 능선이 겹겹이 쌓인 산 모양이다. 신선들의 세계를 표현한 산 모양의 뚜껑에는 산악 사이사이로 구멍이 있어 향연香煙이 피어오르도록 하였다.
산 모양으로 향로를 형상화한 것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나라 때까지 중국에서 많이 만들어진 박산향로博山香爐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박산은 신선들의 이상세계인 삼신산三神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박산향로에는 산수를 배경으로 불로장생의 신선과 다양한 동식물이 등장한다.


백제금동대향로에는 완함阮咸, 종적縱笛, 배소排簫, 거문고玄琴, 북鼓을 연주하는 다섯 악사를 비롯하여 신선, 새와 짐승들, 신기한 상상의 동식물들이 표현되어있다. 이들은 나무와 바위, 물 등 오묘한 산수 경치와 함께 나타나 향로의 세계를 더욱 신비하고 생동감 있는 변화무쌍한 공간으로 만든다.

 

 

 

 

 

 

 

보광사대보광선사비(普光寺大普光禪寺碑)

부여군 임천면 성주산 보광사터에 있던 것으로, 보광사 중창을 주도한 원명국사 충감(1275~1339)의 행적과 중창 과정을 기록한 비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660년 나당연합군 일원으로 백제를 침공한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원래 부소산 중턱에 있었다.

 

2017.01.07

(부여박물관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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