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부여군

부여...부여박물관 보광사대보광선사비.당유인원기공비

임병기(선과) 2017. 1. 1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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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사대보광선사비普光寺大普光禪師碑

() . () ( : 1275~1339) . () () () () () , () . 1336( 5) , .

 

() () . () () () , . 1750( 26) () , .

 

(아래에 실린 보광사지 답사기 참조)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 () () . () () () () (). () () (: ) . () () .

237.9cm, 30.9cm 113.6cm, 133.3cm () . () () 24.2cm () () 6cm () (). . 34 1 69 20 21 18 22 .


() () () () () () () . ()·() () () . () () () 3( 3, 663), () 3 () .

 

2017.01.07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참조)

 

 

 

부여...보광사지

 

 

임천면 가신리 618-1 보광사지. 부여박물관으로 옮긴 대보광선사비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 5년(1336년) 원명국사가 중창불사를 크게 일으켰고 전각이 500칸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후 임진왜란에 전소되고, 영조25년(1750) 승려들이 비문을 다시 새겼다고 한다. 사지에는 와당, 석조, 석탑재, 석등재, 초석, 축대 등이 남아 있다.

 

부여박물관 대보광선사비(2007년)

 

고려시대 보광사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의 공적이 새겨져 있는 비이다. 원래는 충남 부여군 성주산의 보광사터에 있던 것을 1963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비문은 2차에 걸쳐 새겼는데, 앞면은 건립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새겼고 뒷면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추가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원명국사는 19세에 등과하여 선원사에서 뜻을 펴오다가 공민왕 원년(1351) 65세로 입적하였다. 죽으면서 문도들에게 비나 탑을 세우지 않도록 당부하여 6년이 지나서야 비가 세워졌다. 뒷면의 추가된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록을 적은 비도 알아볼 수 없으므로 주지인 석능일이 고쳐 새긴다고 되어있다.

현재 비받침과 비머릿돌이 없고, 비몸만 남아있다. 비몸의 가장자리는 덩굴무늬를 띠 모양으로 둘러 새겼다. 석재는 편마암이고 윗쪽의 양끝을 사선으로 잘라냈다. ‘보광사중창비’라고도 하는 이 비는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석비양식과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구니 스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옥개석.탑신석.옥개석,석등재

 

 

 

 

석등 옥개석

 

 

석등 간주석

 

 

소맷돌

 

 

석조

 

 

201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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