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사대보광선사비普光寺大普光禪師碑 부여군 임천면에 있던 보광사(普光寺)의 중창을 기념하여 건립한 비석. 중창을 주도한 원명국사(圓明國師) 충감(冲鑑 : 1275~1339)의 행적과 중창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충감은 선원사(禪源寺) 출신으로 중국의 강남지방에 유학한 후 간화선의 대가로 이름이 높던 몽산(蒙山) 덕이(德異)의 제자 철산(鐵山) 소경(紹瓊)과 함께 귀국하여 간화선풍을 널리 퍼뜨렸고, 선종 승려들의 생활규범을 정리한 『선문청규(禪門淸規)』의 보급에도 힘썼다. 1336년(충숙왕 복위5)에 그가 개경을 떠나 보광사로 은퇴하자 지방관과 충감의 가족들이 물자를 시주하여 보광사를 크게 중창하였고, 이후 이 곳에는 그의 문도들이 주석하게 되었다.
이 비문은 충감의 제자로서 당시 선원사 주지이던 굉연(宏演)이 원나라에 건너가서 당시 문장가로 이름이 높던 위소(危素)에게 부탁하여 지은 것이다. 본래의 비문은 역시 원나라 사람인 양지(楊池)와 주백기(周伯琦)가 각각 본문과 전액(篆額)을 쓴 것이었는데,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을 거치며 크게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1750년(영조 26)에 당시 주지이던 능일(能一)이 글씨를 다시 새겨 건립하였는데, 이 중수비는 현재 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래에 실린 보광사지 답사기 참조)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부여읍 관북리(官北里)에 소재한 부소산(扶蘇山)의 산성내(山城內)에서 출토되었다. 비신(碑身) 상부(上部)에 이수(螭首)가 있고 귀부(龜趺) 위에 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일찌기 무너져서 비신 왼쪽 부분이 세로로 갈라져 둘로 되었으며 귀부의 소재는 불명(不明)이다. 비는 담흑색(淡黑色) 대리석으로 회백색(灰白色) 반조(斑條: 얼룩무늬)를 띠고 있다. 현재 비신을 접합해서 이것을 수립(竪立)하고 비각(碑閣)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비신의 높이는 237.9cm, 두께 30.9cm이며 이수는 높이 113.6cm, 폭 133.3cm로 이룡을 반결(蟠結)시킨 상을 새겨 매우 웅장하고 힘차다. 비문(碑文)은 자경(字徑) 24.2cm의 해서(楷書)이며 제액(題額)은 자경 6cm의 전서(篆書)로 양각(陽刻)되었다. 비문은 오른쪽 과반이 남아 있지만 닳아져 없어진 정도가 심하다. 총 34행에 1행은 대체로 69자로 되어 있는데 현재 제20행까지는 거의 판독이 가능하나 제21행은 18자 정도가 판독이 되며 22행부터는 대부분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2017.01.07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참조) |
부여...보광사지
임천면 가신리 618-1 보광사지. 부여박물관으로 옮긴 대보광선사비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 5년(1336년) 원명국사가 중창불사를 크게 일으켰고 전각이 500칸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후 임진왜란에 전소되고, 영조25년(1750) 승려들이 비문을 다시 새겼다고 한다. 사지에는 와당, 석조, 석탑재, 석등재, 초석, 축대 등이 남아 있다.
부여박물관 대보광선사비(2007년)
고려시대 보광사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의 공적이 새겨져 있는 비이다. 원래는 충남 부여군 성주산의 보광사터에 있던 것을 1963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비문은 2차에 걸쳐 새겼는데, 앞면은 건립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새겼고 뒷면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추가하였다.
비구니 스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옥개석.탑신석.옥개석,석등재
석등 옥개석
석등 간주석
소맷돌
석조
2014.1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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